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문 너머에는 거창한 비밀이 없었다. 좁고 낡은 접수실, 몇 개의 책상, 오래된 전화기 두 대가 전부였다. 벽에는 찢어진 지도가 붙어 있었다. 서람시와 해온군, 그리고 이름이 흐려진 여러 지역이 같은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현우는 그 선을 보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누군가의 이름이 붉게 변하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이름이 지워지는 과정 뒤에는 종종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잘못 연결된 기록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 오류를 이용해 사람들의 이동과 동의를 결정했고, 누군가는 그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 했다.
"여기가 보호구역 원본의 출발점인가요?"
가은이 물었다.
스피커는 짧게 대답했다.
'출발점은 아닙니다. 원본을 분리하여 보존하도록 설계된 중계 구역입니다.'
"그럼 왜 지금 열렸죠?"
'자동 회수 명령에 대한 재심이 접수되어 원본 대조 권한이 임시 부여됐기 때문입니다.'
나경은 맨 앞의 책상을 촬영했다. 그 위에는 텅 빈 명패 하나가 있었다.
'제0분류 담당.'
옆에는 어린아이들 그림이 끼워진 장부가 놓여 있었다. 아이가 그린 나무와 교실, 빈 운동장. 하린은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그림을 본다는 이유로 모든 기억을 돌려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림을 다 안 봐도 돼요?"
하린이 물었다.
"그래. 여기서부터는 네가 정하면 돼."
현우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장부를 덮었다.
***
해온군 우체국의 백지 우편함은 그날 오후 처음으로 실제 사용 목적을 되찾았다. 사람들이 이름을 빼앗기는 곳이 아니라, 공개하지 않기로 한 내용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을 신청하는 곳이었다.
배준석은 우체국 관리자와 함께 접수 규칙을 다시 붙였다.
'이곳은 신원 삭제 신청 창구가 아닙니다.'
'자료 보관과 열람 범위는 신청자에게 설명한 뒤 결정합니다.'
'기억을 잃게 하거나 타인의 동의를 대신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 안내를 붙인 뒤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지는 않았다. 보관을 신청한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만 편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 선택을 서로 다르게 존중하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나경은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편집장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해온군 우체국에 평생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제 이야기를 제가 직접 쓰려면 일하러 가야죠."
가은은 그녀에게 자료 사본을 건네며 말했다.
"조심해서요. 그리고 보류가 완전한 안전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알아요. 그래서 더 정확하게 쓰겠습니다."
그때 나경의 머리 위에서 붉은 숫자가 희미해졌다. 현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경은 자기 수첩에 그 시각을 적었다.
[외부 증인 001 / 집행 보류 유지]
숫자는 더는 줄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워지지도 않았다. 나경은 그 상태를 승리나 해방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도록 얻어 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
서람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태경은 잠든 하린에게 외투를 덮어 주었다. 가은은 창밖의 도로 표지판을 하나씩 확인했다. 해온군, 남천삼거리, 서람시 18km. 길은 정상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서람시의 외곽 열두 미연결 구역 중 한 곳에서는 여전히 지도에 없는 정류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름이 누구에게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해온군의 자동 회수를 막았다고 열두 곳까지 해결된 건 아니죠."
현우가 말했다.
"맞아요. 네 곳은 원본이 남아 있고, 여덟 곳은 연결이 끊겼어요. 일단 확인한 대로 말해야 합니다."
가은이 답했다.
"어떻게 시작할까요?"
"네 곳의 원본부터 대조합시다. 복구가 가능한지 조사하고, 위험한 구역의 주민에겐 실제로 확인된 내용만 알립시다."
"그럼 우리가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은요?"
하린이 뒷좌석에서 눈을 뜨며 물었다.
현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 사람들한테도 질문할 자리를 남겨야지. 도움을 거절할 수도 있고 다른 방법을 요구할 수도 있게."
하린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마음이 놓여서인지 금세 잠들었다.
***
서람시 시청에서는 김주영이 현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본 보존 기간은 이제 스물닷새 남았다. 주영은 그동안 들어온 시민들의 질문을 분류해 놓았다.
'시외버스를 타도 안전한가?'
