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제복의 남자는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바닥에 어둠이 생겼고, 어둠은 곧 깨끗한 회색 타일로 바뀌었다. 누군가 지저분한 것을 지우개로 문질러 없애는 것 같았다. 이현우는 그가 서 있는 자리 근처를 보기만 해도 자신이 어떤 것을 잊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기한을 반환하라고요?"
현우가 되물었다.
남자는 감정 없이 대답했다.
"이미 유효하지 않은 연장을 사용하셨습니다. 원래 예정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민하린이 현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말 섞지 마세요. 저 사람은 질문을 기다려요."
"뭘 기다리는데?"
"스스로 인정하는 말요. 잘못 들었다고 하거나,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회수할 수 있어요."
가은이 앞으로 나섰다.
"경찰입니다. 신원을 밝히세요."
남자는 가은의 얼굴을 보는 대신 가슴에 매달린 신분증을 보았다. 신분증 사진 아래의 이름이 절반쯤 흐려졌다.
"소속 기관은 이미 조정되었습니다. 귀하는 신원을 확인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 소속인데요?"
"삭제 관리부, 0번 구역 회수과."
남자가 자신의 빈 이름표를 가리켰다. 글자는 없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개찰구 너머에서 짧은 종소리가 울렸다. 김세진이 돌아보자 멀리 회송열차의 불빛이 보였다. 차창에는 승객이 없었고, 빈 좌석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저거 타면 되죠?"
세진이 물었다.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이 가요."
가은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가 이내 세진을 밀었다.
"먼저 뛰어요!"
세진이 달리자 회수 담당자가 손을 들었다. 개찰구 바깥에서 흰 선 하나가 튀어나와 세진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가 앞으로 넘어지며 손바닥을 바닥에 짚었다. 손등에서 피가 났다. 피는 빨간색이었다. 현우는 그 평범한 색에 이상할 만큼 안도했다. 아직 이곳에서도 누군가는 다치고 아플 수 있었다.
하린이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학생증 두 장, 잘린 종이 표, 연필과 작고 두꺼운 공책이 들어 있었다. 소녀는 그중 이름이 적히지 않은 종이표를 회수 담당자 쪽으로 던졌다.
남자가 본능적으로 표를 받았다.
"분실물 접수 요청합니다."
하린이 또렷하게 말했다.
"접수 대상의 원소유자를 확인하기 전에는 회수를 진행할 수 없죠?"
회수 담당자의 손이 멈췄다. 빈 얼굴 위로 눈처럼 가는 선 두 개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귀하는 규정상……"
"규정 4항, 분실물 우선 처리요."
하린이 끊어 말했다.
"직접 읽어 드릴까요?"
남자의 몸이 잠시 굳었다. 승강장 시계가 그 틈에 한 칸 움직였다.
가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세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고, 현우가 다른 쪽에서 받쳤다. 네 사람은 회송열차를 향해 뛰었다. 열차의 문은 평범한 지하철처럼 열려 있었다. 다만 승차구 위에는 '귀환 조건: 본인을 기억하는 동반자'라고 적혀 있었다.
"난 어머니가 기억하겠죠?"
세진이 물었다.
"오늘 아침에 계란말이 해 주셨잖아요."
현우가 대답했다. 가은이 이어서 말했다.
"당신 이름은 김세진. 경찰서 3층 복도에서 만났고, 오른손을 다쳤어요."
열차 문에 푸른 불이 들어왔다. 세진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우가 뒤따르려 하자 다시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이현우 / 임시 보류 대상]
[증인 윤가은 등록 확인]
가은이 먼저 열차에 발을 올렸다. 그녀가 뒤돌아 현우의 손을 내밀자 경고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하린이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회수 담당자가 승강장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남자는 하린을 보자 처음으로 기계처럼 매끈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표정이라고 부를 얼굴조차 없었지만 목소리의 높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미등재 생존자, 일곱 번째."
하린의 어깨가 굳었다.
