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 이름을 지웠다고요?"
이현우의 질문에 서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의 좁은 도로에는 구급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사이렌을 켜지 않았는데도 차 안쪽에서 푸른 불빛이 깜빡였다.
"서태경 씨. 지금 하신 말씀을 설명해 주세요."
윤가은이 수첩을 폈다.
"제 기억을 믿지 마세요."
태경이 말했다.
"그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쉰 듯 낮았지만 문장마다 이상하게 분명했다. 단어를 입 밖에 내기 전에 한 번씩 머릿속에서 확인하는 사람처럼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어떤 사실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전 틀린 답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남긴 물건이나 손에 배어 있는 습관은 거짓말을 덜 해요."
태경은 침대 옆 낡은 서랍을 열었다. 얇은 종이봉투 하나가 나왔다. 봉투 안에는 기차표 반쪽, 이름이 지워진 열쇠고리, 바랜 가족사진, 그리고 잉크로 까맣게 덧칠된 손바닥 모양 카드가 들어 있었다.
"이건 제가 돌아왔을 때 갖고 있던 겁니다. 다른 건 없어도 이건 없어지지 않더군요."
현우가 가족사진을 집어 들었다.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가운데 남자만 얼굴이 흐렸다. 얼굴 아래에는 손글씨로 '그날도 웃고 있었다'라는 문장만 남아 있었다.
"이 사람이 서태경 씨예요?"
"그랬다고들 합니다. 저는 사진에서 어느 쪽이 제 얼굴인지 알 수 없어요."
가은이 사진 뒤를 뒤집었다. 날짜는 한 달 전이었다. 그러나 사진 배경에 보이는 건물은 이미 철거된 지 십 년이 넘은 오래된 백화점이었다. 태경은 그 모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런 일을 얼마나 겪으셨어요?"
"제 방에 걸린 달력으로는 아흔네 번. 병원 기록으로는 아홉 번입니다."
"차이가 너무 크잖아요."
"제가 지워질 때마다 기록이 새로 시작되거든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는 건 간호사가 아니라 저예요. 이유를 모르지만 그 숫자만은 안 없어집니다."
하린이 문 옆에서 한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
"여기서도 누가 이름을 불러 주나요?"
태경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향했다.
"아. 넌 여전히 여기 있구나."
현우와 가은이 동시에 하린을 보았다.
"아는 사이예요?"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 아이 목소리를 들으면 손목이 아파요."
그는 오른손 소매를 더 걷었다. 팔목 안쪽에 굵은 흉터가 있었다. 작은 숫자 일곱이 여러 번 긁혔다 아문 흔적처럼 보였다. 하린은 자신의 가방 끈을 꼭 붙잡았다.
"사람이 일곱 번 돌아올 수 있어요?"
가은이 묻자 태경은 대답을 미뤘다. 대신 현우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당신 머리 위에 붉은 글씨가 있죠?"
"네. 저도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보통 자기 것을 못 봅니다."
현우가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자기 이름을 읽는 사람은 예외예요. 기록을 조회할 권한이 있거나, 이미 한 번 반납한 사람이죠."
태경은 눈을 감았다. 마른 입술이 조금 떨렸다.
"제가 말한 '지웠다'는 것도 기억이 아니라 입에 남은 말입니다. 누가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네가 지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절대로 돌려보내지 마라.'"
"누가요?"
"얼굴이 없는 사람. 회색 옷을 입었어요."
가은의 볼이 굳어졌다. 조금 전 플랫폼에서 본 회수 담당자였다.
현우는 자신의 시간을 확인했다.
[이현우 / 69:40:18]
0번 승강장에서 임시 보류를 받은 뒤에도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숫자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태경은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저 사람이 한 말이 더 있어요. '일곱 번째 증인이 아직 살아 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전 누군가를 찾으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길에서 쓰러져 다시 여기로 실려 오죠."
하린이 작게 속삭였다.
"그건 저예요."
모두가 소녀를 보았다.
"저 사람은 저를 찾으려 했던 거예요. 벌써 여러 번."
