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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화
PAYLUA ORIGINAL · 제2화

2화. 이름을 부르는 사람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6,594자

오프라인 책장
비상계단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현우는 손잡이를 세 번 내리눌렀다. 문짝에는 분명 비상구라고 적혀 있었고, 그 위에는 초록색 사람이 뛰어가는 그림도 있었다. 그러나 문틈에 손톱 하나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마치 문을 그려 놓은 벽이었다. [이현우 / 00:58:43] 유리창에 비친 숫자가 줄어들었다. "비켜 봐요." 윤가은이 현우를 옆으로 밀어내고 어깨로 문을 쳤다.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은은 허리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더니 철제 잠금장치를 살폈다. 열쇠 구멍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매끈했다. "이게 무슨……" "이미 지워진 거예요." 민하린이 말했다. 소녀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짙은 남색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멘 채, 복도 반대편을 가리켰다. 복사기와 정수기 사이에 조금 전까지 없던 회색 줄이 생겨 있었다. 줄은 바닥과 벽을 따라 한 뼘씩 번졌다. 지나가는 순경의 구두 앞코가 그 줄에 닿자 가죽의 윤곽이 순간 흐릿해졌다. 순경은 발을 멈추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못 느껴?" 현우가 물었다. "자기 것이 없어질 때는 잘 몰라요. 남이 기억해 줘야 해요." 하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현우가 다시 물으려는 순간, 천장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평소라면 민원 안내가 나왔을 곳에서 낮고 정중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록 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미확인 인원께서는 제자리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수사팀 사무실 안에서는 여전히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한 경찰관이 프린터에서 출력물을 뽑아 상관에게 건넸다. 다른 직원은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그들은 방송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컵에 담긴 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종이컵 가장자리에서 물방울이 잠시 공중에 매달렸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가은이 수첩을 꺼냈다. 첫 장에는 두 사람이 함께 쓴 이름과 서명이 있었다. 글씨는 남아 있었지만 페이지 귀퉁이의 날짜가 흐려졌다. 가은은 볼펜 뚜껑을 이로 물어 뽑았다. "지금 시각을 적을게요. 현우 씨, 숫자 읽어요." "오십육 분…… 아니, 오십오 분 사십 초." "내가 사라지면 이 노트라도 가져가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수사할 때는 최악을 상정해야 하니까요." 가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끝이 떨렸다. 현우는 그 떨림을 보고서야 그녀도 자신과 똑같이 겁을 먹고 있음을 알았다. 하린이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쓴 건 조금 늦게 없어져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뭐가 부족한데?" "기억하는 사람이요. 기록은 지워도, 누가 그 사람을 계속 부르면 바로 없애지 못해요." 현우는 놀이터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아이는 그림 속에서 아빠의 얼굴을 지우면서도 그림을 버리지 않았다. 엄마는 남편의 존재를 잊었는데, 아이는 왜 그 자리에 사람 하나를 그렸을까. 기억이 지워지고 난 뒤에도 마음에는 빈 모양이 남는 것일까. "그럼 이름을 계속 부르면 되는 거야?"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아요. 진짜로 그 사람을 기억해야 해요. 전화번호처럼 외우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는지요." 하린은 가은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형사님. 이 아저씨가 방금 뭘 했는지 말해 주세요." "현우 씨요?" "네." 가은은 황당한 얼굴로 현우를 한번 보고 말했다. "비상문을 세 번 잡아당겼고, 신발 오른쪽 끈이 풀려 있어요. 무서우면서도 나보다 앞에서 문을 열려고 했고요." 하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창 속 현우의 숫자가 순간 멈췄다. 정확히 세 박자였다. 곧 다시 움직였지만 00:55:12에서 00:55:11로 줄어드는 속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현우는 그제야 한동안 숫자가 초보다 빠르게 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방금 멈췄어." "목격자는 시간을 벌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건물이 먼저 사라질 거예요." 하린이 가리킨 복도 끝에는 분명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지금은 버튼도 층수 표시도 없는 흰 벽만 남았다. 경찰서 전체가 세상에서 천천히 떼어지고 있었다. 