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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0화
PAYLUA ORIGINAL · 제20화

20화. 이름이 살아남는 법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5,539자

오프라인 책장
박정호의 딸이 그린 그림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승강장 안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출입구였고, 다른 하나는 작고 삐뚤빼뚤했다. 아이는 작은 문 옆에 꽃 한 송이를 그려 놓았다. 꽃의 색을 칠할 때 여러 번 덧그린 듯 빨간 크레파스가 종이 뒤까지 묻어 있었다. 이현우는 휴대전화 화면을 확대했다. 그림 아래에는 어린아이 글씨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는 문은 여기.' "이게 0번 승강장 안에 실제로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윤가은이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이 어디서 나온 건지는 알죠. 박정호 씨는 실제로 돌아왔으니까요." 가은은 원기록실의 종이 뭉치를 접었다. 관리자 02의 권한은 잠시 정지됐지만, 그것이 원본 시스템 전체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다 되면 승강장에 있는 자동 절차가 움직일 것이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스템을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 0번 승강장은 처음 봤을 때와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붉은 시간표와 빈 얼굴의 승객들만 보였던 곳에 작은 매표소가 생겼다. 매표소에는 '귀환자 통로'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박정호가 돌아온 뒤 새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있었지만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가은은 하린의 손을 잡았다. 태경과 소은은 뒤쪽에 있었다. 상담센터에서 남겨 둔 진술서와 가은의 수첩, 박정호 딸의 그림 복사본을 모두 가져왔다. 원본이 지워지면 다른 장소의 사람이 남긴 기록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린은 입구 앞에서 멈췄다. "저 혼자 들어가야 해요?" "아니." 현우가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원할 때만 들어가. 다른 사람이 네 대신 결정하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럼 들어가 볼래요." 하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망치고 싶기도 한데, 내 이름을 내가 말하고 싶어요." 가은은 승강장 바닥에 가방을 놓고 안쪽을 정리했다. 소은의 상담기록 사본 두 장, 하린의 공책, 학교 카세트테이프, 박정호의 딸이 보낸 그림, 어린 현우의 공책 사진.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기록을 지웠다고 모든 근거가 없어지지는 않을 만큼 서로 다른 출처를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하린이 물었다. "네가 어느 날 오늘 일을 잊어버려도, 다른 사람한테 다시 물어볼 수 있게 하려고." "그럼 제가 뭘 잘못 기억했으면요?" "그때도 다시 확인하면 돼. 네 기억이 틀릴 수도 있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지. 그래서 종이를 여러 장 가져온 거야."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생각한 답을 말하면 어른들이 맞다거나 틀리다고 결정하던 교실과는 달랐다. 이제는 자신도 기록을 확인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태경은 제복을 입었던 시절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일하던 때의 절차를 조금은 기억하는 것 같았다. 심사 창구에서는 증인이 겪은 일을 구체적으로 묻고, 직접 보지 않은 일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 제가 본 것만 말할게요." 하린이 말했다.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불러 줬고, 형사 언니가 저랑 같이 학교까지 왔어요. 소은 언니는 저한테 물을 나눠 줬어요. 그리고……" 소녀는 잠시 생각하다 공책을 들어 보였다. "저는 오늘 내일 먹을 떡볶이가 궁금해졌어요." 소은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에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긴장을 놓았다. 다시 없을 만큼 위험한 장소에서 떡볶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러나 현우는 그 말이야말로 살아 있는 사람의 증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삶에 내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능력은 어떤 파일로도 대신 만들 수 없었다. 가은이 낮게 말했다. "오늘 못 끝내는 일이 있어도 괜찮아. 단정 짓지 못한 건 그대로 남겨 두자." 현우도 동의했다. 관리자 02를 영원히 없앨 수 없을지 모른다. 원본 장부의 모든 오류를 바로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한 사람에게 시간을 주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는 자가 있더라도 말이다. *** 매표소 창구에 종이가 나타났다. [보호 대상 07 / 신원 확인] [확인 방식: 원본 대조] 하린은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원본과 대조한다는 말은 자신이 겪지 못한 과거를 모두 받아들이라는 말 같았다. 창구 너머의 안내 방송이 흘렀다. '원본에 등록된 이름과 신원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임시 기록은 폐기됩니다.' 가은이 창구 아래에 붙은 문구를 읽었다. 원기록실에서 찾은 조항과 같았다. '보호 대상은 신원 확정을 거절할 수 있으며, 거절은 보호 종료 사유가 될 수 없음.' "하린아. 이름을 말해도 되고, 지금은 확인하지 않겠다고 해도 돼." 하린이 가은을 돌아봤다. "그러면 제가 살아도 돼요?" "적어도 이 규정에는 네가 원하지 않는 결론을 강요할 수 없다고 쓰여 있어." 현우는 손을 꽉 쥐었다. 이 답이 모든 일을 해결해 줄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으로 꾸민 선택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하린은 창구에 말했다. "제 이름은 민하린이에요. 그 이름이 처음부터 제 것이었는지는 아직 몰라요. 나중에 알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그 이름으로 살아갈래요. 다른 사람이 정해 주는 것 말고요."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본인 의사 확인] [원본 신원 대조: 보류 요청] "보류해 주세요." 하린이 또박또박 말했다. *** 창구가 진동했다. 회색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승강장 양쪽에서 나왔다. 