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에게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이현우는 눈앞의 숫자를 보고 두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위협은 숫자에서 시작됐다. 숫자를 보여 주고, 두려움에 쫓겨 어떤 문장에 서명하게 하는 방식. 박정호를 찾아가던 날도 그랬고, 서람시장에서도 그랬다.
"숫자를 줄인다고 제 선택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관리자 02가 대답했다.
"선택은 시간이 충분한 사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아뇨. 선택은 시간이 없을 때도 남아 있어야 합니다."
02는 탁자 위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서류들이 넘겨지는 소리가 쏟아졌다. 가은은 즉시 휴대전화로 상담센터에 연락했다. 한참 연결음이 울린 끝에 태경이 받았다.
"소은 씨 상태가 어떻습니까?"
"괜찮아 보이는데, 복도 끝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사람들도 상담실 위치를 잊고 있어요."
"두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세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누가 강요하면 대답하지 마시고요."
태경은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통화가 끊기자 가은은 02의 책상 위 원본 규정을 펼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한 문장을 멈춰 세웠다.
'신원 확정의 거절은 보호 종료 사유가 될 수 없음.'
"여기서 원본에 직접 도달할 수 있습니까?"
02는 미소 지었다.
"관리자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원본 문서를 열람할 권리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권한을 부여해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가 바로 답하지 않자 가은은 문서를 책상 위로 밀었다.
"문서를 지금까지 우리 앞에 펼쳐 보인 건 당신입니다. 열람했다는 이유로 계약이 성립한다면 규정을 설명하지 않은 책임도 당신에게 생겨요."
02는 한 발 물러섰다. 책상 옆 서류함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람은 허용합니다."
02가 책상 위에 새 문서를 만들어 띄웠다. 이번에는 보고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교실을 보여 주는 영상이었다. 오래전 서람초등학교에서 찍은 듯 화면 가장자리에 날짜가 있었다.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첫 번째.'
'네!'
'두 번째.'
'네!'
여섯 번째까지는 대답이 들렸다. 일곱 번째 순서가 되자 화면이 흔들렸다. 공책을 들고 서 있던 작은 아이가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현우는 무심코 영상 앞으로 다가갔다. 하린의 얼굴을 닮은 아이였다. 아니, 닮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얼굴 부분이 희미해서 눈코입이 없었다. 다만 빨간 우산과 공책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열 살의 현우가 화면 속에서 한 걸음 나섰다.
'여기 있어요.'
소년은 교사의 출석부 옆에 자신의 공책을 펼쳤다.
'이 아이가 여기 있어요. 오늘 저랑 그림 그렸어요.'
교사는 한숨을 쉬더니 출석부에 체크 표시를 했다. 아이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하시겠죠."
02가 말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 아이를 기록할 때마다 다른 아이의 기록이 흔들렸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려는 선택이 수백 명을 위험하게 만들었어요."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증명하는 기록이 있습니까?"
"방금 보여 드렸지 않습니까."
"아니요. 방금 건 누군가 이름을 불러 줬다는 장면이에요. 왜 다른 아이의 기록이 흔들렸는지는 보여 주지 않았어요."
가은이 옆에서 말했다.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원인과 결과가 되는 건 아닙니다."
02는 영상 화면을 껐다. 현우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사라진 검은 표면을 바라봤다. 그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하린에게 다가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거창한 사명감보다는, 출석을 불렀는데 아무도 대답을 듣지 못해 속상했을 것이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요."
현우가 말했다.
"하지만 그때 아이에게 남을 지울 권한이 있었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잖아요. 아무리 급해도 사람을 지울지 말지는 어린애가 결정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02는 자신이 현우를 흉내 낸 얼굴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은 듯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는 현우가 자신과 똑같이 기록의 안정성을 택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얼굴이라고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
서류함 안에는 원기록 한 권이 있었다. 종이는 두껍고 거칠었으며, 흔히 보는 주민등록등본이나 행정 서식과 달리 사람의 이름보다 사건의 시간이 먼저 적혀 있었다.
가은은 자신들이 찾는 날짜를 펼쳤다.
2006년 10월 28일.
어린 현우의 글씨가 보였다.
'하린이를 잊게 해 주세요. 그러면 다들 하린이를 못 찾아올 거예요. 내가 꼭 다시 데리러 올게요.'
그 바로 아래에는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본인 의사가 확인될 때까지 삭제 승인 보류.'
현우의 숨이 멎었다.
"이건 누가 썼어요?"
02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은이 글씨를 확대해 보았다. 맨 위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연실이 학교에서 찍어 주던 교사 도장이었다. 가은은 주머니에 넣어 둔 호루라기의 흠집과 날짜를 떠올렸다.
