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람시청 자료실의 프린터는 새벽 두 시 십칠 분에 혼자 작동했다.
종이를 받으러 나온 김주영은 잉크 냄새보다 먼저, 모니터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전원을 내려둔 컴퓨터 옆에서 인쇄된 건 명단 한 장이었다. 종이 윗부분에 '원본 관리자 이현우'라는 문구가 보였다. 그 아래에는 익숙하지 않은 숫자가 붙어 있었다.
[최초 등록 순번: 09]
[선행 등록: 8건]
[요청 원본 위치: 제0구역]
주영은 그 종이를 곧장 집어 들지 않았다. 벽시계와 출력 시각을 한 화면에 담아 촬영하고, 프린터의 최근 작업 목록을 확인했다. 목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사건을 겪은 뒤로 그에게 생긴 습관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전에, 자신이 실제로 본 부분부터 남기는 일.
현우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09라고요?'
“네. 그런데 주민등록 순번도, 보관자 번호도 아닙니다. 양식을 처음 봐요.”
'제가 갈게요.'
“지금요?”
'제 이름이 쓰인 종이가 왜 저보다 먼저 출근했는지 알아야죠.'
***
시청에 도착한 현우는 출력물 가운데 '원본 관리자'라는 글자부터 손으로 가렸다. 스무 해 전 자기 얼굴을 빌린 관리자 02 때문에 시민들이 겪은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가 원본 관리자라는 호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누군가 또 그의 이름으로 결정을 내릴지 몰랐다.
가은도 소식을 듣고 왔다. 그녀는 종이 가장자리의 잔뜩 눌린 자국을 살폈다.
“다른 곳에서 먼저 출력하고, 여기선 사본만 나온 것 같아요. 원본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태경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순번이 09라는 건, 아홉 번째 보호 요청자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저라고요? 그때 저는 아이였어요.”
“그러니까 의심해야죠. 어린애의 말로 어른들이 무슨 문서를 만들었는지.”
가은은 줄이 없는 종이 뒷면을 돌렸다. 아주 작게 다른 내용이 인쇄돼 있었다.
[등록 시점: 구 서람초등학교 폐쇄 익일 / 02:13]
[원본 신청서: 미수신]
[대체 근거: 현장 목격]
현우는 날짜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폐교가 되던 날은 비가 내렸다. 운동장에는 이삿짐 차가 한 대 있었고, 교실 문 앞에는 젖은 우산이 늘어서 있었다. 그다음 기억은 끊어져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하루가 저 두 시 십삼 분 속에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현장 목격이면, 제가 신청한 게 아니잖아요.”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가은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단정하면 안 됩니다. 목격자로 등록됐다는 뜻일 수도 있어요.”
주영이 시청 서버의 외부 대조 요청을 열었다. 서람시 외곽 열두 구역 중 원본이 살아 있는 네 곳에서만 접속 승인이 가능했다. 그중 한 곳은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화면에는 지명이 아니라 오래된 우편 취급 번호가 남아 있었다.
[00-서람-반송]
하린이 그 번호를 보자 공책을 펼쳤다. 그녀는 해온군 대조소에서 본 열한 번째 문 아래 편지를 그려 놓았었다.
“반송이면 돌아온 거죠? 주소를 몰라도 편지는 돌아갈 수 있잖아요.”
“보낸 사람이 없으면 어디로 돌아가?” 현우가 물었다.
“모르니까 묻는 거예요. 다른 사람 이름을 적어서 보내면 안 되니까.”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주영이 문서 목록을 다시 열어 보는 계기가 됐다. 여러 번 실패한 원본 접속의 끝에 공통으로 붙은 코드가 있었다.
[반송 사유: 원 발신자의 선택 미확인]
“여태 우리가 수신인만 찾고 있었어요.” 주영이 말했다. “열두 구역의 기록을 되찾으려면 누가 처음 보내려 했는지를 찾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가은은 이 말 옆에 '가설'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하린에게 보관된 지도에 손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누가 열람해도 되는지 설명하고, 하린이 자기 공책에 생각을 적도록 했다.
시청 1층 민원실에는 구역 이름이 사라진 사람들의 문의가 쌓여 있었다. 현우 일행은 원본 기록을 해독한다는 이유로 그곳의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됐다. 주영은 긴급 알림문과 실제로 문의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나눠 적었다. 그러던 중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창구에 다가왔다.
“내 아내가 살던 주소가 이 종이에서 없어졌어요. 그런데 아내는 지금 병원에 있어. 내가 미쳤다는 소리나 듣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노인은 전입 기록 사본을 내밀었다. 기존 주소가 비어 있었지만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다른 자료는 있었다. 주영은 사라진 주소를 즉시 복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이용 가능한 임시 행정 절차를 안내하고, 병원 방문에 필요한 증빙의 대체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현우는 노인의 손에 들린 종이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본 관리자'라는 문구를 보여 줘 봐야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해만 줄 것이다.
“주소가 안 보이더라도 아내분이 병원에 계신 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방법을 같이 알아보죠.”
노인은 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물었다.
“젊은이는 여기 직원이오?”
“아니요. 저도 제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 서 있는지 확인하고 있어요.”
노인은 한참 현우를 보다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건 잘하네. 누가 내 일을 대신 결정해 준다고 하면, 나부터 그 사람 자격을 묻겠네.”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현우는 '관리자'라는 단어를 자신의 신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에선가 찍혀 나온 한 줄이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거나 타인의 삶을 재단할 권한을 줄 수는 없었다.
민원실 천장에 붙은 전자 대기번호가 순간 아홉에서 공란으로 바뀌었다.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번호를 기다렸다. 주영은 숫자가 지워진 순간을 기록했지만, 무작정 모두에게 위험이 시작됐다고 외치지는 않았다. 작은 오류가 큰 사건의 징조인지 아직 몰랐기 때문이다.
현우는 그 화면을 보며 새벽 인쇄물의 09를 떠올렸다. 이름보다 먼저 번호가 나타날 때마다 시스템은 사람을 필요한 자리에 끼워 맞추려 했다. 그리고 숫자가 마음대로 바뀌어도, 민원실에서 아내를 찾아가려는 노인의 하루는 숫자 하나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아침 여덟 시 무렵, 시청으로 작은 등기 봉투가 도착했다. 발송인은 공란이었다. 받는 사람 칸에는 정확한 이름 대신 '아홉 번째로 불린 사람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가 배송된 경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배달원은 분명 도장을 찍었다고 주장했지만 송장 번호를 검색하자 시스템에는 '아직 접수되지 않음'이라고 떠 있었다.
가은은 우편물을 바로 열지 않고 발송 경위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현우는 봉투 뒤편의 글씨를 보고 손을 멈췄다. 삐뚤삐뚤한 어린애의 글씨였다.
'네가 마지막으로 들어왔을 때,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현우는 그 문장을 읽은 순간 아주 잠깐, 문 사이에 끼인 작은 빨간 장갑을 보았다.
눈앞에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잊어버린 장면이 떠오른 것인지 누가 새로 심어 놓은 장면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구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4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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