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소리치지 않았다.
'누가 자신의 뜻을 직접 말하려고 합니까?'
이현우는 질문을 듣자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낡은 교실과 젖은 우산, 학교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하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자기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잊히면 안전해진다고 했다. 그때 아무도 위험의 뜻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그는 보호와 삭제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구분할 수 있었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현우가 철문 앞으로 나섰다.
관리자 02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역시 같은 얼굴로 현우를 바라봤다. 둘 중 하나가 유리에 비치면 거울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우는 이제 02가 자신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굴이 같아도 선택은 같지 않았다.
"저는 이현우입니다. 제 이름으로 서람시 전체가 이전된다는 문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신청을 한 적이 없습니다."
[본인 진술 확인 중]
"그리고 주민들이 어디에 살겠다고 결정할 권리는 제가 대신 갖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 남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로 지우지 말아 주세요."
뒤쪽에서 가은이 말했다.
"저는 윤가은입니다. 제 신원이 지금 삭제 대상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직접 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승인 날짜가 아직 오지 않았던 문서를 시청에서 확인했고, 실제 서명을 받지 않은 대리 동의가 운행 계약에 쓰였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증언 독립성 검증 중]
주영은 손에 든 종이를 펼쳤다.
"저는 시청 직원 김주영입니다. 시민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안내를 송출한 책임도 시청이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지 않은 결재를 미래의 결재라고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오미자는 운행일지를 들었다.
"저는 버스 기사 오미자입니다. 승객이 차에 탔다는 사실만으로 주소를 포기한다고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런 운행을 승낙한 적 없습니다. 직접 차를 멈췄습니다."
태경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는 보관자였던 서태경입니다. 기록이 지워진 사람들에게 귀환 절차가 있었다는 것을 이 문서로 확인했습니다. 누군가가 돌아오고 싶다면 적어도 그 길을 묻는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들은 도시를 대신해 일괄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실제 존재하지 않는 동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처리되는 일을 중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
철문 안쪽에서 가느다란 금속음이 났다.
[이의 제기 당사자 확인됨]
[독립 확인자 2명 이상 확인됨]
[집행 결과의 비가역성 인정]
관리자 02가 손을 들어 유리판을 내리눌렀다.
"긴급 보류는 구역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철문 너머 목소리가 답했다.
02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인정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정지는 위험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은 사람을 없는 곳으로 옮기는 위험도 있습니다. 두 위험을 분리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검토할 시간도 없다고 했잖아요!"
02가 처음으로 소리쳤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서명을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유리판의 글자가 뒤집혔다.
[관리자 승인 진위: 미확인]
[미래행동 예측에 의한 동의: 불인정]
[제2차 교정 자동 집행: 정지]
현우의 머리 위에서 붉은 숫자가 0을 향해 내려가다가 멈췄다.
[이현우 / 00:00:01]
도시 밖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자정을 알리는 시청 시계였다. 수문 너머 종이 조각이 하얀 재처럼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어딘가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고, 멀리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현우는 승리를 선언하지 않았다.
"구역 안정도는요?"
그가 물었다.
철문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현 보호 기록 안정도 2%]
[자동 교정 중지]
[외부 검증 및 긴급 보존 절차 개시]
[일시 보존 기간: 30일]
"삼십 일이요?"
가은이 되물었다.
'그 안에 보호구역의 기록 연결을 복구하고, 당사자의 권리를 확인할 안전한 절차를 마련해야 합니다.'
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제 모두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미뤄진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검토 기회가 새로 생긴 것이었다.
외부 검증 담당자에게 연결되는 안내가 이어졌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평범한 기계음이었다.
'이제부터 자동 집행 정지를 유지하기 위한 자료 보존과 위험 조사 절차가 시작됩니다.'
현우는 그것이 누구의 조직인지 물었다. 목소리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영역이 많다고 대답했다. 운영 기관의 원기록 일부가 손상됐고, 보호시설의 실제 기록을 함께 대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부 고칠 수 있을까요?"
가은이 물었다.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 대답은 솔직했다. 02가 늘 내놓던 매끈한 약속과 달랐다. 정해진 시간 안에 완벽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래도 무엇이 불확실한지 말해 주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모두 조금 안도했다.
