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이름은 없었다. 대신 '미래 증언 예정'이라는 문구만 반짝였다. 윤가은은 그 한 줄이 마음에 걸렸다. 과거의 허위 서명과 달리, 이번에는 신원을 아예 비워 둔 채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누군가 말할 거라고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말한 건 다르죠."
서태경이 말했다.
그는 오래된 보관자 팔찌를 가방에서 꺼냈다. 지난번 긴급 보류에 사용한 뒤 금이 간 팔찌였다. 안쪽 문양 중 여덟 번째 자리에 작은 홈이 있었다. 해온군 우체국의 분류함과 같은 모양이었다.
"왜 지금까지 모르셨죠?"
하린이 물었다.
"보관자였다는 건 기억하지만, 모든 물품의 뜻을 알지는 못하거든. 이건 내가 물었던 질문의 흔적일 수도 있어."
그 대답은 불편할 만큼 정직했다.
다정의 사진관에는 그날 아침 서람시에서 온 공문이 한 장 도착했다. 원본을 가져오라는 요청이 아니라, 열두 미연결 구역에 남아 있는 기록을 외부 검증소로 옮길 때 주민의 동의를 먼저 받으라는 안내였다.
보낸 사람은 김주영이었다. 그러나 함께 동봉된 지도에는 주영이 표시하지 않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해온군 우체국 뒤편에서 서람시의 오래된 수문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런 길은 없어요."
준석이 지도 위를 짚었다.
"어릴 땐 있었습니다. 화물열차가 우체국 뒤로 들어왔죠. 이십 년 전에 폐선됐습니다."
현우는 지도에서 끝 지점을 확인했다.
'원본 대조소 8번 출구.'
폐선로를 따라 걷는 동안 현우는 여러 번 뒤를 돌아봤다. 선로 옆에는 오래전에 쓰였을 낡은 신호등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풀 사이로 녹슨 우유병 두 개가 반쯤 묻혀 있었다. 누군가 이 길을 오갔다는 증거였지만 누구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가은은 준석에게 이곳의 출입이 가능한지부터 물었다. 준석은 군청의 오래된 시설 기록을 보여 주었다. 지상 통행로는 공공 보행로로 남아 있지만, 건물 내부는 별도의 관리 승인 없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문이 저절로 열린다고 해도 그냥 들어가진 맙시다."
가은이 말했다.
나경은 미소를 지었다.
"형사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규정부터 보시네요."
"그 규정이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고 해치기도 한다는 걸 봤으니까요. 어느 쪽인지는 확인해야죠."
현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 02는 늘 규정을 내세웠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동의를 규정처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고 모든 절차를 부숴 버리는 것이 자유를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언제 문을 열었는지 남기는 평범한 출입 기록은, 약한 사람이 나중에 질문할 수 있는 마지막 단서가 되기도 했다.
하린은 길 끝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을 바라봤다. 열두 개의 문은 학교 교실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일곱 개의 책상을 떠올렸다. 다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숫자의 빈자리를 억지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문마다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먼저 말을 걸어 봐야지.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할 때."
현우가 대답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여는 열쇠보다 문 앞에서 묻는 목소리가 먼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
폐선로가 시작되는 곳에는 잡초가 자라 있었다. 선로를 따라가면 낮은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났다. 창문은 없었고 출입문에는 열두 개의 번호가 순서대로 찍혀 있었다. 문은 여덟 개가 아니라 열두 개였다.
가은은 관할 관리 기관을 확인했다. 건물은 현재 지도에 등록돼 있지 않았지만 과거 군청 기록에는 물류 보관소로 남아 있었다. 강제로 문을 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먼저 건물 외관을 촬영하고 주영이 보낸 문서와 비교했다.
그때 여덟 번째 문 위로 붉은 등이 켜졌다.
[외부 증인: 7 / 빈 신원 1]
[다음 등록 시 자동 회수]
"이렇게 공개적으로 협박하는 건 처음이에요."
나경이 말했다.
준석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손목 안쪽의 08을 가렸다.
"이 건물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기억났어요?"
하린이 물었다.
"기억난 게 아닙니다. 몸이 알고 있어요. 여기 문턱에 오른발을 걸면 안 된다는 걸요."
가은은 그 말을 그대로 수첩에 적었다. 몸의 감각은 단서였지만, 과거의 사실로 확정할 증거는 아니었다.
현우가 출입구 앞에 섰을 때 문 위 스피커가 켜졌다. 관리자 02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전 수문 관제동에서 긴급 보류 요청을 받아 준 여성의 목소리였다.
'원본 대조소는 현재 안전 검증 중입니다. 출입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자동 회수 명령의 근거와 외부 증인 등록 현황을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가은이 또박또박 말했다.
'접근 권한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문을 열라는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허위 등록에 대한 이의 신청 접수 방법을 알려 주세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문 옆에 작은 서랍이 튀어나왔다. 안에는 두 장의 종이가 있었다.
'이의 신청서.'
'증거 열람 신청서.'
가은은 접수 절차를 확인했다. 신청서는 우편 또는 대조소 현장 접수가 가능했다. 거절 사유는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나경은 자기 이름으로 이의 신청서를 쓰되, 현우 일행에게 공개되지 않아야 할 개인정보는 빈칸으로 남겼다. 해당 칸을 채워야 하는지 접수자에게 묻기로 했다.
서랍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이 더 나왔다.
[원본 대조소 상태]
[열두 구역 가운데 8개: 기록 단절]
[4개: 원본 유지]
[전체 임시 보존: 26일 남음]
"잠깐만요. 서람시 공문은 열두 곳이 미연결이라고 했어요."
현우가 말했다.
태경이 목록을 들여다봤다. 열두 곳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 네 곳은 아직 독립된 원본 보존이 가능했다. 한 장의 지도에 '미연결'로만 적혀 있었던 차이가 이제야 보였다.
"네 곳을 먼저 찾아야겠네요."
가은이 말했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을 거예요."
준석이 낮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열한 번째 문 아래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틈으로 편지 한 장이 밀려 나왔다.
'나는 내 이름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남겨 달라.'
글씨는 다정의 우편함에 들어 있던 어린아이 편지와 비슷했다. 단정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고,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하린은 편지를 주워 들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채로 사진만 찍었다.
"이건 누구한테 온 거죠?"
그녀가 물었다.
스피커가 답했다.
'열한 번째 보존 구역의 접수 대기 문서입니다. 현재 수취인은 없습니다.'
"수취인이 없는데 왜 편지가 나와요?"
'열람을 원하는 당사자가 도착할 때까지 반환하지 못한 문서입니다.'
현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누가 이름을 잃었기 때문에 문서가 주인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 문서가 주인을 인정하지 않아서 이름을 잃은 것인지.
그 순간 나경의 휴대전화에서 짧은 진동이 났다.
[외부 증인 001 / 60:00:00]
[자동 회수 조건 검증 단계 진입]
뒤이어 일곱 번째의 빈 명단 아래 새 줄이 생겼다.
[외부 증인 008 / 등록 대기: 이현우]
그 이름을 읽은 순간, 오래전 서람시에서 한 번 멈췄던 현우의 붉은 숫자가 바닥 그림자 위에 다시 나타났다.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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