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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1화
PAYLUA ORIGINAL · 제1화

1화. 붉은 이름의 유통기한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6,249자

오프라인 책장
이현우는 사람의 머리 위를 보는 버릇이 없었다. 불필요하게 시선을 올리면 시비가 붙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쉬웠다. 서울에서는 남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가장 편한 예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부터는 달랐다. 지하철 2호선 승강장에서 한 남자의 머리 위에 붉은 글자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호 / 71:58:42] 현우는 눈을 비볐다. 광고판도 아니고 증강현실 안경의 화면도 아니었다. 빨간 글씨는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정확히 따라 움직였다. 사람이 붐비는 승강장에서도 그 이름만 선명했다. 남자는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말끔한 셔츠에 검은 배낭을 멨고, 손에는 아이가 그린 듯한 그림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꽃과 집, 세 사람이 있는 그림이었다. 현우는 그 앞에서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저기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 혹시 머리 위에……" "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글자는 그대로였다. 시간이 초 단위로 줄어들었다. [71:57:55] 현우는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남자를 슬쩍 비췄다. 사진 속에는 남자와 사람들만 있었다. 붉은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과로 때문인가.' 어젯밤 네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최근 맡은 물류센터 야간 데이터 정리 작업 때문에 일주일 내내 잠이 부족했다. 현우는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확인했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후에는 같은 이름을 길 건너 편의점에서도 보았다. 분명 다른 사람이었는데 머리 위 글자는 똑같았다. [박정호 / 65:11:02] 하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니 지하철의 그 남자였다. 옷만 바뀌어 있었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와 작은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현우는 충동적으로 따라갔다. 남자는 낡은 아파트 단지 앞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아빠를 보자 달려가 안겼다. 머리 위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오늘 생일 케이크 사 왔어?" "그럼. 초콜릿이지." 현우는 아파트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알 수 없는 숫자 때문에 한 가족의 저녁을 훔쳐보는 자신이 싫었다. 그런데 다음 날, 박정호의 이름이 검색창 자동 완성에 나타났다. '박정호 실종.' 지역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지 여덟 시간. 경찰은 단순 가출 가능성도 조사 중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현우는 검색 결과의 날짜를 다시 봤다. 분명 오늘 올라온 게시물이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남자에게 남은 시간은 65시간이었다. 아직 이틀 이상 남아 있어야 했다. 그 순간 현우는 깨달았다. 실종은 이미 시작됐지만 '사라지는 사건'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여자아이의 케이크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아파트 출입문을 지나치며 본 택배 기사님의 이름표도. 결국 현우는 경찰서를 찾았다. "실종자 가족이세요?" "아니요. 그런데 중요한 정보를……" 접수대 경찰관은 회색 종이컵을 밀어주었다. 현우가 머리 위 붉은 이름과 숫자를 설명하자 얼굴빛이 빠르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황당해서, 그다음에는 걱정돼서. "일단 연락처 남기시죠. 담당 팀에 전달하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젊은 여형사가 들어왔다. 짧게 묶은 머리와 비에 젖은 운동화가 먼저 보였다. "박정호 씨 이야기하는 분이죠?" "네." "윤가은입니다. 실종 전담이에요. 잠깐 같이 가시죠." 가은은 조용한 조사실에서 현우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중간에 비웃지 않았고, 말이 끝날 때까지 적지도 않았다. 대신 세 가지 질문만 했다. "이름은 항상 본명으로 보이나요?" "아직 한 명만 봤습니다." "시간이 줄어드는 이유는 모른다는 거죠?" "네."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남습니까?"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은은 책상 위에 종이 서류철을 놓았다. '실종자 박정호'라고 써 있던 표지였다. 그런데 현우가 내용을 펼치는 순간 사진이 사라졌다. 칸에는 하얀 종이만 있었다. 기록이 삭제된 흔적조차 없었다. "우리 팀은 어제 분명히 이 사람 사진을 출력했어요." 가은이 말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주민등록번호가 조회되지 않아요. 