사진 속 이현우는 열 살쯤 되어 보였다.
단정한 머리, 조금 큰 흰 티셔츠, 울 것 같은 눈. 소년은 누군가가 뒤에서 밀기라도 한 듯 몸을 반쯤 돌린 채 소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민하린은 지금과 똑같이 열세 살 정도의 얼굴이었다. 남색 가방만 없었고, 대신 작은 빨간 우산을 들고 있었다.
"이거…… 조작 아니야?"
현우가 휴대전화를 돌려 보여 주었다.
가은은 사진을 확대했다. 배경에는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지하철역 출입구가 있었다. 그러나 표지판의 역명이 한 글자씩 사라져 읽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또렷한 것은 출입구 옆에 붙은 둥근 숫자였다.
0.
"현우 씨 어릴 적 사진 맞아요?"
"사진은 처음 봐요."
"얼굴은요?"
"나 같긴 해요."
하린은 잠자코 화면을 바라봤다. 손을 뻗어 소녀의 얼굴을 만지려다 멈췄다.
"저는 저 옷이 기억나요."
"그럼 네가 맞다는 거네."
"네. 그런데 저 애는 저보다 훨씬 오래 전에 있었어요."
모순 같은 말이었다. 하린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곧 자신의 공책을 펴 뒤쪽 낡은 페이지 하나를 보여 주었다.
'너는 나이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하지 마. 네가 몇 살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다.'
아래에는 다른 필체로 한 줄이 더 쓰여 있었다.
'약속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먼저 기억할 때까지 기다려.'
현우는 그 글씨가 낯익었다. 정확히 어디서 본 것은 아니었다. 글자 끝을 조금 위로 올려 쓰는 버릇이 자기 필체와 닮았다. 그 사실을 말하자 가은이 그의 수첩 서명과 나란히 놓아 보았다. 세 글자 중 두 글자의 획이 눈에 띄게 닮아 있었다.
"이건 현재 현우 씨가 쓴 걸 수도 있겠네요."
"이십 년 전에요?"
"아니면 아직 쓰지 않은 글이든지요."
가은은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결론처럼 단정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 점이 좋았다. 이 이상한 하루 동안 사람들은 무엇을 보든 즉시 답을 원했지만, 답을 너무 빨리 정하면 그다음 단서를 놓치기 쉬웠다.
서태경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피곤해졌다. 방의 온도는 그대로인데 손끝이 잿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태경이 말했다.
"저는 언제든 다시 기록에서 빠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를 확인해야 해요."
그는 침대 밑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냈다. 상자 속에는 녹음기 한 대가 들어 있었다.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였고, 테이프에는 숫자 7이 적혀 있었다.
"언제 녹음한 건지 모릅니다. 기계가 돌아갈 때도 있고 안 돌아갈 때도 있어요."
가은은 녹음기를 켰다.
먼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부는 운동장, 멀리서 공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 이어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지워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낯선 여자 목소리가 답했다.
'모든 걸 기억할 수는 없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붙잡을 이름을 정할 수는 있지.'
'그럼 내가 할래.'
'그러면 네가 가장 먼저 지워질 수도 있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말했다.
'괜찮아. 대신 그 애는 보내 줘.'
가은은 재생을 멈췄다. 현우도 말을 하지 못했다. 녹음 속 아이의 목소리는 익숙했다. 자기 목소리를 어릴 때 녹음한 것을 들어 보면 낯설다고들 하지만, 어떤 호흡이나 말끝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당신 같아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 말, 내가 할 법한 말이긴 해요."
하린은 녹음기에 손을 얹었다.
"나 때문에 그랬구나."
그 목소리는 현우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지금껏 규칙을 설명하던 아이가 아니라, 혼자 오래도록 빚을 지고 살아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가은이 태경에게 물었다.
"이 상자 어디서 얻었죠?"
"돌아왔을 때 침대 옆에 있었어요. 누가 두고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신 상자 안쪽에 주소가 있어요."