가은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상황실, 3층 긴급 대피 요청합니다. 출입문 이상 현상. 전 인원 지상으로 이동……" 치직. 무전기 너머에서 자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윤가은 형사는 해당 부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은이 숨을 멈췄다. 현우가 그녀의 손에서 무전기를 빼앗아 꺼 버렸다. "저런 말 믿지 마세요. 형사님 여기 있잖아요." 그 말이 끝나자 복도에서 한 남자가 현우의 팔을 붙잡았다. 아까 이름이 붉게 보였던 김세진 순경이었다. "저기, 민원인분. 여기서 뭐 하십니까? 대피 훈련은 끝났는데요." "김세진 순경님, 맞죠?" 순경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제 이름 어떻게……" 그의 제복 명찰을 보니 '김세진'에서 가운데 글자가 사라져 있었다. 이름은 김진처럼 보였다. 순경은 자기 명찰을 내려다보면서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하린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저 사람한테 마지막으로 한 일을 물어요." "순경님, 오늘 아침에 뭐 드셨어요?" "뭐라고요?" "오늘 출근하기 전에요." 세진은 당황하다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가 싸 주신 계란말이요. 제가 오늘 야근이라……" 그가 말을 멈췄다. "잠깐만. 우리 어머니가 계란말이를 해 주셨던가?" 현우가 소매를 움켜쥐었다. "하셨을 거예요. 어디서 먹었는지 기억해 보세요." "주방 식탁에서요. 오렌지색 접시였는데……" 순경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울음이 터지려는 얼굴이었다. "어제 깨진 접시를 새로 사 드렸거든요. 어머니는 색이 촌스럽다고 하셨고." 명찰의 글자가 잠깐 온전해졌다. 붉은 숫자는 여전히 머리 위에서 흐르고 있었지만 얼굴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하린이 말했다. "이제 같이 데려가요. 혼자 두면 금방 잊어요." 그때 사무실 안에서 여직원 한 명이 전화기를 든 채 복도로 뛰어나왔다. 이름표에는 '오민주'라고 적혀 있었지만 현우에게 보이는 붉은 이름은 이미 다른 글자로 변해 있었다. [오민주 / 71:38:04] "윤 형사님, 이상해요. 아까까지 팀장이 저기 계셨는데 자리가 없어졌어요. 전화를 받으니까 그분이 우리 팀에 없다는 거예요." 가은은 민주를 붙잡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팀장님과 무슨 이야기했어요?" "회의요. 사건 보고하라고……" "무슨 사건?" 민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하려는 순간, 눈동자가 텅 빈 사람처럼 흔들렸다. "무슨 사건이었죠?" 가은이 수첩을 꺼내 민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이름을 직접 쓰도록 했다. 민주는 글자를 하나 쓰고 손을 떼더니 놀라서 종이를 들여다봤다. 방금 적은 이름에서 마지막 획이 지워지고 있었다. "제가 쓴 건데 왜 없어져요?" "모든 걸 지금 이해하지 않아도 돼요. 이름 말고 같이 겪은 일을 생각해 봐요." 민주는 책상 아래에 두고 온 도시락 이야기를 했다. 팀장이 결혼기념일이라며 케이크를 돌렸다는 이야기, 자기가 종이접시를 잘못 가져와 한바탕 웃었다는 이야기. 이야기가 구체적이 될수록 그녀의 손끝이 덜 떨렸다. 현우는 그녀도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이 민주가 돌아봤다. 자기 자리 앞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저 전화 안 받으면 징계받아요." "가지 마세요!" 가은이 소리쳤지만 민주는 고개를 젓고 사무실로 뛰었다. 두 사람이 따라붙기도 전에 유리벽이 밀려나듯 변했다. 문이 있던 자리가 매끈한 벽이 되었고, 전화벨 소리까지 사라졌다. 현우는 벽에 손을 댔다. 조금 전까지 민주의 손을 잡았던 촉감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사라진 거예요?" "아직은 아니에요." 하린이 대답했다. "저 안에서 움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문을 열 방법은 없어요." 가은은 민주의 이름과 도시락,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수첩에 급히 적었다. 현우는 그녀가 펜을 너무 세게 눌러 종이 뒷면이 찢어질까 봐 걱정했다. 나중에 민주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누구를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것보다 나았다. 네 사람은 계단 대신 중앙 복도로 뛰었다. 복도에는 비상계단보다 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무실 한 칸이 통째로 사라졌는데도 옆 칸 직원들은 어제부터 그곳이 벽이었다는 듯 움직였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반쯤 식은 커피는 책상 없이 바닥 높이에 떠 있었다. 컵이 사라지자 커피 자국만 잠깐 공중에 남았다가 지워졌다. "건물이 이렇게 없어질 수 있어?" 가은이 물었다.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하린은 호흡을 고르며 답했다. "모두가 이 건물이 없었다고 생각하도록 바뀌는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만 아직 이전 장면을 보고 있는 거죠." 현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를 열었다. 경찰서 위치를 가리키는 파란 점은 도로 한복판에 있었다. 길 찾기 목록에서는 경찰서가 사라져 있었고, 그 자리에 공영주차장이 검색되었다. 지도 확대 화면에는 이미 빈 주차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럼 밖에 나가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어요. 