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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7화
PAYLUA ORIGINAL · 제27화

27화. 00의 목소리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3,884자

오프라인 책장
녹음테이프는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정연실이 가져온 카세트 플레이어의 재생 단추는 여러 번 눌러야 겨우 걸렸다. 낡은 기계 안에서 톱니가 천천히 돌아갔다. 창밖으로는 퇴근길 자동차들이 시청 앞 도로를 채우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의 이름은 또렷했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00.' 라벨에 쓰인 숫자를 현우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02보다 먼저 있었던 담당자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불렀어요. 우리 아이들한테는 번호가 필요 없다고 말하던 사람이었지만." 정연실이 대답했다. 테이프 속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드러우면서도 지나치게 정확한 말투였다. 그러나 0번 승강장의 안내 방송과 달랐다. 문장을 한 번에 읽지 않고 가끔 숨을 고르는 소리가 있었다. '서람구역 기록 보호 장치의 초기 설명을 남깁니다. 이 장치는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불법 조회와 임의의 신원 변경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관리자의 물건이 아닙니다.' 한참 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안전하게 숨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숨기는 것과 지우는 것은 다릅니다. 보호가 끝나는 날에도 그 사람의 삶을 되돌릴 선택권은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가은은 녹음기를 중지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계속됐다. '주소와 관계 기록은 개인의 동의 없이 다른 구역으로 이전할 수 없습니다. 동의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이전하지 않고 외부 확인 절차를 개시합니다. 예측한 의사는 의사가 아닙니다.'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 년 전 녹음이 지금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내용이 원래 규정이라면, 02가 반대로 바꿔 놓은 셈이군요." "완전히 바꿔 놓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자꾸 예외를 만들었겠죠." 태경이 말했다. 녹음 마지막에는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남자아이였다. '그럼 제가 이름을 잊으면요? 누가 대신 말해 줘요?' 여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도울 수는 있어. 하지만 네가 싫다고 하는데 그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어. 그러니 나중에 큰 사람이 된 네게도 꼭 묻겠다고 약속하자.' 현우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린 목소리는 틀림없이 자기 것이었다. "내가 이 말을 했어요?" 정연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계속 같은 질문을 했어. 하린이가 기억을 못 하면 어떻게 하냐고.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고치면 안 된다고." 녹음은 여기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테이프가 조금 더 돌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 그리고 남자 목소리. '그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사람들은 위험을 만나면 결국 편한 쪽을 고를 텐데요.' 여자 목소리가 답했다. '그렇게 믿는다고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지키려는 절차 때문에 보호구역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위험을 숨기지 말고 함께 해결해야죠.' 짧은 침묵 뒤 남자가 말했다. '관리자 02를 기동하겠습니다.' 테이프가 뚝 끊어졌다. *** "00은 사람이었군요." 가은이 말했다. 정연실은 확신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살아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아이들이 그 여자를 '처음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말을 듣기 전에 반드시 본인에게 질문했기 때문이었다. 주영은 테이프 재생 내용을 말로 받아 적고, 정연실의 허락을 받아 복사본을 만드는 방법을 논의했다. 모든 파일을 같은 전산망에 올리면 02에게 곧바로 바뀔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갖고 있는 기록이어야 했다. "그럼 이걸 시민들에게 들려주죠." 현우가 말했다. "전체를요? 아이들이 말한 부분까지?" 하린이 물었다.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보호시설 아이들의 목소리를 공개하면 그들의 과거를 알아내려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 줄지도 몰랐다. "아니. 네 허락 없이 네 이야기를 내보내면 안 되지. 원래 규정 부분만, 확인해서 알릴게." 하린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삶이 또 다른 구호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가은은 증거가 되는 원본 테이프를 봉인했다. 외부 전문가의 감정 없이는 녹음만으로 모든 일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도 적었다. 그럼에도 이 테이프는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보호규정에 대리 동의를 허용하지 않는 문구가 원래부터 있었음을 보여 줬다. *** 시청 자료실의 오래된 사진에도 같은 여자가 남아 있었다. 얼굴은 반쯤 창밖으로 향해 있었고, 사진 설명에는 '초기 기록 지원 담당'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름 칸은 인쇄되지 않았다. 주영은 사진을 보관하는 파일의 원래 소장처부터 추적했다. 사진 한 장만으로 그 여자가 녹음의 화자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현우가 물었다. "실제 사람이었다면 본인이나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야겠죠. 녹음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고 꼭 살아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어요." 가은이 말했다. 태경은 테이프를 한참 내려다봤다. "저분은 어릴 적 아이들에게 자꾸 질문했어요. 이름을 적어도 되냐고, 누가 보면 안 되는지, 언제 다시 이야기하고 싶은지. 그때는 그런 질문이 번거롭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요?" "질문을 안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봤으니까요." 정연실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녹음 속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손가락이 남은 오른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그 계약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말에 겁이 났어요. 빨리 끝내 달라고 했죠. 아이들에겐 묻지도 않았고요." 현우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용서할 자격이 자기에게만 있지도 않았다. 대신 말했다. "그때 일을 똑바로 적어 주실래요? 기억 안 나는 부분도 그대로요." 정연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책임이 남아 있었다. *** 그날 오후, 관리자 02가 직접 연락했다. 전화기 속에는 현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 도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위험이 닥치기 전에 사람들을 옮기는 겁니다. 왜 방해합니까?' 현우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누구를 어디로 옮기는 겁니까?"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주소를 빼앗았잖아요. 그게 안전한 겁니까?" 잠깐의 침묵. 02의 목소리가 한층 조용해졌다. '당신은 한 사람씩 설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붕괴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열여섯 시간도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다 확인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확인하지 않은 사람까지 동의했다고 만들면 안 되는 거죠." '그러다 모두가 위험해지면 누가 책임집니까?'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상대가 무서운 이유는 언제나 위험 자체를 거짓말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었다. 정말로 도시의 선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02가 이어 말했다. '선택에는 결과가 따릅니다. 서람시가 무너지면 그 원인은 당신이 될 겁니다.' 현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험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시민들한테도 말할 겁니다. 하지만 겁을 주고 서명시키는 건 책임이 아니에요." '이해했습니다.' 전화를 끊기 직전, 02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방송보다 먼저 제 방송이 나갈 겁니다.' 휴대전화가 꺼졌다. 밖에서 시청 전광판이 켜졌다. 도시 전역에 연결된 안내망이었다. 거기에 현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화면 속 그는 실제 현우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민 여러분, 저는 이현우입니다. 여러분의 안전한 이관에 동의합니다.' 현우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영상 속 남자가 자신처럼 눈을 깜빡였다. 단 하나, 눈동자에 두 개의 숫자가 떠 있었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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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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