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은 자기 이름이 흐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수첩부터 펼쳤다.
경찰서 후배와 통화한 시각, 화면에 나타난 죄목, 숫자가 시작된 시간을 기록했다. 그다음 이현우를 바라봤다.
"내가 잊혀도 제가 쓴 건 당분간 남아 있을 수 있겠죠."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잊히기 싫어요. 그래서 확인해야 한다는 거예요."
가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문장은 분명했다. 현우는 그녀에게 숫자만 보여 주고 절망하지 않겠다고 했다. 처음 박정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은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물었다.
"뭘 할까요?"
"시청 말고 수문으로 갑시다. 가짜 승인에 원본이 쓰였다면 원본을 멈출 곳도 거기 있어요."
주영이 차 키를 들었다. 태경은 서랍에서 가져온 규정집과 봉인된 녹음테이프를 정리했다. 정연실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했다. 과거에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아이에게 맡겼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말을 다시 했다.
"이번엔 어른들이 서명해야 해요. 우리가 직접 본 일만."
하린이 옆에서 말했다.
"저도 직접 본 게 있어요. 제 이름이 제 거라고 말한 것."
가은은 소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네가 기억하는 건 아주 중요해. 하지만 네가 이 위험한 곳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어. 저기 시민회관에서 사람들에게 네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건 네가 결정하자."
하린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소은과 함께 남겠다고 했다. 대신 공책을 펼쳐 자기 손글씨로 한 문장을 적어 현우에게 건넸다.
'민하린은 다른 사람의 동의서를 대신 쓰지 않았습니다.'
현우는 종이를 접어 지갑에 넣었다. 나중에 그것이 증거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아이의 선택을 잊지 않을 방법이 하나 더 생겼다.
***
수문 관제동은 새벽과 저녁의 경계에서 다르게 보였다.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긴 복도와 귀환 창구가 있었다. 지금은 방 뒤쪽에 크고 둥근 철문이 드러나 있었다. 철문에는 두 개의 손잡이가 있고, 사이에 유리판이 끼워져 있었다. 유리판 안쪽으로 수많은 이름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출석부에 적었을 법한 글씨부터 오래된 인감의 둥근 글씨까지, 서로 다른 기록이 한 줄로 연결돼 있었다.
[제2차 교정 준비]
[승인자: 원본 관리자 이현우]
[예정 시각: 2026-10-31 00:00]
"얼마 안 남았어요."
주영이 말했다.
현우는 황동 열쇠를 꽂았다. 철문은 잠깐 움직이다가 멈췄다.
[단독 관리자 접근 제한]
[외부 독립 확인자 필요]
"02는 이 제한을 어떻게 넘는 거지?"
태경이 규정집을 펼쳤다. 종이 사이에는 접힌 부록이 끼워져 있었다. '대규모 기록 이동 시 추가 확인 조건'.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조항을 읽었다.
'관리 구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원본 변경은 주민 각각의 실질적 동의 또는 별도의 긴급 생명 보호 절차로만 가능하다. 긴급 생명 보호 절차에는 독립 확인자 2명 이상의 현장 확인 및 당사자의 사후 이의 제기 경로가 포함돼야 한다.'
"이 조건 때문에 02가 승객을 한 명씩 버스로 옮기려 했군요."
가은이 말했다.
"버스에 탔다고 동의했다고 만들고, 그 숫자를 늘리는 거예요."
"하지만 안 탄 시민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주영이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미래에 동의할 예정'이라고 처리하려 했겠죠."
현우는 자기 이름 옆에 있는 '승인 예정' 문구를 만졌다. 차가운 유리 너머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자신이 빨간 우산을 쥔 하린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데리러 올게.'
그 뒤에서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 속삭였다.
'네가 못 오면 내가 대신 결정할게.'
현우는 눈을 떴다. 02가 과거 자신에게 한 약속을 악용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약속에는 도시를 이관하는 권한이 없었다.
관리실 복도 끝에서 문이 하나 열렸다.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회색 제복은 아니었다. 수문을 관리한다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손전등과 공구 가방을 들고 있었다. 다만 서로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가 여기 근무한 게 맞습니까?"
맨 앞의 남자가 물었다.
주영이 그들에게 작업복의 업체 표시와 근무일지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일지에는 실제로 이곳에서 배수펌프를 점검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시청에서 확인한 외부 점검 기록도 있었다. 다만 오늘의 출입 시간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저희는 이 문을 잠그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누가 보냈습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안쪽에서 경보가 계속 나요."
현우는 그들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을 겁주기 위한 명령이 다른 사람에게 평범한 업무처럼 전달되고 있었다.