다만 출구도 기록에 포함돼요." 실제로 정문 자동문은 양쪽 유리가 맞닿은 채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이 있었고, 택배 기사 한 명이 맞은편 인도를 걸어갔다. 그런데 기사는 경찰서 건물을 보는 대신 주차장 차단기를 피하는 동작을 했다. 눈앞에는 분명 유리문과 안내 데스크가 있었는데도 그 사람의 세계에는 이미 다른 풍경이 들어앉은 셈이었다. 가은이 유리문을 권총 손잡이로 내려쳤다. 유리에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총은 쓰지 마세요." 현우가 말했다. "여기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가은은 턱에 힘을 주고 총을 넣었다. 당황했지만 판단은 놓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린은 안내 데스크의 작은 출입 카드 함을 열었다. 그 안에 원래 없었을 낡은 검은색 승차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 한쪽에는 얇은 은색 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숫자 0 하나만 찍혀 있었다. "이걸 왜 여기서……" 소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누가 일부러 길을 남겼네요." "무슨 길?" "0번 승강장으로 가는 길요. 보통은 문이 다 닫힌 다음에 생기는데." 하린이 승차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얇은 종이가 똑바로 서더니 바람 한 점 없는 로비에서 혼자 앞으로 미끄러졌다. 네 사람이 따라가자 종이는 벽과 정문 사이, 늘 청소 도구가 놓여 있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낡은 지하철 개찰구가 있었다. 경찰서 1층 구석에 지하철 개찰구라니. 현우는 믿을 수 없었다. 바닥은 회색 대리석에서 오래된 승강장 타일로 이어졌고, 형광등의 흰빛은 병원 복도처럼 차가웠다. 개찰구의 전광판에는 '승차권을 대 주십시오' 대신 다른 문장이 떠 있었다. [미확인 승객 4명] [목격자 동반 시 임시 입장 가능] 가은이 하린을 보았다. "너는 대체 누구야?" "이름이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대답이 아니야." 하린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누가 제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렀는지 찾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거예요." 현우는 그 말의 의미를 묻지 못했다. 머리 위 숫자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현우 / 00:17:09] 좀 전까지 오십 분 이상 남아 있었다. 복도를 지나온 시간은 길어 봐야 십 분이었다. "왜 이렇게 줄었지?" 하린이 개찰구 바깥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눈에 익은 글씨로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라짐을 관찰한 사람은 예정 시각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 아래, 마치 현우만 읽으라는 듯 붉은 글자가 나타났다. [입장 거부 시 조기 회수] [남은 시간 00:16:59] 가은이 현우의 손을 꽉 잡았다. "같이 들어가요." "형사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이미 위험해요. 그리고 방금 내 이름을 누가 불러 줬는지 잊지 않았어요." 가은은 자신이 쓴 수첩을 펴서 현우에게 보여 주었다. 새 페이지에 방금 적은 글이 있었다. '이현우. 오른쪽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겁을 먹었지만 다른 사람을 먼저 살폈다. 나는 이 사람을 기억한다.' 개찰구에서 짧은 승인음이 울렸다. [목격 관계 확인] [임시 승차 승인] 네 사람이 통로를 통과하는 순간, 뒤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와 비슷한 것이 들렸다. 돌아보니 경찰서 로비가 종잇장처럼 접히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 출입문, 바깥 인도까지 한 장의 사진처럼 납작해졌다. 그 사진의 가장자리에서 얼굴 없는 직원들이 조용히 떨어져 나갔다. 세진이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요!" 하린이 그를 붙잡았다. "지금 돌아가면 아무도 못 구해요." 현우도 뒤돌아서려 했다. 가은이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살아남아서 방법을 찾아야 해요." 통로 끝, 광고판 하나가 깜빡였다. 전철 시간표처럼 보였으나 열차의 목적지는 모두 한 단어였다. '삭제.' 그리고 안내 방송이 흘렀다. '0번 승강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름이 호명된 승객께서는 지정된 열차에 탑승해 주십시오.' 현우는 플랫폼 너머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검은 배낭을 멘 남자였다. 손에는 찌그러진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박정호. 그러나 현우가 소리쳐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백지처럼 희었다. 그때 현우의 머리 위에서 숫자가 다시 한번 건너뛰었다. [이현우 / 00:00:59] 한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남은 것은 고작 일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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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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