"어째서?"
"기억이 안 나요."
하린은 눈을 내리깔았다.
"진짜로요. 저도 기억이 없어서 찾고 있는 거예요."
***
가은은 요양원 간호사에게 태경의 기록을 요청했다. 간호사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낡은 종이 차트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름란이 비어 있었다. 키와 체중, 혈압 수치는 남아 있었고, 오른쪽 팔목의 상처 사진도 붙어 있었다. 오직 이름과 생년월일만 공란이었다.
"입원비는 누가 내죠?"
가은이 물었다.
"관리비 통장에서 자동으로 들어와요."
"통장 명의는요?"
"그게……"
간호사는 컴퓨터를 확인하더니 당황했다. 입금자 이름이 빈칸이었다. 은행 코드만 '000'으로 표시돼 있었다.
태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에 남겨 놓은 것도 누군가 목적이 있는 거겠죠."
현우는 의자에 앉아 태경의 종이봉투를 다시 살폈다. 반쪽 승차권 뒤에는 흐릿한 손글씨가 있었다.
'이름을 되찾기 전에 집으로 가지 마.'
글자 아래 작은 동그라미 일곱 개가 찍혀 있었다. 여섯 개는 검게 칠했고, 마지막 하나만 비어 있었다. 하린은 그 표시를 보자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거 아는 거지?"
현우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모르겠다는 말만 하네."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날카롭다는 걸 현우도 알았다. 하루 사이에 경찰서가 사라지고, 자기가 죽을 시각이 정해졌다가 연장되고, 이름 없는 소녀가 자꾸만 비밀을 말하다 멈췄다. 두려움이 사람을 성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린이 천천히 말했다.
"저도 지워진 적 있어요. 아마 많이요. 그런데 한 번 없어질 때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요. 어떤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마저 잊어버려요. 그래서 중요한 것만 적고 다녀요."
그녀는 남색 가방 속 공책을 꺼냈다. 표지가 닳아 뻣뻣했고, 첫 장에는 커다란 글씨로 '너는 민하린이라고 부르면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제 본명이 이거인지도 몰라요. 그래도 이렇게 불러 주면 제가 대답할 수 있으니까요."
현우는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사과보다 먼저 그 사실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민하린. 난 그 이름을 기억할게."
하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스쳤다. 잠깐 눈이 붉어졌다가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태경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침대 뒤쪽 벽을 가리켰다.
"거기요. 제가 잠들기 전에 매일 손으로 만지는 곳."
현우가 벽지를 들추자 작은 철판이 드러났다. 철판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흠집들이 있었다. 가은이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었다.
'가족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식탁의 빈 의자를 기억한다.'
그 아래에는 네 개의 날짜와 네 개의 장소가 적혀 있었다. 오래된 시장, 문 닫은 소아과, 지하철 0번 통로, 그리고 한빛요양원.
"이걸 언제 쓰셨어요?"
"모르죠. 하지만 제 필체입니다."
가은은 지하철 통로 옆의 작은 화살표를 발견했다. 화살표 끝에는 숫자 '307'이 쓰여 있었다. 태경의 병실 번호와 같았다.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태경은 확신하듯 답했다.
"아마 전 그곳에서 뭘 봤을 겁니다. 그래서 307호로 돌아와 적은 거겠죠. 다음번에 기억이 없어져도 찾으라고."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는 없었다. 번호 열한 자리가 모두 0이었다.
가은이 눈짓으로 받으라고 했다. 현우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귀하의 임시 보류 승인에 결함이 발견되었습니다. 확인 증인이 본인 관계를 상실할 경우 연장이 취소됩니다.'
현우는 가은을 돌아보았다.
'윤가은의 기억 회수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남은 확인 시간은 십이 시간입니다.'
뚝.
통화가 끊겼다. 가은은 입술을 깨물며 수첩을 확인했다. 첫 장에 썼던 현우의 이름 중 마지막 글자가 옅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현우. 당신은 경찰서에서 내 무전기를 꺼 줬어요. 당신은 오른쪽 신발 끈이 풀려 있었고, 다른 사람부터 구하려고 했어요."
