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람시의 아침은 평소와 비슷했다. 시청 앞 붉은 선은 희미해졌고, 사람들은 전날 멈췄던 버스가 다시 다니는지부터 물었다. 세상이 없어질 뻔했다는 뉴스를 본 사람도 출근 시간에는 신호등 앞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이현우는 그런 풍경이 좋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는 능력이야말로 도시가 지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당 벽의 달력에는 누군가 굵은 글씨로 숫자를 적어 두었다.
[임시 보존 종료까지 29일]
글씨를 쓴 건 김주영이었다. 주영은 시청 상황실에서 나와 종이상자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원본이 바뀔 수 있는 전산 자료는 인쇄하고, 누가 언제 확인했는지 기록하는 일이 시작됐다고 했다.
"오늘은 외부 기관에 자료를 넘겨야 합니다. 서로 다른 곳에 있어야 한쪽 기록이 지워져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외부에서 받아 주긴 하나요?"
윤가은이 물었다.
"접수 창구가 열렸습니다. 아직 그쪽에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민하린은 상자를 뒤집어 보았다. 붉은 잉크로 '보존 대상'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람한테 붙이는 말 같네요."
그 말에 모두 잠시 멈췄다. 주영은 펜으로 '기록 사본'이라고 다시 적었다.
"그렇지. 사람은 서류가 아니니까."
현우의 휴대전화가 울린 건 그때였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발신 지역은 서람시에서 버스로 한 시간 떨어진 해온군이었다.
"혹시 서람시 이현우 씨인가요?"
여자의 목소리는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다.
"저는 해온군에서 지역 기사를 쓰는 이나경이라고 해요. 작년에 서람시 재개발 취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제 동료가 저를 보고 이상한 질문을 했어요."
"어떤 질문이요?"
"우리 신문사에 언제 입사했냐고요. 십 년째 같이 일했는데요."
현우는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그 일만으로 저한테 연락하신 건 아니겠죠."
"네. 사무실에 있던 제 사진에서 얼굴이 지워졌어요. 그런데 사진 뒷면의 글씨는 남아 있어요. '서람시, 이나경 취재'라고요."
현우가 가은을 보았다. 가은은 소리를 키우라는 손짓을 했다.
나경이 말을 이었다.
"제가 이상한 걸 한 번 더 봤어요. 어제 해온군에 도착한 서람시 시외버스 기사에게 인터뷰했는데, 그분은 분명 제 이름을 불렀거든요. 오늘은 제 이름을 읽고도 기억하지 못해요. 꼭 이름이 입안에서 사라지는 것처럼요."
"그 기사님은 지금 어디 있나요?"
"터미널이요. 그리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 머리 위에 숫자가 보입니다."
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숫자가 얼마죠?"
"일흔한 시간, 사십 분쯤요. 붉은색입니다. 저한테만 보여요."
전화기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죠? 기사로 쓰면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
서람시를 빠져나가는 길은 한산했다. 시 경계 앞 검문소에는 밤새 설치한 임시 표지판이 있었다. '기록 보존 조사 중. 통행 제한 없음.' 그 뒤로는 들판과 간판이 낮은 주유소가 이어졌다.
현우는 조수석에서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붉은 숫자는 없었다. 그러나 나경이 본다는 숫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가은이 운전대를 잡고 말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숫자를 본다는 게 마음에 걸려요. 지난번엔 당신만 볼 수 있었는데."
"사라지는 사람을 직접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사라진다는 걸 알리는 걸까요."
"확실하지 않아요. 본인이 말한 그대로부터 확인하죠."
하린은 뒷좌석에서 작은 수첩에 날짜를 적었다. 서태경은 오래된 서류의 좌측 상단에 놓인 도장들을 다시 살폈다. 보관자 06이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아는 척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해온군에 도착했을 때 터미널 전광판에는 서람시행 막차가 정상 표시돼 있었다. 가은은 그 사실을 먼저 사진으로 찍었다. 그날부터 기록의 기준은 '원래 그래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때 각자 실제로 보고 확인한 상태였다.
이나경은 터미널 앞 분식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외투, 자주색 머리끈, 손목에 낡은 시계. 그녀는 테이블 위에 기자수첩과 인화 사진 세 장을 펼쳐 놓았다.
첫 사진에는 사람 넷이 벽화 앞에서 웃고 있었다. 두 번째에는 가운데 여자의 얼굴만 흐릿했다. 세 번째에는 그 자리 전체가 배경과 같은 색으로 덮여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출력했어요. 원본 파일에서도 똑같아요."