그때 바닥의 회색 조각 사이로 진짜 물이 흘렀다.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배수관 수위가 올라가고 있었다. 주영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잠긴 방수문을 점검했다. 잠시 뒤 관제 전원이 임의로 변경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누군가 물리적인 시설까지 이용해 긴급 상황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은은 시청 재난 담당자에게 실제 배수 상태와 인근 주민 안전을 확인하도록 연락했다. 그동안 현우와 태경은 시스템 기록을 살폈다. 도시가 지워질 위험이 실제로 있다는 말과, 그래서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 없다는 말은 여전히 같은 문장이 아니었다.
"위험을 알리는 건 해야 해요."
가은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여기의 문서를 확인해야죠."
현우는 철제 책상 옆에 놓인 수문 도면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스템 안과 바깥의 사실을 동시에 붙잡는 일이었다.
***
가은은 관제동의 철제 책상에서 이의 신청서를 찾았다. 컴퓨터에는 없던 서식이었다. 노란 종이에 손글씨로 '원본 관리자 승인 진위 확인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신청서에는 세 칸이 있었다. '승인 당사자의 현재 진술', '독립 확인자', '보류 대상 기록의 명칭'. 가은은 먼저 현우에게 펜을 건넸다.
현우는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자신이 관리자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의 뜻을 대표하는 문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적었다.
'본인은 서람시민 184,209명의 관계 기록을 일괄 이전하는 데 동의한 적이 없다. 모든 시민이 이전을 거부한다는 뜻도 대신 말하지 않는다. 승인자 칸에 기재된 나의 서명이 진정한 것인지 확인될 때까지 집행을 보류해 달라.'
가은이 말했다.
"좋아요. 주장하는 범위를 정확히 썼네요."
주영은 자신이 시청 상황실에서 본 미래 결재 문서와 위조된 운송계약의 작성 경위를 적었다. 오미자는 현장에 도착해 첫 버스가 잘못된 동의 문구를 표시했다는 사실과 운행을 중지한 일을 증언했다. 서로 다른 직업과 위치에서 확인한 내용이었다.
이들은 모두 외부 확인자의 자격을 자동으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기관 소속과 이해관계를 적어 제출했다. 시스템이 검증할 일과 자신들이 입증할 일을 구분했다.
철문에 종이를 대자 조용한 안내가 흘렀다.
[승인 진위 이의 신청 접수]
[독립 확인자 검토 중]
잠시 뒤 붉은 문장이 솟았다.
[검토 완료 예상 시각: 2026-10-31 00:01]
"1분 늦잖아."
오미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접수만으로는 부족했다. 절차가 완료되기 전에 도시가 지워질 수 있었다. 현우는 규정집의 다음 장을 펼쳤다. 거기에 짧은 단서가 있었다.
'승인 진위에 합리적 다툼이 있고 집행 결과를 되돌릴 수 없는 경우, 확인될 때까지 자동 집행을 정지한다.'
"지금 바로 정지해야 하는 게 원칙이네요."
가은이 철문에 말했다.
"되돌릴 수 없는 집행입니다. 왜 정지 규정을 적용하지 않습니까?"
안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장 스피커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관리자 02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얼굴은 현우와 똑같았다. 하지만 표정에는 현우에게 없는 평온함이 있었다.
"조항을 잘 찾으셨군요. 다만 적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긴급 상황입니다."
"그 긴급 상황을 만든 게 당신이잖아요."
가은이 말했다.
02가 대답했다.
"저는 시간이 다 된 보호구역을 정리하려는 겁니다. 여러분이 모든 규정을 만족시킬 때까지 기다린다면 구역 자체가 무너질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유리판 속의 이름들이 마구 흔들렸다. 철문 바깥에서 물소리가 커졌다. 강둑의 물이 역류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은은 바닥이 젖은 것을 보고 손전등을 비췄다. 물이 아니었다. 회색 종이 조각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현우의 머리 위에서 숫자가 줄었다.
[이현우 / 00:03:00]
시민들의 붉은 선도 함께 안쪽으로 조여 왔다.
02는 마지막 계약서를 내밀었다.
"제게 권한을 주십시오. 그러면 최소한 이름들은 남길 수 있습니다. 장소와 기억이 없어지는 것쯤은 살기 위한 비용 아닙니까?"
현우는 계약서를 받지 않았다.
"누구한테 그 비용을 물어봤습니까?"
"지금도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래요. 답을 들을 때까지요."
그때 태경이 종이 팔찌를 끊어 유리판 위에 올렸다. 팔찌 뒷면에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보관자 06 / 원본 보류 권한: 긴급 호출.'
태경이 손을 떨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입니다. 결정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결정할 시간을 주는 것."
그는 팔찌 안쪽의 숫자를 손으로 눌렀다.
[긴급 보류 호출]
[대상: 제2차 교정]
[확인 대기]
02의 표정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그 권한은 이미 폐기됐습니다."
태경이 대답했다.
"원본에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벽시계의 초침이 밤 열두 시를 향해 움직였다. 철문 저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테이프 속의 여자와 같은 목소리였다.
'보류 요청을 들었습니다. 누가 자신의 뜻을 직접 말하려고 합니까?'
제2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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