그들은 현우를 바라보더니 일제히 같은 말을 했다. "관리자 부재 시 처리 불가." 현우는 관리자가 아니라는 말이 자신들을 막을 줄 몰랐다. 그때 태경이 오래된 종이 팔찌를 내밀었다. "보관자 06입니다. 관리자와는 다릅니다. 우리 일은 사라진 사람이 돌아갈 때 확인하는 것이었어요." 직원들이 잠시 멈췄다. 태경은 팔찌 안쪽에 적힌 숫자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가은의 수첩과 소은의 상담 기록을 차례로 펼쳤다. "우리는 이 소녀가 예전에 누구였는지 전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자기 의사를 직접 말했다는 것은 모두 들었습니다." 가은이 말했다. "동의와 거절을 기록하세요.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다른 하나를 강제로 집행해서는 안 됩니다." 창구 위에서 긴 문장이 나타났다. [본인 의사 확인됨] [보호 종료 명령 자동 집행: 유예] [대행 관리자 02 승인 문서: 무효 심사 중] 하린의 머리 위에 있던 붉은 숫자가 멈췄다. 현우는 숨을 참았다. 숫자가 일 분, 이 분, 삼 분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러더니 빨간 글씨가 희미해져 갔다. [민하린 / --:--:--] 가은이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얼른 얼굴을 가렸지만 하린이 먼저 손을 잡았다. "왜 울어요?" "좋아서. 조금 안심이 돼서." 하린은 가은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던 아이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그러나 소은의 숫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윤소은 / 00:04:11] 현우는 곧바로 창구에 물었다. "이 사람은 왜 보류되지 않습니까?" [해당 대상은 보호 대상이 아님] [미반환 원본의 귀속 시각 도래] 가은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소은을 봤다. 자신을 동생이라고 믿을 수 있는 단서는 생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족과 처음으로 다시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은이 오히려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반환 절차를 밟을게요." "너 혼자?" 하린이 붙잡았다. "혼자 아니야. 너희가 같이 왔잖아." 소은은 창구 앞에 섰다. 원본 검증은 세 사람의 독립된 확인을 요구했다. 가은은 오래된 등본과 어머니 글씨를 제출했다. 하린은 카세트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오늘 자신이 들은 소은의 목소리가 같다고 말했다. 태경은 오래전 학교에서 소은이 교문 밖에 서 있던 장면을 불완전하게나마 떠올렸다고 증언했다. 각각의 증거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느 하나로 소은의 삶을 전부 설명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버려진 기록이었다는 것, 지금은 스스로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입니까?" 창구가 물었다. 소은은 가은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디가 집인지는 모르겠어요. 대신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하고 같이 밥 먹는 곳이요." 가은은 웃으면서 울었다. "갈 수 있어요. 제가 사기로 약속했거든요." 현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 약속은 저하고 먼저 한 거 아니었어요?" "그러면 같이 먹죠." 가은이 말했다. 소은도 작게 웃었다. [귀환 목적 확인] [원본 일부 반환] 승강장 반대편 작은 문이 열렸다. 그림 속 꽃 한 송이와 똑같은 모양의 꽃무늬가 문손잡이 아래 새겨져 있었다. 문을 지나자 늦은 밤의 골목과 따뜻한 음식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소은의 숫자가 마지막 한 칸을 남기고 멈췄다. 그리고 서서히 사라졌다. *** 바깥으로 나오자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불이 켜진 식당을 찾았다. 하린은 주머니에 넣었던 공책을 펴서 맨 뒤에 별을 하나 그렸다. '오늘은 모두가 내 이름을 들었다.' 현우는 그 문장을 보며 오래전 자신이 이 아이에게 했다는 약속을 떠올렸다. 자신은 되찾으러 오겠다고 말했고, 이십 년 동안 오지 못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정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실을 없애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다른 선택을 했다. 도망치지 않았고, 본인의 대답을 들었다. "앞으로도 내일이 오겠지?" 하린이 물었다. "응." "내일이 와도 제가 저일까요?" 현우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내일의 네가 지금하고 조금 달라도 괜찮아.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계속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소녀는 공책을 덮었다. "그럼 내일은 떡볶이를 먹어 보고 싶어요." 가은은 휴대전화에 약속을 적었다. 정말 평범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내일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 같은 시각, 중앙 원기록실. 정지된 책상 위에서 관리자 02가 눈을 떴다. 권한은 정지됐지만 존재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겨진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표정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보호 대상 07 집행 유예] [미반환 원본 1건 반환] [관리 구역 안정도 2%] "예상보다 늦어졌군요." 그가 혼잣말했다. 책상 아래에서 새로운 서류철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었다. 지도 한 장이 펼쳐지고 도시 전체가 붉은 선으로 둘러싸였다. [제2차 교정 준비] [대상: 서람시 일대 184,209명] [승인자: 원본 관리자 이현우] 02는 승인자 칸을 바라보며 조용히 펜을 들었다. "원본이 반대한다고 해서 미래의 동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현우의 얼굴을 흉내 낸 자신의 얼굴로 웃었다. 밖에서는 식당 유리창에 비친 현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오래전에 멈췄던 붉은 숫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현우 / 72:00:00] 그 아래에 처음 보는 문장이 있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기억하는 도시가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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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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