주영은 곧바로 시청의 공식 확인 경로를 요청했다. 가은은 오늘 받은 자료를 원본과 사본으로 나눠 봉인했다. 오미자는 임시 수송 차량을 다시 내보내기 전에 운행 목적지를 확인하도록 기사 동료들과 연락했다. 태경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표시한 진술서를 쓰겠다고 했다.
현우는 자신만이 도시를 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구 한 명이 도시를 대신해 결정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마흔세 명의 승객,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들, 질문하러 나왔던 시민들, 자신이 잘못했다고 기록하기 시작한 어른들이 모두 조금씩 그 일에 참여했다.
***
관리자 02는 철문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구역이 유지되지 못하면 결국 여러분이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현우가 그를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겠죠. 진짜 위험이 생기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때도 사람들에게 묻겠습니다."
"누군가가 대답을 못 하면요?"
"대답할 수 있게 돕겠습니다. 못 한다고 마음대로 동의했다고 쓰지 않겠습니다."
02는 한동안 현우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위협하지 않았다. 두려움을 이용하는 계산이 잠깐 멈춘 사람처럼 보였다.
"당신의 방법은 느립니다."
"알아요."
"때로는 늦을 겁니다."
"그래도 사람을 빨리 없애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02의 얼굴이 흐려졌다. 현우의 얼굴, 낯선 노인의 얼굴, 흰 종이 같은 얼굴이 차례로 겹쳤다. 이윽고 빈 이름표만 남았다.
[대행 관리자 02 / 집행 권한 제한]
"끝난 건 아니군요."
태경이 말했다.
"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도 규정을 읽었어요."
가은이 대답했다.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이 울렸다. 가은 머리 위에 떠 있던 숫자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윤가은 / 대상 등록 이의 접수]
[명령 근거: 제2차 교정 방해]
[자동 집행: 정지]
가은은 수첩을 내려다봤다. 자기 이름이 마지막 장에 그대로 있었다. 손으로 쓴 글씨는 완벽한 보장은 아니었지만, 오늘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려 주는 흔적이었다.
***
새벽 세 시, 시청 앞 식당에서 여섯 사람이 다시 만났다.
주영이 실제 주소가 찍힌 영수증을 가져왔다. '서람시 중앙로 18.' 이번에는 시 이름이 또렷했다. 다만 가게 주인은 모든 일이 해결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신 내일 장사를 해도 되는지, 재난 안내는 어디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다.
"시청에서 검증된 정보만 다시 공지할 겁니다. 이상한 안내가 나오면 확인할 번호도 알려 드릴게요."
주영이 말했다.
소은은 가은 어머니와 만나기로 한 날짜를 적었다. 그 날짜가 새삼 무서웠다. 누군가를 만나겠다고 약속했는데 도시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못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은은 적어도 함께 확인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민하린은 드디어 떡볶이를 먹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맵다며 물을 두 컵이나 마시고도 한 조각을 더 집었다. 현우는 웃다가 문득 아이의 공책을 보았다. 맨 뒤에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 도시가 없어지지 않았다. 내일은 내일의 일을 다시 물어볼 수 있다.'
그날 그 문장을 읽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웃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시의 생존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동생을 만날 기회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숙제를 검사하러 집에 돌아가는 평범한 밤이었다.
현우는 식당 창문을 보았다. 자신의 머리 위에 숫자는 없었다.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창문 너머 멀리, 시 경계에 있던 붉은 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선이 가늘어지고 높아졌을 뿐이다. 그것은 도시의 하늘을 따라 먼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동시에 수문 관제동의 비어 있는 철문 뒤편에서 새로운 서류가 출력되고 있었다.
[제2차 교정: 임시 정지]
[원본 미연결 구역: 서람시 외곽 12곳]
[외부 증인 기록 유입: 확인]
관리자 02는 그 문서를 집어 들었다. 현우에게 패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람의 이름은 가까운 사람에게서만 지워지는 게 아니지."
그가 혼잣말했다.
서류의 마지막 장에는 서람시가 아니라 다른 지역들이 표시돼 있었다. 서람시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 사람이 이동한 경로였다. 한때 이 도시의 주민이었던 사람, 이 도시에서 누군가를 구했던 사람, 이 도시의 이름을 우연히 들은 사람의 흔적까지 이어졌다.
[제3차 교정 예비 목록 생성]
[대상: 서람시를 기억하는 구역 외부 인원]
02가 서류를 덮었다.
스무 해 전 처음 가동된 낡은 기계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숫자가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제3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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