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다정은 자기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는 말에도 암실 문부터 닫았다.
"필름에 빛 들어갑니다. 무슨 일이든 그다음에 이야기해요."
기이하게도 그 말은 모두를 진정시켰다. 다정은 스스로의 자료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직접 동의한 범위 안에서만 사본을 만들고, 원본 필름은 사진관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가은이 사진관 출입문과 보관함의 상태를 기록했다.
나경의 붉은 시간은 계속 줄고 있었다.
[67:41:09]
"이제 무엇을 하면 되죠? 이름을 백 명한테 알려야 하나요?"
나경이 물었다.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지난번에 한 일은 기억을 많이 모으는 게 아니었습니다. 원본이 바뀌었을 때 어디서 잘못됐는지 증명하려고 자료를 남긴 거였죠."
가은은 기자수첩을 펼쳤다. 제3차 교정의 문구는 '외부 증인'이었다. 증인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그 사람에게 무엇을 증언할지 묻지 않았다. 나경은 서람시를 취재했지만, 기사로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할 권리도 있었다.
"증언해야 산다는 조건부터 이상해요."
가은이 말했다.
그때 나경의 노트북에 편집국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서람시 취재 원고 회수'. 내용에는 나경이 쓰지 않은 문장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본인은 서람시 관련 허위 정보를 생산했음을 인정하고, 정보 보호 목적의 신원 이관에 동의합니다.'
아래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전자 서명이 돼 있었다.
나경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메일 수신 시각을 읽었다.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하고 다정 선생님 사진관에 있었어요. 노트북은 꺼져 있었고요."
"우리가 확인할 수 있어요."
현우가 말했다.
"아니요. 여러분이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제 기록도 필요해요. 언제 제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그걸 직접 말할 기회를 주세요."
***
그들은 편집국으로 갔다. 벽에는 지난 수십 년의 지역 기사들이 액자로 걸려 있었다. 편집장은 나경을 손님 취급하면서도 그녀가 쓰던 책상 위치를 정확히 가리켰다.
가은은 먼저 정식 수사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현재 상황은 증거 보존과 사실 확인이 우선이고, 권한 없는 강제 열람은 할 수 없다고 했다. 편집장이 자발적으로 열람을 허락한 사내 송신 기록에만 손을 댔다.
그 기록에서 기이한 날짜가 나왔다.
발송 일자: 내일 오전 아홉 시.
수신 일자: 오늘 오후 두 시.
"아직 보내지도 않은 메일을 받았네요."
편집장이 안경을 벗었다.
"예약 발송일 수도 있죠."
나경은 고개를 저었다.
"예약 발송이면 서버 기록에 예약한 사람이 남아야 해요. 그런데 거기에는 '이전 원본'이라고만 돼 있어요."
현우는 그 말을 듣고 십여 시간 전 버스 기록을 떠올렸다. 미래의 동의를 현재의 사실로 만들던 방식. 시스템은 시간이 흐르는 순서를 조작한 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해 놓고 과거의 서명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편집장님. 나경 기자의 고용 기록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죠. 이 기사 중에서 누가 쓴 건지 모르겠는 게 있습니까?"
편집장은 게시판에서 종이 기사 하나를 떼었다. 오래된 터미널 화재를 보도한 기사였다. 바이라인 자리에 잉크가 번진 흔적이 있었다.
"예전엔 분명 누가 썼는데요. 최근 계속 비어 있어요."
기사 끝에는 서람시 응급구조대 이름이 남아 있었다. 현우는 그 지명 밑에 또 다른 손글씨를 발견했다.
'배준석에게 확인할 것.'
***
배준석은 해온군 우체국의 위탁 배송기사였다. 편집장 말로는 과거 화재 당시 구조 물품을 옮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를 찾으러 나간 사이 나경의 기자수첩이 사라졌다.
분명 책상 위에 놓았는데, 접힌 모서리까지 흔적 없이 없었다. 가은은 방 안 사람에게 차례로 물었다. 모두 수첩을 봤고, 그 누구도 가져가지 않았다. 감시 영상에는 나경이 수첩을 내려놓는 장면이 있었지만, 다음 프레임에서 책상 위에 수첩이 없었다.
