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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3화
PAYLUA ORIGINAL · 제3화

3화. 0번 승강장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6,038자

오프라인 책장
[00:00:58] 숫자는 플랫폼에 들어서자 더욱 선명해졌다. 머리 위에 뜬 붉은 글씨는 눈을 감아도 어둠 속에 비쳤다. 이현우는 시선을 떼고 싶었지만 떼지 못했다. 박정호는 건너편 승강장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보았을 때처럼 검은 배낭을 멨다. 다만 한쪽 구두가 없었고, 손에 든 케이크 상자에서는 촛농처럼 하얀 먼지가 흘렀다. "박정호 씨!" 현우가 소리쳤다.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역 전체가 지나치게 조용했다. 기차가 없는 레일 위에서 철이 식는 소리만 들렸고, 전광판에는 열차 시각 대신 낯선 문구가 반복됐다. [일반 승객 승차 금지] [관계자 확인 대기] 하린이 현우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여기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아까는 부르라며?" "저쪽으로 넘어간 사람은 달라요. 그냥 이름만 말하면 열차가 그 사람을 먼저 찾아요." [00:00:42] 가은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초침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플랫폼의 시간과 시계의 시간이 달랐다. 경찰서 로비를 빠져나온 뒤 십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현우의 숫자는 이미 절반으로 줄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말해." 가은의 목소리에 하린이 어깨를 움찔했다. "목격 확인을 다시 받아야 해요. 지금은 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증명이 필요해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증명하지 못하거든요." "내 수첩으로?" "종이는 증거고, 형사님은 증인이에요. 하지만 이곳은 말만으로는 안 믿어요. 서로만 아는 장면이 있어야 해요." 가은이 수첩을 펼쳤다. 서명 옆에는 오른쪽 신발 끈에 관한 짧은 문장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보았다. "아까 계단 앞에서 제가 왜 펜을 꺼냈는지 기억해요?" "나중에 기록이 바뀔까 봐요." "그다음에는요?" "제가 숫자를 불렀어요. 형사님 손이 떨렸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셨죠." 가은의 눈에 잠깐 놀라움이 비쳤다. "맞아요. 그리고 현우 씨는 내 무전기를 꺼 줬어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나오니까요." [00:00:27] 작은 승인음이 났다. 개찰구 쪽 벽에 무인 민원 발급기 같은 기계가 나타났다. 오래된 표지판에는 '확인 창구'라고 적혀 있었다. 화면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 같은 형상이 보였다. [관계 확인 가능] [신청자: 이현우] [증인: 윤가은] [서로의 기록을 제출하시겠습니까?] "뭘 제출하라는 거야?" 현우가 묻자 하린은 대답 대신 기계 아래쪽의 금속판을 두드렸다. 그곳에 사람 손바닥만 한 홈이 두 개 있었다. "대가가 있어요." "무슨 대가?" "보통은 기억 하나요. 아주 오래된 기억이나 중요한 약속. 여기서는 남의 시간을 붙잡으려면 자기 기억의 무게를 내놔야 해요." [00:00:19]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현우는 손을 첫 번째 홈에 올렸다. 가은이 망설임 없이 두 번째 홈에 손을 댔다. 차가운 금속에서 열이 올라왔다. [증인의 기억을 조회합니다] 가은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어떤 오후를 떠올린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동생이……" 현우가 손을 떼려 하자 가은이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눌렀다. "괜찮아요. 계속해요." 밝은 빛이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에서 번졌다. 누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어쩐지 무섭기보다 슬펐다. 현우는 아주 어린 자신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순간 보았다. 어느 역 대합실이었는지, 손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00:00:03] 기계에서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임시 보류 승인] [이현우 / 보존 심사 71:59:59] 현우의 눈앞이 하얘졌다. 다음 순간 그는 무릎을 꿇고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름은 머리 위에 여전히 붉게 떠 있었지만 숫자는 다시 사흘 가까이로 늘어나 있었다. "살았어요?" 하린이 물었다. "아직은." 가은이 대신 답했다. 그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금 사이에 얇은 검은 줄이 남았다. 볼펜으로 긋고 지우지 못한 자국처럼 보였다. "형사님. 괜찮아요?" "방금 제가 뭘 봤는지……" 가은은 말을 멈췄다. 눈빛이 미묘하게 흐려졌다. 현우는 불길함을 느꼈다. "동생 이야기요?" "동생?" "네. 형사님 동생이 사라졌다고 했잖아요." 