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는 휴대전화 속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나는 널 아홉 번째로 등록한 사람이다.'
그 아래 새로 도착한 문장은 더 짧았다.
'사흘 뒤. 율목시 은곡역. 오전 10시 11분. 역 안에서만 기다려.'
현우가 시간을 되뇌자 가은은 곧장 시각부터 적었다. 은곡역은 서람시에서 기차로 두 시간 반 떨어진 작은 도시의 역이었다. 역 자체는 지도에 존재했다. 하지만 제0분기 원본 기록에 그 역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갈 건가요?” 가은이 물었다.
“우리가 가면 그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거겠죠. 아니면 낚시일 수도 있고요.”
“메시지에 답하기 전에 발신 경로부터 조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역 안에서만'이라는 조건은 일단 지켜요. 구체적인 장소도 정해지지 않았잖아요.”
현우는 대답 대신 서랍에서 표 세 장을 꺼냈다. 제0분기에서 받은 표였다. 표의 문구는 기차표를 흉내 냈지만 출발지와 도착지는 제멋대로였다. 가은의 의뢰로 분석한 결과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십 년 전 재질이 맞았다. 문제는 세 번째였다.
[돌아가지 않을 권리]
짧고 올바른 말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올바른 문장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현대적인 코팅막이 입혀진 그 종이가 원문처럼 다른 사람의 선택을 결정하게 놔두면, 관리자 02가 하던 일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주영이 종이 성분 분석표를 화면에 띄웠다.
“코팅 수지가 상용화된 시기는 최근 다섯 해 안입니다. 보고서는 종이가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점만 말해요.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모릅니다.”
“표에 쓰인 글씨는?”
“복제 가능성이 있어요. 스캔한 인쇄 글자에 일부 손글씨를 덧붙였습니다. 마지막 획은 실제 펜 자국입니다.”
태경이 확대 화면을 보았다. '권리'라는 두 글자 아래에 아주 작은 압흔이 남아 있었다. 보통 종이를 세 장 겹쳐 놓고 맨 위에 글씨를 쓰면 아래 종이에도 자국이 남는다.
“이건 세 번째 표를 만드는 데 쓴 종이의 자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위에서 다른 종이에 무언가 쓴 것 같군요.”
가은은 조명을 비스듬하게 비춰 압흔을 읽었다.
'08에게 직접 건네지 말 것.'
방 안이 조용해졌다.
“08에게 표를 주지 말라면서 08의 반송 신청은 왜 기다리는 거죠?” 현우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08이 사람인지, 운송 번호인지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가은의 말에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숫자가 남은 기록마다 나타났다고 해서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
오전에는 송문경의 병실에 들렀다. 문경은 창가에 앉아 컵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숫자가 멈춘 뒤에도 왼손 끝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세 번째 표를 누가 만들었는지 짐작하십니까?”
가은이 물었다.
“표를 먼저 보여 주세요.”
문경은 코팅된 표를 받아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뒷면의 동그란 구멍을 살폈다.
“이건 반송 표가 아니에요.”
“어째서요?”
“원래 표는 구멍으로 확인했지, 글씨로 확인하지 않았어요. 글씨는 기계가 고장 나도 사람이 읽으라고 남긴 안내였죠. 그런데 이 표는 구멍 위치가 틀렸습니다.”
태경이 가방에서 낡은 팔찌를 꺼냈다. 세 개의 홈이 있었다. 실제로 첫 두 표의 구멍만 홈에 닿았고, 세 번째 표의 구멍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일부러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모양만 아는 사람이 흉내 냈겠죠.” 문경이 말했다. “이런 것일수록 의도가 선하다고 믿고 결론을 내리지 마세요.”
문경은 다시 병상에 표를 내려놓았다.
“원칙 3의 원문은 '거절 또는 미응답 시 경로를 열지 않는다'입니다. 이 문장은 보호를 위한 절차였어요. 표에 인쇄된 말처럼 누군가에게 돌아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뜻과 연결되지만, 같은 문장은 아닙니다.”