'아이 학교 기록을 다시 받을 수 있는가?'
'정확하지 않은 대피 방송을 어디에 신고해야 하나?'
질문들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도시의 구체적인 문제들이었다. 현우 일행은 자기들이 아는 범위와 모르는 범위를 나누어 답했다. 주영은 기관 명의로 공지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 중이라고 표시했다.
오미자는 실제 버스 운행표를 따로 만들었다. 소은은 가은 어머니에게 연락할 날짜를 다시 적었다. 박정호는 딸의 그림을 보관함에 넣고, 귀환자 통로가 어떤 사람에게 열리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진술서를 제출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했다. 그것이 기계 하나를 정지시키는 것보다 느렸지만,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밤늦게 현우는 하린의 공책을 보았다. 오늘 날짜 아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 날에도 내일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현우는 그 문장 옆에 아무것도 덧쓰지 않았다.
가은은 하루 동안 들어온 문의를 정리하며 나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를 읽었다. '기록이 완전해지는 날을 기다리지 말 것. 그렇다고 불완전한 기록으로 사람을 확정하지 말 것.' 두 문장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해온군에서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영은 시청 자료실에 있는 인쇄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잘못된 대피 방송문이 공식 공문처럼 보이는 양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문서를 버리지 않았다. '승인되지 않은 안내'라는 정정서를 같은 위치에 붙이고, 누가 언제 이를 확인했는지 남겼다.
"가짜라고 생각한다고 바로 폐기하면, 나중에 누가 속임수를 썼는지도 확인하지 못할 수 있어요."
주영의 말에 가은은 동의했다.
현우는 하린에게서 별 하나가 그려진 종이를 받았다. 그 아래에는 떡볶이 가게 위치와 다음에 다시 만날 날짜가 적혀 있었다. 도시의 보존과 상관없이 지키고 싶은 약속이었다.
"이건 왜 줘?"
"형이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잊어버리면 저한테 물어봐도 돼요."
현우는 웃었다.
"고맙다. 나도 네가 약속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다시 확인할게."
하린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이름이 원본에 기록돼 있느냐보다, 그 사람과 내일 다시 만날 수 있느냐가 지금은 더 중요했다.
가은은 퇴근 전 문을 잠그며 잠시 서람시의 야경을 보았다. 전광판에는 더는 '이미 동의했다'는 안내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재난 안내와 문의 창구 연락처가 표시돼 있었다. 아무리 불완전해도 구체적인 답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있는 도시였다.
"앞으로 스물닷새군요."
가은이 말했다.
"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정직하게 조사해야죠."
현우는 늦은 밤 골목으로 나서며 답했다. 도시의 이름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제0구역이라는 낯선 지명이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
같은 시각, 해온군 원본 대조소 첫 번째 방.
빈 명패 앞에 작은 불이 들어왔다.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오래된 전화기 한 대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 울림 뒤에 자동 응답 장치가 작동했다.
'제0분류 담당자 연결 요청을 접수했습니다. 발신자 신원을 확인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아도 연결해 주실 건가요?"
'당사자 확인을 위해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제 이름은 아직 없어요. 하지만 제가 지워 달라고 한 건 다른 아이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찾는 길이었어요."
대조소의 벽에서 오래된 지도 한 장이 열렸다. 서람시와 해온군을 잇는 선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이어지는 점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점에는 날짜가 쓰여 있었다. 이십 년 전, 구 서람초등학교가 문을 닫은 다음 날이었다.
[최초 보호 요청 기록 발견]
[요청자: 미확인]
[원본 위치: 제0구역]
잠시 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제0구역 상태: 연결 가능]
[접근 조건: 잊힌 발신자의 선택 확인]
전화기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렀다.
"이현우에게 전해 주세요. 그는 첫 번째가 아니었다고."
그때 시청의 기록 화면에서 현우의 이름 아래 그동안 없었던 작은 글씨가 켜졌다.
[원본 관리자 이현우 / 최초 등록 순번: 09]
현우는 그 숫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스무 해 전의 기록 속에는, 그보다 앞서 이름을 남긴 여덟 사람이 있었다.
제4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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