가은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내가 그런 말을 했어요?" 현우는 서늘해졌다. 그녀의 기억 하나가 방금 창구의 대가로 넘어간 것이었다. 가은은 곧바로 수첩을 폈다. 예전 손글씨에는 여전히 '동생 실종'이라는 네 글자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글씨를 보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처럼 눈썹을 모았다. "이건 내가 쓴 게 맞는데." 그녀는 끝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하린이 한 걸음 다가왔다. "돌려받는 방법도 있어요. 빼앗긴 기억은 폐기될 때까지 어딘가에 보관돼요." "어디에?" "유실물 보관소요." 말을 끝내자마자 승강장 끝의 불이 하나씩 켜졌다. 벽에는 빨간 선이 그어졌고, 선 너머로 플랫폼 하나가 더 드러났다. 선 위에는 낡은 경고판이 있었다. '열차 진입 시 안전선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보통 전철역에서 보던 문구였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느껴졌다. 반대편 승강장에 선 사람들은 안전선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모두 선을 밟고 서 있었다. 그들은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열차가 자신들을 찾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현우는 다시 박정호를 찾았다. 남자는 플랫폼 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케이크 상자는 여전히 무릎에 올려져 있었다. 아이의 생일을 위해 사 왔던 초콜릿 케이크가 이제 종이 상자 한쪽에서 가루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저 사람을 데려가야 해요." 현우가 말했다. 가은은 그를 붙잡았다. "얼굴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쫓아가면 안 돼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도 제대로 모르잖아요." "그 사람이 박정호 씨라는 건 알아요." "무슨 근거로요?" "케이크 상자요. 그리고 걸음걸이. 오른쪽 발을 조금 끌어요. 지하철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가은은 그제야 현우를 놓아주었다. 대신 수첩을 펼쳐 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적었다. 현우의 남은 시간, 하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확인 창구가 가은의 기억을 가져갔다는 사실. 어느 항목도 확정적인 진실인 척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관찰과 추정을 분리해 적었다. 김세진 순경은 개찰구 기둥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 숫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김세진 / 71:41:12] "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그가 물었다. 가은이 명함을 내밀려다 멈칫했다. 명함의 경찰서 주소가 이미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나가야 합니다. 어머님께 연락하세요." "휴대전화에 어머니 번호가 없어요." 세진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현우는 아까 들은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오렌지색 접시. 어제 새로 사셨다면서요." "맞아요." "어머니가 촌스럽다고 하셨죠. 그런 건 기계가 지우더라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잖아요." 세진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말했다. "그 접시, 사실 아버지 제삿날에 산 거예요. 어머니 혼자 밥 드시는 게 싫어서요." 그 말이 나오자 현우는 자신이 이야기 속 한 사람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다. 김세진이라는 글자보다 식탁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걱정하던 아들이 훨씬 실제처럼 느껴졌다. 하린이 승강장 벽의 지도를 살폈다. "여기서 나가려면 회송열차를 타야 해요." "회송열차는 사람 못 타잖아." 세진의 질문에 하린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여기서는 반대예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람만 타요." 현우는 플랫폼의 지붕을 올려다봤다. 보통 전철역에는 행선지를 알려 주는 지도가 있고, 사람이 실수하지 않도록 선과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는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바닥의 흰 화살표는 누가 보는지에 따라 반대쪽을 향했고, 벽에 붙은 안내문은 어느 순간 '출구'였다가 다시 '입구'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런 데서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현우가 물었다. 하린은 철제 벤치 아래에 붙은 낡은 스티커를 가리켰다. 어린아이 손으로 그린 해바라기였다. 노란 꽃잎 하나가 유독 삐뚤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걸 남겨 놨어요. 