현우는 자신의 얼굴을 빌린 02가 그 차이를 얼마나 쉽게 왜곡하는지 떠올렸다.
“그러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돌아오라고 부탁하는 일도 조심해야겠네요.”
“부탁은 할 수 있습니다. 강제할 수 없을 뿐이에요. 부탁하지 않는 게 언제나 친절한 건 아니랍니다.”
그 말은 현우에게 새로웠다. 그는 요즘 누군가의 선택을 침해할까 봐 질문조차 삼키곤 했다. 그러나 병실에서 문경이 필요한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물 한 컵을 더 마시고 싶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날 저녁 시청에서 돌아오는 길, 현우는 빨간 신호등 앞에서 오래 멈춰 섰다. 길 건너편에는 작은 꽃가게가 있었다. 주인은 폐점 시간을 넘겼는데도 물통에 꽃을 다시 꽂았다. 누군가 늦게 찾아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현우가 가게에 들러 물었다.
“예약한 사람이 안 오면 어떻게 해요?”
“전화해 보죠. 연락이 없으면 꽃은 보관해요. 그래도 내일은 새로 물어봐야죠.”
“오지 않을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건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주문한 사람이 정하는 거 아닌가요? 예약을 계속할 건지 취소할 건지.”
현우는 아무 꽃도 사지 않고 나왔다. 이상한 질문을 받은 주인은 결국 작은 흰 꽃 한 송이를 건넸다. 팔지 못하고 남은 꽃이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현우는 그것을 들고 걸었다. 스무 해 전 문 앞에 서 있던 자신은 어쩌면 꽃가게 주인보다 기다리는 법을 덜 알았을 것이다.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문 앞에 꼼짝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
해가 질 무렵 하린은 식탁에 지도를 펴 놓았다. 은곡역과 제0구역을 연결한 선은 실제 철도 노선과 일치하지 않았다. 가까운 선로가 아닌, 이미 폐쇄된 우편 운송 경로를 따라갔다.
“역에서 사흘 뒤 만난다는 건, 우리가 열차를 타야 한다는 뜻일까요?”
하린이 물었다.
“아직 아니야. 역 건물 안에서 기다리라고만 했어.”
“그럼 우리는 열차표를 살 필요가 없겠네요.”
현우가 웃자 하린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안 그래도 돈 아까워요. 안 탈 건데 왜 사요?”
가은은 철도 운영기관에 역 시설 사용 현황을 문의했다. 제0분기와 연결되었다는 시설을 통제할 근거가 있는지 조사하려는 것이지, 낯선 발신자의 말만 듣고 역을 폐쇄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회신에는 은곡역이 최근 정비공사를 마쳤고 오전 열 시 무렵 환승 안내 방송이 테스트된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방송이 중요하네요.” 주영이 말했다. “통화 때 버스 안내 음성이 들렸던 것도요.”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가 또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없는 문자였다.
'세 번째 표는 쓰지 마. 그 표에 적힌 말은 맞지만, 그 종이는 거짓말이야.'
'나도 한 번 그 종이를 믿었다가 돌아갈 길을 잃었다.'
현우는 문자를 가은에게 보여 주었다.
“같은 사람이 보낸 것 같아요?”
“표시상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먼저 답장을 보내 봐요. 만나기 전에 서로 지킬 조건을 정하자고.”
현우는 짧게 적었다.
'만나겠습니다. 다만 당신이 밝히고 싶지 않은 이름이나 주소는 묻지 않겠습니다. 위험이 있다면 역 담당자에게 먼저 알리겠습니다.'
한참 답장이 없었다.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마지막 문장이 도착했다.
'좋아. 하지만 내가 누군지 아는 순간 네가 나를 기억한다고 말하지 마.'
그 문장 아래, 붉은 숫자가 아닌 작은 회색 글씨 하나가 떠올랐다.
[면담 예정 시각: 71:59:59]
현우는 세 개의 숫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이번 시계는 누군가의 실종을 알리는 것인지, 약속한 시간을 세는 것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제5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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