"사진이 어떻게 바뀌는지 직접 본 사람은요?"
가은이 물었다.
"저하고 편집장님입니다. 그런데 편집장님은 마지막 사진을 보더니 원래 세 명이 찍은 사진이라고 하더군요."
나경은 냉정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했으나 수첩을 잡은 손이 떨렸다.
"저는 누가 저를 기억해야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는 건가요?"
현우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전 사건에서 사람들의 증언은 분명 도움이 됐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존이 다른 사람의 기억력에 매달린다는 건 잔인했다.
"우리가 당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 말은 마음에 드네요."
나경이 아주 작게 웃었다.
현우는 그녀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자기 눈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다만 나경이 허공을 응시하다 시계를 보며 숫자를 적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1:03:12]
그날 현우는 터미널 안에 걸린 관광안내 지도를 오래 바라봤다. 서람시는 분명 지도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표시돼 있었다. 해온군 주민들은 그곳으로 일을 하러 다녔고, 환자를 실어 나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방송 한 줄이 도시 전체를 없는 장소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나경은 지도를 보며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서람시에서 결혼해 아이를 키우다가 해온군으로 돌아왔다. 나경의 전화에는 친구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지만, 최근 며칠 동안 친구의 연락처에 표시되던 성씨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 사람한테 직접 연락할 수 있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해 봤어요. 연결은 되는데, 제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제 이름을 말하면 잠깐 알아보다가 다시 묻고요. 제가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게 잘못된 걸까요?"
"아니요. 그분이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현우가 말했다.
나경은 그 말을 적었다. '알아보지 못함'과 '존재하지 않음'을 같은 말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현우는 과거 자기 이름이 붉게 변했을 때 이 차이를 알지 못했다. 삭제 기록을 보며 사람의 마지막 날을 미리 정해 버렸고, 그래서 구할 방법을 찾기보다 카운트다운을 보고 두려워하던 시간도 많았다.
터미널 벽시계가 한 번 울렸다. 시계 아래에서는 한 아이가 부모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간식이 먹고 싶다고 떼를 썼다. 나경이 그 모습을 보았다.
"저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고 해도 이곳에서 살던 제 하루가 전부 없었던 일은 아니겠죠."
"그 하루를 전부 증명해 낼 수는 없어도, 누군가 임의로 거짓이라고 정하게 해 둘 수는 없습니다."
가은이 대답했다.
***
터미널 안내소에서 오미자와 통화가 연결됐다. 오미자는 해온군 기사에게 자신이 운전했던 임시 수송 버스에 대해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날 타고 있던 승객들은 서람시 안에서 주소를 잃었지만, 터미널 기사는 해온군을 나서는 승객을 한 명도 태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차량 기록에는 탑승 인원 한 명으로 돼 있어요."
기사의 말에 나경이 자신의 수첩을 폈다.
"그 사람, 저예요. 제가 기사님 인터뷰하려고 버스에 잠깐 올라탔어요."
"승차하면 이전 신청이라고 간주하던 그 안내 말인가요?"
가은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니요. 그날은 그런 안내가 없었어요. 저는 차 안을 사진 찍고 곧바로 내렸습니다."
현우는 나경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버스에 올라탄 순간을 근거로 누군가 기록을 만든 거군요."
태경이 운행일지의 시간대를 대조했다. 사진을 찍은 분은 오전 10시 13분이었다. 시스템에 남은 전송 시각은 오전 10시 14분. 그런데 '서람시 보호구역 관련자'로 등록된 시각은 그보다 하루 앞선 자정이었다.
가은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눌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행동을 이미 한 일로 적었어요. 지난번과 똑같습니다."
그 순간 나경의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제3차 교정 / 외부 증인 등록]
[분류 근거: 서람시 관련 기억 보유]
[신원 원본: 연계 대기]
[기록 이관 예정: 70:59:59]
화면 아래에는 동의 항목이 하나 있었다.
'정보 보호를 위해 이관에 동의하십니까?'
예와 아니오가 아니었다. 선택지는 '지금 동의'와 '나중에 동의' 두 개뿐이었다.
나경이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저는 어느 쪽도 누르지 않겠습니다."
가은이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그때 터미널 출입문 위 스피커에서 출발 안내가 흘러나왔다. 평범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짐을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안내에서 현우 일행만 발을 멈췄다.
'서람시행 버스는 운행하지 않습니다. 서람시는 존재하지 않는 목적지입니다.'
전광판에는 여전히 서람시행 막차가 반짝이고 있었다.
제3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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