다시 길을 찾으려고." "이걸 네가 그렸어?" "아니요. 누군가 저한테 보여 줬어요. 꽃잎이 열한 개면 왼쪽으로 가라고." 현우가 꽃잎을 세었다. 정확히 열한 개였다. 그는 스티커를 휴대전화로 찍었다. 사진에는 벤치와 바닥만 찍혔다. 스티커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은 안 남네요." "그럴 거예요. 남길 수 있는 기록을 이곳이 선택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물건에 기대려고 해요. 하지만 물건도 어느 순간 사라져요." 하린은 가방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그 위에는 검은 점 두 개가 찍혀 있었다. "처음 여기서 나갔을 때 주머니에 있던 거예요. 누구한테 받았는지는 기억 안 나요. 이상하게 이것만 없어지지 않아요." 현우는 돌멩이의 무게를 손끝으로 느꼈다. 평범한 돌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물건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곳에서는 기적에 가까웠다. "네가 여기 몇 번 왔는지도 모르겠네." "몰라요." 하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 번도 안 온 사람처럼 매번 들어올 수도 있어요. 같은 얘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제가 누굴 구해 놓고 다음에는 그 사람을 몰라보는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공책을 만들었어요." 현우는 소녀의 남색 가방을 보았다. 입구 근처가 닳아 실밥이 튀어나온 가방이었다. 어느 어른이 돌보는지도 알 수 없는 아이가 낡은 공책 하나로 자기 존재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가은은 잠시 두 사람을 보더니 수첩을 펴 한 문장을 적었다. '민하린은 해바라기 꽃잎 열한 개가 왼쪽 길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맞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이거, 네가 다음에 잊어도 내가 기억할게."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스티커의 삐뚤어진 꽃잎을 한번 쓰다듬었다. 가은은 수첩 맨 아래에 작은 표시 하나를 더했다. '꽃잎 열한 개 — 아직 검증 안 됨.' 규칙을 하나 알았다고 곧장 믿지 않고, 확인할 때까지 따로 표시해 두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현우는 그 꼼꼼함이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누구의 말보다 다음 행동의 결과가 중요했다. 멀리서 전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레일을 따라 오는 기차는 없었다. 전광판에 열차 문양만 나타났고, 그 아래에 숫자가 찍혔다. [회송열차 진입 03:00] [회수열차 진입 02:59] 가은이 두 문장을 나란히 읽었다. "한 분 차이네요." 하린의 얼굴이 굳었다. "하나 먼저 와야 하는데요. 순서가 바뀌었어요." 그때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던 박정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지 같았던 얼굴 한가운데 작은 검은 점이 생겼다. 그 점은 눈이 아니라 글씨였다. 멀리서도 읽을 수 있게 또렷한 세 글자. '살려줘.' 현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안전선 앞에서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레일 아래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억해 줘." "내 이름을 말해 줘." "아직 집에 안 갔어." 박정호는 상자를 현우 쪽으로 밀었다. 케이크 뚜껑에 어린아이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빠, 우리 생일 내일 또 하자.' 현우는 그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박정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하게 눈과 입의 흔적이 돌아왔다. 하린이 숨을 삼켰다. "지금이에요. 저 사람에게 누구였는지 말해 줘요." 현우는 안전선 너머로 외쳤다. "당신은 박정호예요! 딸한테 초콜릿 케이크를 사 간 아빠예요. 놀이터에서 아이가 달려와 안겼던 사람이라고요!" 박정호의 얼굴이 절반쯤 돌아왔다. 그런데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 전광판이 한 번에 붉어졌다. [비인가 복원 시도 감지] [회수 담당자 출동] 승강장 반대편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짙은 회색 제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남자였다. 그의 얼굴에는 코도 눈도 없고, 빈 이름표만 달려 있었다. 그가 현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현우 씨. 당신은 승객이 아니라 미납 기록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방금 전 안내 방송과 똑같았다. "보류 기한을 반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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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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