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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54화
PAYLUA ORIGINAL · 제54화

54화. 사라지는 역명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3,499자

오프라인 책장
사라지는 것은 역 건물이 아니었다. 글자였다. 은곡역 대합실 출입문 위의 파란 간판에서 '은'이 먼저 흐려졌다. 선희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곡역'만 남아 있었다. 곧 그마저 희미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열차표를 샀다. 어느 승객은 휴대전화에서 역 이름을 검색하려다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자 역무실에 물었다. 선희는 자신이 매일 출근하던 장소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역 이름이…… 그게…….” 목에서 말이 걸렸다. 가은은 곧장 상황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표지판의 글씨가 손상된 현상과 사람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현상. 둘이 연결됐을 수는 있어도 하나만 보고 다른 하나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 “선희 씨, 지금 신체 상태는 어떠세요?”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요. 하지만 전 여기서 일하는 게 맞아요.” 주영은 운영기관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건물의 물리적 안전 점검을 요청했다. 출입문과 승강장 시설에는 이상이 없었다. 시설 안내 전광판만 일제히 행선지 명칭을 잃고 있었다. 현우의 눈앞에는 역 전체를 가로지르는 붉은 글씨가 떴다. [노선 08 / 반송 표 자동 결합] [소유자 인증 누락] [지명 보존 우선순위 하락] “역 이름이 희생되는 겁니까?” 태경이 물었다. “그렇게 표시되지만 실제 영향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이 사라지는지는 아직 몰라요.” 준석은 시계를 다시 닫으려 했다. 가은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그 종이가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방금 발생한 변화와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건드리지 말고 먼저 사진을 찍어요.” 그들은 파편의 위치와 시각을 촬영했다. 주영은 역 시설 직원과 함께 장치에 공급되는 시험 방송 전원을 분리했다. 자동 방송은 멎었지만 글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방송을 껐는데도 계속되네요.” “그렇다면 다른 연결이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가은은 기록 원본을 해온군 대조소에 보내며 긴급 보류를 요청했다. 대조소는 바로 응답하지 않았다. 화면에는 오래된 접수번호만 깜빡였다. *** 현우는 역 밖에 서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았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이 택시기사에게 주소를 말하는데, 기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데리러 온 아버지는 역을 찾지 못해 같은 거리를 두 번 돌았다. 사라지는 것이 지명 하나라도 생활은 쉽게 흔들렸다. 현우는 안내판 앞에 임시 종이를 붙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붙인 종이를 공인된 노선 정보처럼 오인하면 위험했다. 그는 선희에게 제안했다. “운영기관이 확인한 현행 노선표를 인쇄해서 임시 안내로 붙일 수 있을까요? 고장이 발생한 사실과 임시 정보라는 표시도요.” 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른 직원에게 이곳이 정말 은곡역이었는지 여러 문서로 대조해 달라고 했다. 종이 승차권과 구 운영 허가증, 공공 지도 인쇄본 세 곳에서 같은 이름을 확인했다. “은곡역. 맞아요. 여기 은곡역이에요.” 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이름을 잊어도 다른 사람이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종이 안내를 붙이자 승객들이 조금씩 길을 찾았다. 화면 속 지명은 사라졌지만 실제 안내는 되살아났다. 그때 해온군 대조소에서 회신이 왔다. [08번 운송선 자동 결합: 인가 오류] [출발 기록 소유자 확인 불가] [결합 집행: 임시 정지] 전광판은 여전히 공란이었다. 다만 더 흐려지지는 않았다. “피해는 남았지만 진행은 멈췄군요.” 가은이 말했다. 선희가 현우를 보았다. “이제 어디서도 안 사라지는 거예요?” “그렇게 약속드릴 순 없어요. 지금 확인한 건 진행이 멈췄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래도 고마워요. 한 번이라도 있는 그대로 말해 줘서.” 선희는 종이 안내문 귀퉁이를 손으로 잘 눌러 붙였다. *** 역의 지명이 멈춰 서자 사람들은 뜻밖의 문제를 가져왔다. 택시기사에게 손으로 적힌 지도를 내민 청년은 목적지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에게는 도로 표지에 나온 지명이 낯설게 느껴졌고, 내비게이션은 같은 장소를 다른 이름으로 검색했다. 작은 길 하나가 지도에서 갈라진 듯했다. 주영은 우편번호와 지번, 인쇄된 교통 지도를 함께 확인하도록 임시 안내를 만들었다. 실제 운행이 가능한 길만 표시했고, 정상화 시각은 적지 않았다. 가은은 역 시설 사고를 단순한 전산 오류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단말기 이상이 시작된 시점과 현장에서 확인된 혼란을 분리해 접수했다. 현우는 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휠체어를 탄 어머니에게 손수 적은 종이를 읽어 주고 있었다. “여기서 두 정거장 가면 병원입니다. 이름이 없어져도 길은 있어요.” 어머니는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네가 길을 아니까 됐다.” 현우는 그 말이 얼마나 잠정적인 위로인지 알았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길의 기억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확인한 지도를 남겨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의 역할까지 작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 저녁에는 낯선 사람이 역을 찾아왔다. 짙은 남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가은이 현장 담당자인지 확인하고 자신을 차도현이라고 소개했다. 이십 년 전 은곡역에서 사라진 동생의 형이라고 했다. “오늘 역 이름이 없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또 그때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해서요.” 가은은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요청했다. 도현은 오래된 가족사진을 꺼냈다. 사진에는 어린 남매가 역 앞에서 웃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빨간 장갑을 한 짝만 끼고 있었다. 현우는 사진을 보는 순간 목이 말랐다. “이 아이가 동생인가요?” “네. 차유리요. 그날 이후 행방을 모르지만, 전 아직 실종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고 해도요.” 사진 뒤에는 20년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볼펜으로 휘갈긴 글씨가 있었다. '유리에게 주소를 알려 주지 마.' 도현이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는 동생을 안전하게 보호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그 애한테 왜 돌아오지 않는지 물어보지 못했어요.” 현우가 물었다. “유리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길을 열 수 있다면서요.” 그는 현우의 품에서 보이는 세 장의 표를 가리켰다. “당신들한테 필요한 게 표라면 내가 찾아 주겠습니다. 대신 그 길로 누군가를 돌아오게 해 주세요.” 도현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현우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위로할 수는 없었다.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데려올 수는 없어요.” 도현은 주먹을 쥐었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은 늘 내가 잃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밤 도현은 말없이 역을 떠났다. 하지만 열차 편성을 안내하던 공란의 화면에는 그가 나간 뒤 잠시 낯선 글씨가 나타났다. [실종 보호자 요청 접수] [강제 귀환 대체 경로 탐색 중] 현우는 가은에게 화면을 가리켰다. “누가 저 사람의 절박함을 이용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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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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