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분기 대기실을 나온 뒤 현우는 구청 계단에 앉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02는 또다시 단순한 선택지를 내밀었다. 승인하면 모두 안전하다고 하고, 거절하면 모든 책임을 떠맡으라고 했다. 어린 현우의 말까지 그런 함정에 이용됐다.
하린이 편의점에서 산 종이컵 두 개를 내밀었다.
“뜨거운 초코예요. 형이 늘 물만 마셔서.”
현우가 웃었다. 컵에는 뜨거운 김이 났다.
“오늘 그 아이는 봤니?”
“못 봤어요. 그런데 빨간 장갑은 그대로였어요. 그래서 누가 와서 찾으면 돌려주기로 했어요.”
“그 아이가 우리한테 온 건지, 과거에 남은 흔적인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지금 누군가 춥다는 건 알 수 있어요.”
그들은 당장 문경을 보호해야 했다. 병원에 있던 의료진은 그녀의 신체 상태를 계속 확인했고, 본인이 원하는 연락 상대만 통보하기로 했다. 문경은 손으로 쓴 기록을 남겼다. '나는 원칙 3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다른 사람 주소를 공개하라고 동의하지 않았다.'
***
한편 나경에게 익명의 메일이 왔다. 제0분기 접수 01의 원본을 알고 있다는 사람이었다. 메일은 만남 장소와 시간을 제시했지만 이름은 적지 않았다.
“함정일 수도 있죠.”
나경은 가은에게 메일을 보여 주었다. 가은은 발신 서버 정보와 문장의 앞뒤를 확인했다. 메일에는 서람초 별관의 실제 위치가 아니라, 지금은 이름이 바뀐 작은 공원이 적혀 있었다.
“그분이 만나겠다고 하면 우리도 규칙을 정할 수 있습니다. 녹음은 허락받고, 원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있게요.”
두 사람은 해가 뜬 뒤 공원으로 갔다. 벤치에는 검정 코트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옷차림만으로 단정하기 어려웠다. 다만 나경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바로 말했다.
“제 이름은 묻지 마세요.”
나경은 수첩을 접었다.
“그러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01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 번호는 내 이름이 아니니까요.”
그는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에 적힌 것은 주소도, 본명도 아니었다.
'나는 내 위치가 알려지는 연락을 거절한다.'
“스무 해 전에도 이걸 썼어요. 그때 나를 찾아오는 어른은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좋은 사람인지 누가 설명해 주지는 않았어요.”
“그 뒤로 돌아가신 적이 없습니까?”
“돌아갈 곳이 없어진 건 아니에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던 거죠.”
나경은 그 문장만으로도 원래 규칙이 왜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의 신원을 기사에 싣는다면 또 다른 추적이 시작될 수 있었다.
“말씀하신 내용은 기사에 쓰지 않겠습니다.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에 동의하시는지부터 묻겠습니다.”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내가 거절했다는 사실만 남겨 주세요.”
가은은 조건을 적었다. 독립된 확인자가 필요하면 다시 연락할 방법을 묻자 01은 일회용 연락 주소를 남겼다. 본명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실패는 아니었다.
공원에서 만난 사람은 헤어질 때까지 자기를 01이라고 불렀다. 나경은 조금 뒤 그가 걷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자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뒷모습이었다.
“우리가 저 사람 이름을 알아낼 수도 있겠죠.” 나경이 중얼거렸다.
“가능하겠죠.” 가은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알아야 하는지와는 별개예요.”
둘은 벤치를 떠나기 전에 주변 쓰레기를 정리했다. 01이 마시다 남긴 생수병은 가져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흔적을 수집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그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공간을 일부러 남겨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은 기자가 된 첫해를 떠올렸다. 그때 실종 사건에서 돌아온 사람의 얼굴을 취재하면서, 이름만 지우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기사는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당사자는 다음 날 병원 앞에서 한 번 더 카메라를 피해야 했다. 그 일 이후 나경은 이름을 지우는 것과 신원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일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01이 우리한테 한 말은 기사로 못 쓰겠네요.”
“아마도요. 하지만 앞으로 기사를 어떻게 쓸지는 바꿀 수 있겠죠.”
나경은 가방 안에 넣어 둔 녹음기를 보았다. 작동시키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파일은 없었다. 오늘 가장 중요한 인터뷰에는 음성 파일이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만남이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허락받은 범위의 기록과 제3자의 확인이 남았다.
두 사람이 공원을 떠날 때 휴대전화에 알림이 도착했다. 02가 보낸 통지였다.
[등록 01: 거절 확인]
[등록 09: 위임 심사 준비]
[송문경: 집행 보류 중 / 재산정 대기]
가은은 마지막 줄을 보고 잠시 숨을 멈췄다. 문경의 시계가 잠깐 멈췄다 해도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 심사에서 시계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가은은 병원 담당자와 연락해 문경의 현재 선택이 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문경은 분명하게 답했다.
“저는 내일 심사에 참여하겠습니다. 다만 몸을 옮기라는 뜻은 아니에요. 제가 직접 말할 수 있는 상태인지 의사에게 확인해 주세요.”
그 선택은 어렵지만 분명했다. 심사장에 누가 대신 앉는지보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낼 수 있는 상태인지가 먼저였다.
***
같은 시각 02는 제0분기의 접수대에 홀로 나타났다. 화면 속 현우의 얼굴이었다.
'등록 01은 거절했군.'
벽 안쪽의 여자 음성이 답했다.
'거절은 유효한 선택입니다.'
'유효하지만 안전하지는 않지.'
'거절을 무시하면 최초 목적이 무효화됩니다.'
02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그래서 나는 목적을 바꿀 겁니다.'
화면이 번쩍였다.
[원본 보존 실패 위험 증가]
[임시 원칙 변경 신청]
[관리자 09의 책임 확인 필요]
가은의 휴대전화에 동시에 안내가 도착했다.
'제0분기 원칙 변경 검토. 등록 09의 참석을 요청합니다.'
현우는 문경의 병실 앞에서 메시지를 읽었다. 02가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돌리는 데 집착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럴수록 직접 찾아가 이길 생각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
“01의 거절을 확인했죠?” 가은에게 물었다.
“네. 그건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절차상 거절이 존재한다는 점은 알릴 수 있어요.”
현우는 전화를 걸어 제0분기에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
“저는 심사에 참여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참석이 승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스피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확인했습니다. 거절할 권리를 남겨 둔 채 심사가 시작됩니다.'
잠시 뒤 다른 목소리가 덧붙였다. 관리자 02였다.
'권리가 있다고 모두 살아남는 것은 아닙니다.'
현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까 누가 살아남지 못하는지까지 숨기지 말아야죠.”
제4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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