손글씨가 잠깐 되살아났다.
태경이 의자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왜요?"
"그들을 부르는 방법이 그거예요. 계속 같은 기억을 읊으면 관리부가 그 관계를 찾습니다. 그러면 둘 다 더 빨리 지워요."
하린이 창문 쪽을 보았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 회색 제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현우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기억하라며."
태경의 시선이 흔들렸다.
"기억하되, 반복하지 말아요. 새 장면을 만들어야 해요. 그들이 지울 수 있는 건 이미 등록된 과거예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은 곧바로 고칠 수 없거든요."
현우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손에 든 수첩을 더 굳게 잡게 되었다.
"그러면 내일 기억을 만들면 되겠네요."
"내일이 올 수 있다면요."
태경이 속삭였다.
***
태경은 자신이 벽에 그어 놓은 흠집을 오래도록 만졌다. 일곱 개의 줄이었다. 그는 그중 여섯 번째 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처음 돌아왔을 때 저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불렸어요. 다음에는 무명씨라고 불렸고요. 어쩌면 누군가 저를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제 이름도 바뀌는 걸 겁니다."
현우는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의 약봉지를 보았다. 약봉지에는 환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307호 환자'라고만 쓰여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의 증거가 방 번호 하나로 줄어들어 있었다.
"돌아온 다음 가장 먼저 뭘 하셨어요?"
현우가 물었다.
"물을 마셨어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태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죠. 다들 제가 무엇을 봤는지,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묻는데, 처음 돌아왔을 때는 목이 너무 말랐어요. 간호사가 종이컵을 줬고, 제가 물을 마시니까 그제야 살아 있구나 싶더군요."
"그 간호사는 기억해요?"
"이름은 모르죠. 하지만 웃는 얼굴은 떠올라요. 컵을 건네면서 '급하게 마시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도 조금 견딜 수 있었어요."
가은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 태경이 기억하는 간호사의 말이 객관적인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태경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그런 식으로 적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제 빈칸을 자기 생각으로 채우는 게 제일 두려웠어요. 어느 날 누가 당신은 원래 나쁜 사람이었다고 하면, 전 반박할 기억이 없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이 저를 만든 셈이죠."
현우는 그제야 태경이 왜 질문 하나에도 말을 고르고, 왜 기억을 믿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지워졌다는 건 이름이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대신 당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적어 둘게요. 오늘 서태경 씨는 물을 마신 기억을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대신 과거를 정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 했어요."
태경이 눈을 감았다 뜨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장만큼은 꼭 남겨 주세요."
요양원 복도에서 쟁반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간호사 한 명이 들어오려다 문턱에서 멈췄다. 그녀는 방 안에 네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는 빈 병실인데요."
태경이 고개를 숙였다.
"또 시작됐군요."
간호사의 눈앞에서 휠체어가 천천히 흐려졌다. 바퀴와 사람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을 현우는 똑똑히 보았다. 다른 세 사람은 아직 또렷했다.
하린이 급하게 태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저씨, 일어나요. 지금 나가야 해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데?"
"아저씨가 예전에 데려가 주려고 했던 곳으로요."
"어딘데?"
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유실물 보관소. 이름도 기억도 가져간 곳."
그 순간 태경의 손목 흉터가 검게 변했다. 일곱 개의 긁힌 선 중 마지막 선이 붉게 빛났다.
태경이 현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알겠어요. 왜 당신 이름이 낯익었는지."
"왜요?"
"그날 당신이 제게 부탁했거든요."
태경은 숨이 가쁜지 한 번 기침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묻는 사람이 오면, 일곱 번째 아이를 지켜 달라고. 그리고……"
그가 목을 움켜쥐었다. 귓가에서 안내 방송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을 절대로 기억나게 하지 말라고."
현우의 휴대전화 화면이 저절로 켜졌다. 저장하지 않은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사진 속에는 지금보다 어려 보이는 이현우가 민하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사진 아래의 날짜는 이십 년 전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나이의 소녀가,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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