태경이 뚜껑 안을 뒤집었다. 손톱으로 파낸 작은 글씨가 보였다.
'동명구 서람시장, 지하 분실물 센터.'
현우가 휴대전화 지도를 검색했지만 그런 구도, 그런 시장도 나오지 않았다. 가은은 기계 대신 손수첩을 꺼냈다. 오래된 종이 지도 사이에 끼운 낡은 택시 영수증을 발견하고 얼굴이 굳었다.
"서람시장…… 이거."
영수증에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장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날짜는 가은의 동생이 사라졌다고 기억했던 해였다. 그녀는 동생을 잊은 뒤에도 그 영수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왜 이게 내 지갑에 있지?"
가은은 종이를 만지며 낮게 물었다.
현우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형사님. 이 영수증을 처음 지갑에 넣었을 때 무슨 기분이었을까요?"
가은은 한참 생각했다.
"울었을 것 같아요."
"왜요?"
"모르겠어요. 그냥……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어요."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기억은 사라졌는데 감정만 남아 있는 모습을 현우는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박정호의 딸이 그렸던 그림도 그랬다. 지우개로 지워진 얼굴 옆에 아이는 여전히 두 사람을 그려 두었다.
"시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현우가 말했다.
***
요양원을 나오기 전, 태경은 무작정 동행하겠다고 우겼다. 가은은 그가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태경이 침대 옆 벽을 짚고 일어났다. 휠체어에 타고 있었지만 다리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기억이 불분명해져 바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여기만 있으면 또 잊습니다. 제가 잊을 때마다 누가 대신 결정해요. 식사 시간을, 병실을, 제가 무슨 사람인지까지요. 그만하고 싶어요."
가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행하되, 제가 중지하라고 하면 멈춰요."
태경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웃었다.
"형사님이 규칙을 만들면 좋겠네요."
그러나 일행은 곧장 서람시장으로 갈 수 없었다. 김세진의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집 대문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는 인터폰으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왜 아들인 척하느냐고 화를 냈다고 했다.
"순경님, 지금 어디예요?"
가은이 물었다.
"우리 집 앞이요. 골목 분식집에서 전화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분명 오늘 아침까지 살던 집인데 문패에 적힌 성도 다릅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마요. 누구랑 시비 붙지도 말고. 우리가 갈게요."
가은은 통화를 끊고 현우를 보았다.
"현우 씨, 이건 개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뒤에 나온 사람들 모두 같은 일을 겪을 거예요."
그녀의 경찰서가 사라졌다. 그의 어머니에게서는 세진이라는 아들에 관한 기억이 지워졌다. 하지만 세진은 여전히 저녁 밥을 먹고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존재와 기록이 따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이번에는 남의 집 현관 앞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현우는 하린을 돌아보았다.
"잠깐이라도 가족 기억을 돌려놓을 방법 없어?"
"완전히 돌리려면 이름이 원래 자리로 가야 해요.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는 있어요."
"새로운 관계?"
"기억 속 아들이 아니라, 오늘 만난 낯선 사람으로 다시 알아 가는 거예요. 그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사실이잖아요."
말이 쉬울 뿐, 실제로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어머니 앞에 서서 '오늘부터 저를 새로 알아봐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니. 현우는 세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
세진의 집으로 가는 길에 가은은 택시 안에서 몇 번이나 대화 내용을 연습했다. 어떻게 설명해도 무리한 이야기였다. 당신 아들이 존재했던 과거가 지워졌다는 말은 사실에 가까웠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거짓말이나 정신이상자의 주장으로 들릴 수 있었다.
"신분증 보여 주면 더 복잡해져요."
가은이 말했다.
"내 경찰 경력부터 조회가 안 되니까요. 그러니 오늘 만난 사람을 다친 사람으로 소개합시다. 어머니에게 아들이라고 인정하라고 압박하지는 말아요."