"이번에도 귀환합니까?"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혔고, 회색 제복은 창밖으로 뒤로 밀려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만 또렷하게 들렸다.
"이현우 씨의 기록은 원래 한 번 폐기되었습니다."
열차가 출발했다.
***
현우는 객실 손잡이에 매달리듯 서 있었다. 창밖에 역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터널 벽에는 날마다 쓰는 전단지 같은 것들이 빠른 속도로 붙었다 사라졌다. 초등학교 운동회 사진, 혼인신고서, 구겨진 영수증, 누군가에게 보낸 '잘 도착했어'라는 메시지. 그 모든 것에 사람 이름이 하나씩 빠져 있었다.
객실 좌석 위에는 노선도 대신 작은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귀환자는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록 누락에 따른 공백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가은이 그 문장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우린 어디로 돌아가는 거죠?"
하린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아직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곳요. 누가 기다리는 사람은 집 근처로 돌아가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
"저도 몰라요."
소녀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모른다고 했다. 그 사실이 현우에게는 오히려 믿음직했다. 하린도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이 이상한 곳에서 살아남은 아이였다.
세진은 붕대로 손을 감싼 뒤 어머니 전화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한 번 외울 때마다 번호 끝 두 자리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가은은 자신이 쓰던 펜으로 번호를 적게 했다. 세진이 식탁과 오렌지색 접시를 이야기하자 번호 전체가 잠깐 선명해졌다.
열차가 급정거했다.
창밖으로 번화한 도로와 우산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젖은 바닥을 피해 걸었다. 곧 문이 열리자 익숙한 서울의 저녁 소음이 객실로 들어왔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분식집 앞에서는 튀김 기름 냄새가 났다.
하린이 먼저 내렸다.
"여기까지예요."
현우도 내렸고, 가은이 뒤따랐다. 세진은 플랫폼 바닥과 인도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발아래에는 레일이 없었다. 열차는 좁은 골목의 버스 정류장 표지판 앞에 서 있었고, 사람이 내리자 허공으로 접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세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 위에 붉은 이름은 남아 있었다.
[김세진 / 70:58:11]
현우의 숫자도 표시되었다.
[이현우 / 71:18:02]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장 죽을 듯하던 공포가 사흘짜리 문제로 늘어났을 뿐이었다.
가은이 경찰서를 검색했다. 건물은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고, 해당 경찰서의 직원 목록에는 김세진도 윤가은도 없었다.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이십 년 가까이 사용하던 근무 연락처가 '알 수 없는 발신자'로 저장되어 있었다.
"정말로 없어졌네."
가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현우가 말했다.
"형사님은 안 없어졌어요."
"법적으로는요? 내가 신고할 수 있는 주소도, 소속도 없다면 누가 내 말을 듣겠어요?"
"제가 들을게요."
가은이 그를 쳐다봤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수첩을 다시 펼쳐 현우에게 건넸다. 첫 장에 적힌 두 사람의 서명이 작고 단단하게 남아 있었다.
하린은 근처 공중전화 부스를 가리켰다. 전화기 위 작은 광고 스티커에 낯선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워진 분실물의 임시 보관처. 한빛요양원, 별관 3층.'
"서태경이라는 사람을 찾는다면서요?"
하린이 물었다.
가은이 머뭇거렸다.
"그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알아?"
"지워졌다 돌아온 사람은 기록이 달라요. 보통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누군가의 기록에 구멍을 남겨요."
하린이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수화기에서는 신호음 대신 어린아이의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가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노래……"
그녀는 곧 말을 멈췄다. 동생의 존재를 잊어버린 사람의 반응이었다. 가은은 노래가 낯익다는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워했다.
"다시 틀어 봐."
하린은 수화기를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일반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같은 건 두 번 들려주지 않아요."
하린이 말했다.
현우는 수첩에 노래의 높낮이를 대충 적어 두었다. 음악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처음 세 음은 기억할 수 있었다. 가은이 종이를 빼앗듯 받아 음표와 비슷한 점들을 고쳤다. 그녀의 손가락은 기억이 아니라 근육이 아는 움직임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리 저 주소로 가요."
