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보관실의 여덟 개 빈 서랍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빈칸을 보면 곧바로 이야기를 채우고 싶어 했다. 해온 제8분류구, 여덟 번째 아이, 여덟 명의 외부 증인. 숫자가 같다는 사실은 음산했지만, 그것만으로 사건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윤가은은 칠판에 사실과 추정을 나눠 적었다.
'확인: 외부 증인 세 명 등록.'
'확인: 원본보다 앞선 날짜의 회수 운송장.'
'미확인: 외부 증인 여덟 명이 되면 우체국이 사라지는가.'
'미확인: 배준석이 사진의 여덟째 아이인가.'
이나경은 칠판을 사진으로 남겼다.
"저는 기자인데 이렇게 쓰면 기사 제목이 너무 재미없겠어요."
"재미없어도 정확해야죠."
가은이 대답하자 나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도 기사에 넣겠습니다."
***
해온군을 떠나지 않고 사흘을 지낸다는 계획은 곧 수정됐다. 서람시 외곽의 열두 곳에서 비슷한 기록 단절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김주영은 시청 대조표를 보내 왔다. 각 지역의 주민등록, 버스 정류장 이름, 옛 학교 명부가 서로 다른 시점에서 끊어져 있었다.
"어느 동네는 주소만 남았고, 어느 동네는 주소가 없어도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어요. 전산에서 한 줄을 잇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쪽은 세 사람의 증언부터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시청에서 조사를 계속해 주세요."
가은이 말했다.
현우는 해온군 사진관과 서람시 원기록실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서람시에서 증언했던 오미자와 박정호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외부 전산망에 새로 등록하는 순간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을 한곳에 등록하면 안 될 수도 있어요."
태경이 말했다.
"그럼 다 따로 숨겨 놓자는 거예요?"
하린이 물었다.
"숨기는 게 아니라 어떻게 연결할지 결정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날 밤 준석이 오래된 우편함에 담긴 종이봉투를 가져왔다. 안에는 '백지 우편함' 사용 지침이 있었다. 발송인과 수취인을 쓰지 않고 편지의 접수 시각과 관리인 두 사람의 서명만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이게 왜 필요했죠?"
가은이 물었다.
"누군가 이름을 알려 주면 바로 잡혀 가던 시절이 있었나 봅니다."
준석은 자신도 직접 겪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인지 자신이 운송했던 기록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정은 규칙을 읽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보존은 공개와 다르다. 봉인은 소유와 다르다.'
"옛날 사람들도 고민은 했네요."
나경이 말했다.
현우는 한 줄 아래의 단서를 발견했다.
'회수는 오직 당사자 신청 또는 독립된 재심 결과에 따라 시행한다.'
"이 규칙이 유효하다면 02가 사람들 대신 회수할 수 없겠죠."
"유효한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가은이 답했다.
나경은 강서윤에게 기록을 맡기는 것과 목소리를 잃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서윤에게는 그 차이가 어려웠다. 그녀는 이미 동료가 이름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험을 했고,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잔뜩 쌓인 빨래를 해야 했다. 거창한 보호 체계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었다.
"제가 지금 피곤한 게 정상인가요?"
서윤의 질문에 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일을 겪었으면 그럴 수 있죠. 저도 취재하다가 여긴 왜 왔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럼 내일 출근해도 되겠죠?"
가은이 실제로 확인된 병원 운영 상황부터 설명했다. 모든 것이 안전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도 함께 적어 줬다. 서윤은 안내를 들은 뒤 집에 돌아가 자신의 물건이 그대로 있는지부터 확인하겠다고 했다.
준석은 그 모습을 보며 오래된 백지 우편함 규칙이 왜 필요했는지 조금 이해했다. 기록을 당장 공개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았다. 직장을 잃을까 봐, 가족을 놀라게 할까 봐,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직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남이 가로채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이 대피소가 되면 곤란하겠습니다."
준석이 말했다.
"맞아요. 우체국은 우체국이니까요. 진짜 쉴 곳은 군청에서 확인해야죠."
가은이 답했다.
그들은 해온군청의 공식 안내와 상담 창구를 따로 확인해 종이에 적었다. 빨간 이름을 가진 사람의 수를 세는 일만 하다 보면, 지금 배고프고 지친 사람을 놓치기 쉬웠다. 나경은 그것을 수첩 첫 장에 크게 적었다. '사람이 먼저, 목록은 나중.'
***
그날 새벽, 백지 우편함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그녀는 한 손에 구겨진 버스표를 쥐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빈 편지봉투를 감싸고 있었다.
"여기가 이름을 맡기는 곳인가요?"
그녀의 첫마디에 나경이 앞으로 나섰다.
"누가 그렇게 알려 줬어요?"
"버스 안에서 방송이 나왔어요. 이름을 적으면 안전하게 보관해 준다고요."
여자는 자신을 강서윤이라고 소개했다. 해온군에서 태어나 서람시의 병원으로 출퇴근하는 간호조무사였다. 전날 환자 보호자에게 서람시 입원 기록을 설명한 뒤부터 동료들이 그녀의 이름표를 읽지 못한다고 했다.
현우는 출근증을 확인했지만 지금 당장 그녀를 명단에 추가하지 않았다.
"그 방송은 정확히 뭐라고 했나요?"
"제 이름을 여기에 제출하면 위험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을 수 있다고요."
나경이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에게 위험을 넘긴다고요?"
"네. 제가 서람시를 기억하기 때문에 위험한 거라면, 기억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현우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억을 없애는 절차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정확히 설명받으셔야 해요. 우리가 그걸 아직 모릅니다."
서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든 당장 해결해 주겠다고 말해 줄 사람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럼 그냥 돌아가야 하나요?"
"아니요. 여기 앉아서 먼저 지금까지 겪으신 일을 적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자료는 남기지 않아도 되고요."
하린이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서윤은 빈 편지에 이름 대신 자신의 두려움을 적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 내 환자들은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녀는 쓰기를 마치자 종이를 접고 봉투에 넣었다. 가은은 봉투를 보관하기 전 제출자가 정한 열람 조건을 따로 확인했다. 서윤은 자기 말이 필요할 때 한 번 더 동의를 구해 달라고 했다.
그제야 준석이 우편함을 열었다.
봉투가 투입구를 지나자 철판 안쪽에서 작은 벨이 울렸다.
[외부 증인 004 / 본인 신청 보류]
[기억 연동: 유지]
[강제 회수: 미승인]
네 번째 이름은 숫자 대신 '보류'라는 표시로 남았다.
"누르는 버튼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먼저네요."
하린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우편함 안쪽에서 다른 문장이 이어졌다.
[명단 등록: 4]
[임계치: 8]
강서윤이 돌아간 뒤 현우는 한동안 빈 봉투를 바라봤다. 당사자의 선택을 지키는 행동이 동시에 위험한 숫자를 높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선택도 깨끗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에서는 밤 버스 네 대가 한꺼번에 해온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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