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목시 은곡역에는 자동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사람을 들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을 들였다. 현우가 먼저 도착한 것은 바람이었다. 문 옆 작은 틈으로 들어온 찬 공기가 오래된 난방기 냄새를 끌고 나왔다.
가은은 역사 안내 직원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미확인 제보와 연관된 자료 확인이며, 시설 출입은 공개된 구역으로 제한하겠다고 했다. 직원은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친절하게 대합실 구조와 공사 구간을 알려 주었다.
“환승 통로는 공사로 막혔어요. 뒤편 버스 승강장은 일 년 전에 옮겨 갔고요. 안내 방송만 아직 시험하고 있습니다.”
직원의 이름은 오선희였다. 쉰 살쯤 된 여성으로, 역 앞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다 최근에는 역무 보조를 맡는다고 했다. 선희는 현우 일행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고 물었다.
“사람을 찾으러 온 거예요, 종이를 찾으러 온 거예요?”
현우가 대답했다.
“둘 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람을 찾으려고 주소를 공개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일단 사람부터 봐요. 여기는 종이가 사람보다 오래 남는 동네라.”
선희는 역사 밖을 가리켰다. 새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낡은 안내판 하나가 서 있었다. '구 제0운송 분기'. 빛이 바래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안내판이죠? 공사할 때 철거하려고 했는데 기록물이라고 못 건드리게 하더군요. 기록물이면 설명이라도 붙여야지.”
가은이 촬영 허가를 묻자 선희는 끄덕였다. 대신 안내판 옆에 붙은 누군가의 낡은 포스터는 찍지 말라고 했다. 실종된 아이를 찾는 전단이었다. 가족이 오래전에 게시를 중단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차마 떼지 못했다고 했다.
“공개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여러분이 무엇을 조사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까지 지켜 주세요.”
현우는 카메라 각도를 아래로 내렸다.
***
역 안으로 돌아오자 시계가 오전 열 시 십일 분을 가리켰다. 시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 구 환승 승강장으로 향하는 차량이 도착합니다.'
현우는 벌떡 일어났다. 바깥에는 차도 없고 선로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음성 뒤로 버스 제동음이 섞였다. 정거장 안내가 아니라 스무 해 전 녹음된 환경음처럼 들렸다.
“어제 전화 뒤에 들리던 소리예요.”
태경이 말했다.
가은은 시간과 음색을 저장했다. 선희는 벽면의 테스트 스피커를 가리켰다.
“새 방송도 녹음해 쓰지만, 옛 안내를 일부 복원해서 박물 전시처럼 들려줘요. 시에서 받은 파일입니다.”
“누가 전달했나요?”
“업체가요. 업체명은 사무실 계약서에 있어요.”
주영이 그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파일을 제공한 업체는 한 달 전 등록한 작은 음향 복원 회사였다. 업체 주소는 서람시가 아닌 해온군이었다. 그런데 연락처 끝 네 자리는 문경의 낡은 녹음기 수리 내역에 적힌 번호와 같았다.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가은이 말했다.
“하지만 확인해 볼 이유는 충분해요.”
현우는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오래된 표의 구멍과 시험 방송 속 버스 소리가 머릿속에서 맞물렸다. 그때 눈앞에 희미한 회색 글씨가 나타났다.
[구 승강장 / 수취인 미확인]
글씨는 사람 위에 떠 있지 않았다. 빈 의자 위였다. 이런 표시는 처음이었다.
“가은 씨, 저 의자에 글씨가 떠요.”
가은은 의자의 위치를 표시했다. 그리고 현우에게 말했다.
“글씨가 보인다고 위험한 사람부터 만들어 내지 맙시다. 의자에 누구도 없으니까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선희가 의자를 닦으려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 작은 금속판이 있었다. 사물함처럼 번호가 찍혀 있었다.
08.
***
사물함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역 물품보관함이었다. 열쇠는 역무실에 있었고, 소유권을 확인하기 전 임의로 열 수 없었다. 가은은 관리기관에 정식 보존 요청을 남겼다. 잠금장치를 건드리지 않은 채 금속판만 촬영했다.
하린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빨간 장갑 잃어버린 사람이 역에 있대요?'
현우는 답했다.
'아직 모르겠어. 이곳에는 08이라고 적힌 오래된 사물함이 있어.'
'그게 사람 이름은 아니잖아요.'
현우는 짧게 웃었다. 하린이 함께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위험할지 모를 장소에 굳이 따라올 이유는 없었다.
오후에는 배준석의 전화가 왔다. 그는 손목 안쪽 숫자가 처음 생긴 시점을 기억할 만한 병원 기록을 찾아봤다고 했다. 그러나 열람 가능한 자료에는 그 숫자를 설명하는 기록이 없었다.
“제가 예전 운송 일을 했던 회사가 은곡역 공사에 참여했더군요. 그래서 기록이 섞인 건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번호가 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겠죠.”
“네. 그 말이 듣고 싶었습니다.”
준석은 멋쩍게 웃었다.
해가 지자 선희는 역 폐장 시간을 알려 주었다. 공개 대합실도 밤에는 문을 닫았다. 현우 일행은 무리해서 머물지 않고 근처 숙소를 잡았다. 출입증을 얻기 위해 자신이 아홉 번째 등록자라고 소개하지도 않았다.
저녁을 먹기 전 선희는 대합실 구석에서 아주 오래된 종이 시간표를 찾아왔다. 현재 시간표와 비교해 보니 은곡역에서 막차가 끊긴 뒤에도 버스 한 대가 역 이름 없이 운행한 적이 있었다. 노선 번호는 08이 아니라 '임시 2'였다.
“사람들이 못 돌아오면 제가 역 앞에서 전화기를 빌려주곤 했어요.” 선희가 말했다. “요즘은 다 휴대전화가 있죠. 그런데 이름을 잃어버린 뒤로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사람도 어디에 전화해야 할지 모릅니다.”
마침 한 할머니가 안내 창구로 다가왔다. 손에는 종이에 적힌 주소가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가는 버스를 물었다. 선희가 새 시간표를 펼쳐 경로를 알려 주자 할머니는 몇 번이고 버스 번호를 되물었다.
“제가 자꾸 물어봐도 되죠?”
“그럼요. 잘못 타시면 더 먼 길 가셔야 하니까요.”
현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보호를 위한 안내는 누군가 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역의 오래된 기록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종이 시간표에는 갈 수 있는 길이 적혀 있었지만 그 길을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줄 직원의 손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
그날 밤, 역무실의 테스트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돌아오는 표는 승차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선희는 방송 장치를 껐다. 전원 스위치가 이미 내려가 있었다. 그녀가 화면을 자세히 보자 예약된 방송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 파일이 하나 표시됐다.
[08_RETURN_02.wav]
파일 생성일은 오늘이었다.
그 파일 끝에는 어른 여자의 숨소리와 함께 말 한마디가 남아 있었다.
“나 아직 여기 있어요.”
제5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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