현우가 말했다.
***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가은은 휴대전화의 메모장을 열었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연락처들은 군데군데 공란이었고, 오늘 찍은 사진에는 경찰서가 있던 자리에 맨바닥만 남아 있었다. 현우는 자기 사진 목록도 확인해 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점심 사진, 물류센터 작업표, 편의점에서 산 생수 사진이 있었다. 그 안에 설명할 수 없는 빈칸 몇 개가 끼어 있었다.
"이런 게 다 지워진 자리일까요?"
현우가 물었다.
가은이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분식집 탁자 위에 컵이 다섯 개 놓여 있었지만 사람은 네 명뿐이었다. 현우는 그날 그곳에서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분명 동료 한 사람이 늦게 와서 물을 마셨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아요. 원래 여분의 컵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가은은 그렇게 말하며 사진을 저장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다섯 번째 컵, 동석자 여부 미확인'이라고 썼다.
"모든 빈칸을 지워진 사람으로 생각하면 우린 아무것도 못 해요. 정말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남겨야 합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은이 실종 전담 형사였다는 사실은 경찰서가 없어진 지금 더 중요해졌다. 그녀가 확인하지 않은 추정을 사실처럼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현우는 이미 여러 번 보았다.
하린이 세진을 보며 물었다.
"아저씨는 어디로 갈 거예요?"
"집에 가 봐야죠."
"누가 기다려요?"
세진은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요. 적어도 아침에는 같이 밥 먹었어요."
하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그 작은 대답이 어떤 승인 절차보다 더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바깥세계에 살아서 돌아왔는데도, 자기가 살던 집에 자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처음부터 증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지워진 건물의 폐허를 다시 보러 가지 않기로 했다. 그곳은 이미 공영주차장이었고, 매달려 있던 수십 명의 이름을 한 번에 구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돌아왔다는 사실, 세진과 가은이 살아 있다는 사실, 하린이 그들을 안내했다는 사실부터 서로 확인했다. 지금까지 지킨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 다음 수사의 출발점이었다.
한빛요양원 별관은 서울 외곽의 오래된 산비탈 아래에 있었다. 네 사람은 택시를 나누어 타고 이동했다. 가은이 운전기사에게 주소를 설명했을 때, 내비게이션에는 '폐업'이라는 표시가 떴다. 그러나 현장에는 불 켜진 건물 한 채가 남아 있었다. 정문 이름표는 세 번이나 덧칠한 흔적이 있었고, 요양원 앞 화단은 오래 방치된 듯 잡초가 무성했다.
현관을 지키던 노인은 그들을 보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굴 찾으시오?"
"서태경 씨요."
가은이 말했다.
노인은 한참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 사람 없는데."
"실종됐다가 돌아온 생존자입니다."
"아, 그 빈 방 사람."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3층을 가리켰다.
"사람이 있는데도 방이 비었다고 나와. 식사를 네 번 올려 보내면 꼭 한 번은 세 개로 계산되고."
현우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 하린은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좁은 계단 벽에는 오래전 입주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사진마다 한 자리가 이상하게 비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어깨가 그 빈자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누군가 분명 그곳에 서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별관 3층의 복도는 조용했다. 끝방 앞에는 307호라는 숫자만 붙어 있었다. 가은이 노크하자 안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문 열려 있습니다."
방 안에는 키 큰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환자복 소매를 걷어 올린 손목에는 오래된 종이 팔찌가 묶여 있었다. 글자가 모두 지워진 팔찌였다.
가은은 신분증 대신 수첩을 보여 주었다.
"서태경 씨 맞습니까?"
남자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붉은 글씨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린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회색 빈칸 하나가 떠 있었다.
[ / --:--:--]
서태경이 현우를 빤히 보더니 낮게 말했다.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의 눈이 현우의 머리 위를 쫓았다.
"왜 내가 지웠던 이름을 달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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