"지워진 건가요?"
하린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어. 단정하기 전에 우리가 남겨 둔 사본을 확인하자."
다행히 나경은 수첩의 주요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다정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사진 파일도 휴대전화에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정의 종이 인화 사본은 남아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적힌 이름이 빈칸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현우가 입을 열었다.
"종이가 안전한 건 아니군요."
"원본이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가 확인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나 봐요."
태경이 말했다.
다정은 모두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렇다고 종이를 버릴 필요는 없지요. 방금 우리가 본 빈칸을 적어 둡시다. 언제부터 비었는지까지."
나경은 자기 이름의 사라진 자리에 검은 펜으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었다.
'원래 이 칸에 내 이름이 있었다고 세 사람이 확인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들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지, 잃어버린 원본의 복구가 아니다.'
그 문장만큼은 아직 남아 있었다.
가은은 편집국 복도를 걸으며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을 살폈다. 수십 년 동안 누군가 사건의 이름을 붙이고, 기자가 현장을 찾아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흔적이었다. 취재수첩 하나가 사라지면 무엇이 없어지는 걸까. 종이 몇 장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다시 확인할 기회인지도 몰랐다.
편집장은 나경에게 책상을 내주면서도 서먹하게 말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 같다가도, 네가 어느 칸에서 사탕을 꺼내 먹었는지는 기억나는구나.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지?"
나경은 사무실 서랍을 열었다. 실제로 작은 사탕 통이 있었다. 그 안에는 사탕 두 개와 배터리가 닳은 녹음기가 남아 있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단지 제 말만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확인할 길을 없애지는 말아 주세요."
편집장은 잠시 망설이다 오래된 기사 원고의 교정지를 꺼냈다. 나경이 고친 문장에 붉은 볼펜 표시가 있었다. 교정지의 필체를 편집장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교정 과정에서 누가 어떤 의견을 냈는지는 회의록으로 남아 있었다.
"이걸 보관해도 될까요?"
나경이 물었다.
"원본은 회사에 둘게. 사본은 가져가. 대신 취재원 동의 없이 기사 내용을 공개하지는 말고."
가은이 두 사람의 동의를 확인한 뒤 사본을 봉투에 넣었다. 그 봉투에는 '기자를 증명하는 문서'가 아니라 '이날 회사에서 열람한 교정지 사본'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이 붙었다. 나경은 사라지는 수첩보다 이런 절차가 더 오래 버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배준석을 만난 곳은 우체국 뒤편 화물 집하장이었다. 마흔대 후반의 그는 낡은 배달차에서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가은이 이름을 부르자 준석은 둘러보고 사람들을 하나씩 살폈다.
"제가 왜 필요합니까?"
나경이 오래된 기사 사진을 내밀었다. 화재 당시의 어린아이들, 서람시에서 보내온 구조 물품, 항구 창고의 출입기록.
준석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 사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신문 보관실에 있었습니다."
"그럼 이걸 돌려놓으세요. 그리고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마세요."
그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오른쪽 손목 안쪽에 희미한 숫자 08이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하린이 숨을 삼켰다. 다정의 필름 가장자리에 있던 숫자와 같았다.
"아저씨, 서람초등학교에 간 적 있나요?"
준석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지게차 후진 경보가 울렸다.
"내가 그날 학교로 돌아갔으면, 사진에 찍힌 애들 이름이 지금 남아 있었을까요?"
그가 물었다.
현우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여기선 안 됩니다. 기록을 가져가면 다시 그들이 옵니다."
"그들이 누구죠?"
준석은 뒤쪽에 늘어선 파란 우편함을 가리켰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편지를 회수하는 사람들이요."
현우가 고개를 돌리자 우편함 열두 개가 보였다. 그중 마지막 우편함의 투입구만 어둡게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종이가 접히는 소리가 들렸다.
준석이 말했다.
"그곳에서 나온 편지는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들 답장을 보내요."
제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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