직장에서는 그런 직원이 없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사라졌다고 신고해 놓고, 지금은 결혼한 적 없다고 말합니다." 현우는 목이 말랐다. "아이도요?" "아이한테는 확인 중입니다." 가은은 서랍에서 노란 포스트잇을 꺼냈다. 거기에는 검은 볼펜으로 박정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접 손으로 쓴 건 아직 남더군요. 다만 오래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포스트잇 위의 글자가 옅어졌다. 잉크가 종이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휴대전화에 '박정호'를 입력했다. 문자가 화면에서 지워졌다. 가은이 낮게 말했다. "지금 보이는 숫자가 있습니까?"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볼 사람이 없었다. 현우는 경찰서 조사실에서 자신이 봤던 숫자를 다시 계산했다. 첫 번째 목격은 어제 아침 여덟 시 무렵. 당시 표시된 남은 시간은 약 72시간이었다. 실종 신고는 그 다음 날 접수됐다. 실제 육체가 사라진 시점과 존재가 지워지는 시점이 다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실종된 뒤에도 일정 시간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 몰랐다. "형사님. 박정호 씨 휴대전화 마지막 위치 알 수 있어요?" 가은은 도표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휴대전화 기지국 접속 기록이 끊긴 곳은 아파트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작은 전철역이었다. 특이하게도 역 CCTV에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가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만 혼자 움직이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이것도 지워지는 중이에요." 가은은 영상을 재생했다. 케이크 상자가 허공에서 흔들리며 개찰구를 통과했다. 잠깐 화면을 가로막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만 상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 "저게 가능한 거예요?" "모르죠. 그래서 당신을 부른 겁니다." 현우는 화면 속 시계를 확대했다. 시각이 오 분 간격으로 건너뛰고 있었다. 가은이 다른 날짜 파일을 열자 같은 현상이 없었다. 사라진 사람의 주변 시간까지 어긋난 것 같았다. "해당 역 주변에는 실종 사건이 많습니까?" "최근 한 달에 네 건. 원래는 한 건도 거의 없는 지역이었어요." 가은은 현우에게 신분증과 개인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 했다. 종이에 쓴 숫자는 남았다. 그러나 컴퓨터에 입력한 휴대전화 번호는 한 자리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가은이 직접 저장한 파일을 다시 열면 끝자리만 달라져 있었다. "전산 기록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요?" "아마요." 가은은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 표지에 날짜를 적고 속지 첫 장에 현우의 이름을 썼다. 그다음 현우에게 직접 날짜와 자신의 서명을 적게 했다. 둘의 필체가 달랐다. 나중에 기록이 사라지거나 바뀌면 누가 무엇을 썼는지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노트 첫 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오늘부터 확인할 사실: 이름이 보이는 사람은 72시간 안에 존재 자체가 지워질 가능성이 있다. 기록이 변조된다. 서명 두 개로 상호 검증한다.' 현우는 노트를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함께 적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게가 줄었다. "형사님은 왜 믿어 주시는 거예요?" 가은은 잠시 펜을 놓았다. "예전에 제 동생이 사라졌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열한 살이었어요. 어느 날 가족사진에서 얼굴이 없어졌어요. 부모님은 원래 저 혼자 딸이라고 하셨고요. 그런데 저는 동생이 있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요. 아주 작은 기억뿐이지만." "혹시 이름이……" "이름은 기억 안 나요. 노래만 기억나요. 자장가 비슷한 멜로디." 가은은 짧게 허밍했다. 단순한 음이었다. 현우는 그 노래가 어쩐지 익숙했다. 언제 들었는지 몰라도 꿈에서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가은은 곧 표정을 정리했다. "경찰이라서 믿는 건 아닙니다. 믿을 만한 증거가 있어서 믿는 거예요. 그 증거가 당신이 본 글자일 수 있겠고요." 잠시 뒤 두 사람은 그 전철역을 찾아갔다. 플랫폼은 정상적이었다. 승객들은 휴대전화를 보고 기차를 기다렸다. 현우는 역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벽에 붙은 노선도에는 한 정거장이 흐릿하게 긁혀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원래 인쇄가 있었던 자리를 누군가 문지른 흔적이었다. "여기 역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요?" 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에는 없어요. 그런데 출입 기록에는 0번 승강장이라는 항목이 남아 있어요." "0번이요?" "관리실에 물었더니 그런 승강장은 없다고 합니다." 그때 스피커에서 안내음이 들렸다. 대합실 사람들은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현우와 가은은 동시에 소리를 들었다. '사라지는 승객께서는 0번 승강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우는 벽을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 매끈했던 타일 가운데 얇은 선이 생겼다. 