세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아들인데도요?"
"알아요. 그렇지만 어머님은 그렇게 기억하지 못해요. 우리가 다그치면 겁부터 내실 겁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현우가 대신 답했다.
"오늘 다친 사람. 그런데 어머니가 걱정하는 사람요."
세진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살아서 집에 돌아오는 날도 있네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 현우는 평범한 저녁 풍경 때문에 오히려 가슴이 먹먹했다.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를 세웠고, 엘리베이터 앞에는 장바구니를 든 주민들이 섰다. 경비원은 단지 출입문을 열어 주면서 세진을 보자 낯선 사람처럼 누구 집에 가느냐고 물었다. 어제까지 인사하던 이웃들이었다.
세진은 주머니에 있던 집 열쇠를 꺼냈다. 열쇠의 손잡이에는 오래전 어머니가 붙여 준 작은 물고기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잠금장치에는 열쇠 구멍이 없었다. 도어록은 새 모델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세진이 살았던 세월을 없앤 뒤 다른 세월을 덧씌운 것 같았다.
"문은 안 열려도 물고기는 남았어요."
현우가 말했다.
세진은 열쇠고리를 쥐었다. 플라스틱 물고기의 꼬리에는 아이가 물어뜯은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세진은 그 자국을 어릴 때 자신이 낸 거라고 기억했다.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 줄 사람은 지금 없었다.
가은은 그에게 물었다.
"오늘 새로 기억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세진이 잠시 생각했다.
"어머니께 무사히 왔다고 말하는 거요. 저를 못 알아보셔도, 무사하다고는 말하고 싶어요."
가은은 그 대답을 듣고서야 인터폰을 눌렀다.
세진의 어머니는 아파트 관리실까지 내려왔다. 흰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여성이었다. 낯선 경찰관들과 젊은 남자들을 보고 경계했지만, 세진의 오른손 붕대를 보는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손은 왜 그래요?"
"넘어졌어요."
세진이 대답했다.
"그럼 병원에 가셔야지, 여기서 왜 이래요."
"어머니."
세진은 한 번 부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의 눈에는 정말로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가은이 조용히 말했다.
"이분이 아드님이라는 말은 당장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만 기억해 주세요."
어머니는 이상한 요구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분 손을 다쳤어요. 오렌지색 접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접시는……"
세진이 급하게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삿날이라 제가 샀잖아요. 색이 촌스럽다고 하셨지만 매일 거기에 밥 드셨잖아요. 혼자 밥 먹는 게 보기 싫어서요."
어머니는 한 걸음 뒷걸음질했다. 그녀는 세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에게 새 접시를 사 주었을 때 느꼈던 고마움만은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눈물이 갑자기 고였다.
"이상하네. 난 왜 그런 접시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당신 이야기를 들으니까 자꾸 미안해지죠?"
세진이 웃으려다 실패했다.
"오늘 처음 봤으니까,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되죠."
어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현우와 가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손부터 치료하고 가요. 안 그러면 흉터 남아요."
세진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장면에서는 남의 눈물을 보는 것보다 그 사람이 울 수 있도록 자리를 조금 비켜 주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은 어머니가 내어 준 물잔을 들고 한참 말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면서도 상처가 됐다. 현우는 그 옆에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세진이 오늘 받은 밴드를 다시 손목에 붙이는 모습을 보고, 그도 새로 만들어진 관계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태경이 달려왔다.
"큰일 났어요."
그는 하린의 공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페이지가 새로 펼쳐져 있었다.
'서람시장의 문은 한 번 열리면 인근 사람의 이름부터 회수한다.'
그 아래, 누군가 방금 적은 듯 잉크가 젖은 글씨가 있었다.
'오늘 밤 11시 07분. 첫 번째 대량 조정.'
현우가 시계를 보았다. 아직 밤 열 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 끝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걸음을 멈췄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문이 벌써 열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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