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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53화
PAYLUA ORIGINAL · 제53화

53화. 찢어진 표의 절반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3,040자

오프라인 책장
배준석은 다음 날 아침 은곡역에 도착했다. 오랜 우편 일을 했던 사람답게 작은 가방 안에는 서류철과 필기구, 낡은 봉투를 넣어 왔다. 그가 가장 먼저 내민 것은 자기 손목이 아니라 사업장 근무 기록이었다. “제가 스무 해 전에도 우편 일을 했다고 생각하셨죠? 그때 전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현우는 멈칫했다. 숫자 08과 낡은 손목시계가 결합되자 자신도 모르게 준석을 그날의 운반자로 상상했다. 준석이 가져온 졸업앨범에는 정확히 그 시절의 모습이 있었다. “장부의 08이 저라는 증거는 없어요. 다만 저는 훗날 08번 운송선을 맡았고, 그때 손목에 표식을 새겼을 수도 있습니다. 기억이 끊긴 건 사실이지만 그걸로 스무 해 전의 사건에 모두 연결될 순 없잖아요.” 가은은 기록을 확인한 뒤 한숨을 쉬었다. “제가 설명하는 척하면서도 가장 쉬운 이야기를 믿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사과받으러 온 건 아닙니다. 제 삶을 통째로 남의 사건에 끼워 넣지는 말아 달라는 거죠.” 준석은 은곡역 물품보관함 08 앞에 섰다. 숫자 모양이 예전 운송선 표기와 같았다. 그러나 금속판 뒷면의 교체 날짜는 십이 년 전이었다. 가은이 수리 기록을 받아 보니 이전 번호는 12였다. “08은 나중에 붙은 겁니다.” 준석이 말했다. “네. 처음의 여덟 번째 표와 관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정체의 확인이 아니라 하나의 불필요한 가정을 버린 일이었다. 그런데도 현우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다음 단서를 덜 무리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 역의 시험 방송 파일은 계약 업체로부터 정식으로 제공받았다. 원본 오디오에는 두 개의 파형이 겹쳐 있었다. 첫 번째는 십수 년 전 버스 안내, 두 번째는 최근 녹음된 여성의 짧은 문장이었다. 오래된 안내를 복원할 때 뒤에 녹음을 붙인 것이었다. “아이 목소리가 아니라 어른 목소리예요.” 주영이 헤드폰을 벗으며 말했다. “음성을 고의로 어린 목소리처럼 들리게 조정한 흔적이 있어요.” “그럼 누군가 일부러 스무 해 전의 발신자처럼 보이려 했다는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직 조작한 사람을 알 수는 없고요.” 가은은 파일에 남은 날짜를 비교했다. 생성 일시는 어제였지만, 파일 자체를 만든 원본 프로그램의 작업 내역이 빠져 있었다. 누군가 이름을 지운 것과는 달랐다. 애초에 작업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설정했을 수도 있었다. 현우가 문득 물었다. “준석 씨가 받은 08 봉투는 어떻게 됐죠?” “아직 해온군 접수 보관소에 있습니다. 소유 확인 전엔 열 수 없다는 결정이 유지됐어요.” 준석이 답했다. “그걸 여기 가져오지 않은 건 잘한 일이네요.”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옛날 사진에서 보았던 작은 팔과 숫자 08을 떠올렸다. 그 숫자는 사람의 손목에 있었지만 누가 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계, 운송선, 표의 발급 순서가 모두 같은 번호를 공유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었다. *** 시계를 확인하던 준석은 가은에게 뒷면의 흠집도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시계 뚜껑에는 아주 희미한 숫자 넷이 새겨져 있었다. 1011. 시계가 멈춘 시각과 같았다. “누군가 바늘을 일부러 그 위치에 맞췄을 수도 있겠어요.” 태경이 말했다. “맞죠. 그런데 저는 이런 게 있으면 자꾸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준석은 시계를 접지 않고 탁자 위에 놓았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중요한 사람이었을까 봐 기대돼요. 반대로 그날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두렵기도 하고요.” 가은은 그에게 언제까지 조사에 협조할 생각인지 물었다. 준석은 지금은 하루 더 머무를 수 있지만 다음 주에는 운송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빠진 배송을 대신 처리할 동료도 없다고 했다. “그럼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제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요?” “그렇습니다. 당신 인생은 수사의 부속품이 아니니까요.” 준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기가 오랫동안 이 사건의 수수께끼만큼이나 평범한 내일의 근무표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의 약속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 오후 두 시, 선희는 역무실 캐비닛에서 낡은 시설 도면 한 장을 찾아왔다. 폐쇄된 구 환승 통로의 벽 뒤에 '반송 검사실'이 표시돼 있었다. 지금은 일반 철도 시설에서 분리된 공간이었다. “공사 업체가 도면을 두고 갔어요. 시설 관리자가 보면 보존 요청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도면에 인쇄된 번호는 08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물함이 아니라 노선 코드였다. 태경이 도면의 모서리를 살피다가 작은 접힌 부분을 발견했다. 누군가 종이를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한 흔적이었다. 접힌 자리를 펴자 마치 찢어진 표처럼 생긴 빈칸이 나타났다. '반송 예정 대상의 절반은 출발 기록으로 남긴다. 나머지 절반은 수취인이 갖는다.' 현우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표를 찢었다는 건 버렸다는 뜻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원래 반으로 나눠서 보관했다면요.” 가은이 말했다. 준석은 자신의 낡은 시계를 꺼냈다. 바늘은 여전히 열 시 십일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뒷면을 열자 오래전 배터리 교체 때 끼워 넣은 얇은 종이 한 조각이 보였다. 손톱보다 조금 큰 파란 종이였다. “이런 게 있었네요. 시계를 열어 본 적이 없어서.” 종이에는 숫자가 없었다. 다만 반원형 구멍의 한쪽 가장자리가 남아 있었다. “제 시계에 있다고 해서 제 표라는 뜻은 아니겠죠.” “그렇습니다.” 가은은 장갑을 꺼냈다. “그런데 출처가 하나 생겼으니 조사할 수는 있어요.” 종이의 색은 제0분기에서 받은 첫 번째 표와 달랐다. 태경의 팔찌 홈과 대보자 파란색 파편의 곡선은 세 번째 홈에 맞았다. 그때 역 스피커에서 익명의 음성이 나왔다. '08번 운송선 확인.' '분리 보관된 표 한 쪽이 검출되었습니다.' '자동 합치기를 시작합니다.' 가은이 즉시 외쳤다. “합치지 마세요. 출처 확인 전에는!” 준석의 시계 초침이 갑자기 두 칸 움직였다. 정차해 있던 역 안내판에서 은곡역이라는 글자가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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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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