문틈처럼 생긴 선이었다. 틈새 아래에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은이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은 가지 마세요. 준비가 안 됐어요." 현우도 동의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박정호가 이미 그곳으로 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대합실에 있는 사람 누구도 안내 방송을 듣지 못했고, 바로 옆 역무원은 벽에 계단이 생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역에서 나와 주민등록 기록과 가족 진술을 다시 맞춰 보기로 했다. 그러나 현우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봤다. 벽에 생긴 틈은 그가 움직일수록 조금씩 넓어졌고, 사람들이 시선을 돌릴 때마다 줄어들었다. 가은이 택시를 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이를 만나 봅시다. 아이가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면 단서가 될 수 있어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사람의 생일 케이크, 이름을 잊은 가족, 종이에 남았다 사라지는 글씨. 어떤 단서 하나도 우연으로 볼 수 없었다. 다만 아직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왜 내가 그 이름을 보게 된 걸까?' 그날 오후 가은은 현우를 실종자 마지막 목격 장소로 데려갔다. 아파트 앞 놀이터에는 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현우가 보자 아이는 무릎 위에 그림을 펼쳤다. 꽃과 집, 사람 세 명. 하지만 왼쪽 사람의 얼굴 부분만 지우개로 새하얗게 문질러져 있었다. "이 그림 누가 그렸니?" "제가요." "여기 사람이 세 명이네." 아이는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두 명인데요." 현우는 더 묻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가 다가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말라고 손을 잡아끌었다. 가은이 경찰 신분증을 보여 주며 사과했지만, 엄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가은은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우리가 막을 수 있었을까요?"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요." "그래도 방법은 찾아야 합니다." 두 사람은 그날부터 사라진 사람들의 기록을 찾기로 했다. 지워진 사람을 기억하는 쪽이 아니라, 지워지기 전에 남긴 흔적을 모으는 쪽이었다. 가은이 가져온 오래된 실종 사건 기록에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었다. 실종자의 가족이 기억을 잃었고, CCTV 영상에서 실종자만 흐려졌으며, 사건 담당 수사관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부서로 발령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 끝에는 한 생존자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서태경. 가은이 서류를 짚었다. "이 사람은 실종됐다가 돌아온 유일한 사례예요.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현우는 서태경을 만나기로 했다. 주소를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경찰서 복도 끝에서 빨간색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윤가은 / 71:59:59] 가은은 복사기 옆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현우가 다가가자 이름 위 숫자가 줄어들었다. "형사님!" "왜요?" 현우는 숨이 막혔다. 가은에게 경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다른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던 경찰관들의 머리 위에도 같은 색의 이름이 하나둘 떠올랐다. [김세진 / 71:59:55] [오민주 / 71:59:55] [박종길 / 71:59:55] 복도에 있던 사람 전부였다. 한꺼번에 수십 명이 사라질 예정이었다. 바로 그때, 출입문 앞에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놀이터에서 본 아이보다 조금 큰 열세 살쯤의 소녀였다. 남색 가방을 메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이름도 숫자도 없었다. 현우와 눈이 마주치자 소녀가 조용히 말했다. "이현우 씨.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넌 누구야?" "민하린이에요." 소녀는 사람이 가득한 복도를 둘러봤다. "지금은 건물 전체가 지워지는 중이거든요." 현우가 비상계단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순간,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머리 위에도 붉은 글자가 나타났다. [이현우 / 00:59:59] 다른 사람에게는 사흘이 주어졌다. 현우에게 남은 시간은 한 시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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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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