"정연실 씨가 확인한 겁니다. 하린이를 삭제하라고 승인한 게 아니에요."
그녀는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야 비로소 성인 현우의 서명이 나타났다. 색깔도, 종이의 섬유도 달랐다. 나중에 끼워 넣은 장이었다.
[추가 서명 생성 방식: 성장 예측 모델]
[생성자: 관리자 02]
"이제는 설명할 수 있겠네요."
가은이 말했다.
02는 차분하게 답했다.
"원본이 이십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허용된 대행 조치를 진행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만든 가짜 서명이 하린이를 지우는 데 쓰이는 겁니까?"
"보호 기간이 끝났으니까요."
현우는 차례로 페이지를 넘겼다. 원본에는 분명하게 '보호 종료 시 당사자 의사 재확인'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이십 년 뒤 아무 이유 없이 삭제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사자 의사를 재확인해 본 적 있어요?"
"민하린은 원래 신원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거네요."
현우는 원기록을 펼친 채로 말했다.
"하린이는 지금 살아 있어요. 자기가 민하린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당신이 확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죠."
***
가은은 문서에서 다른 조항을 찾았다.
'서명자가 미성년자로 판명될 경우 대행 권한은 사후에라도 무효 심사 대상이 된다.'
현우는 그 문장을 읽고 가은을 보았다. 이십 년 전 자신이 열 살이었음을 증명할 방법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남아 있던 공책, 단체 사진, 어린 글씨,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남긴 날짜. 한 가지 기록이 바뀌어도 다른 흔적들이 있었다.
"제 나이는 지울 수 없겠죠."
"누가 지우더라도, 우리가 서로 확인할 수는 있죠."
가은은 세 장의 기록을 펼쳤다. 학교 공책에 적힌 '운동회 연습', 태경이 기억을 더듬어 적은 '열 살 정도의 소년', 그리고 소은의 상담센터 진술서였다. 각각 작성자도, 장소도, 목적도 달랐다.
02가 말했다.
"원기록과 충돌하는 외부 증언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게 당신이 만든 운영 규칙이죠?"
가은이 물었다.
"원본에 없는."
남자는 침묵했다. 그 침묵 사이로 천장의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무효 심사 신청 접수 가능]
현우는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자신이 관리자로 승인하면 또다시 권한에 묶일 수 있었다. 그는 문서를 가은 쪽으로 밀었다.
"제가 아닌 제3자가 신청할 수 있습니까?"
[이해관계인 신청 가능]
가은이 서류를 받았다.
"신청하겠습니다."
***
바깥에서는 소은이 상담센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태경이 휠체어를 끌며 앞쪽을 막았고, 하린은 뒤에서 소은의 팔을 잡았다. 복도 끝 벽이 지워지는 대신 희미한 안개로 변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길을 잃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상담사는 문을 열고 사람들을 밖으로 안내했다. 그는 왜 이들이 이토록 급한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눈앞의 여자가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고 먼저 물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소은이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지고 싶어요."
상담사는 그 말을 메모장에 적었다. 자기 이름을 고른 사람의 하루를 기록하는 일이 평소의 상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하린의 공책이 저절로 펴졌다.
[민하린 / 07:21:00]
소녀는 자신의 이름 위에 떠 있는 숫자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책 페이지에 적힌 붉은 글씨는 분명했다. 소은은 옆에서 하린을 끌어안았다.
"언니가 여기 있어."
"알아요."
"누가 물으면 내가 네 이름 말해 줄게."
"아니요."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할게요. 제 이름은 제가 먼저 말해야죠."
***
원기록실에서는 가은이 무효 심사서를 제출했다. 검은 숫자들이 책상 위에서 부서지듯 흔들렸다.
[관리자 02의 대행 권한 일시 정지]
[대상자 의사 재확인 절차 개시]
02는 처음으로 표정을 잃었다. 그의 얼굴이 현우를 닮았다가, 낯선 늙은 남자로 바뀌었다가, 흰 종이처럼 평평해졌다.
"이런 경우는 본 적 없습니다."
"처음이겠죠."
현우가 말했다.
"당신은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승리가 너무 이른 것 같았다. 서류 아래쪽에서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대상자 본인 의사를 자정 전까지 직접 확인할 것]
[본인 의사 확인 장소: 0번 승강장]
[지정 시간 2026-10-28 00:00]
가은은 시각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지금 그들이 확보한 증언은 모두 바깥에 있었다. 하린이 승강장으로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원기록실에서는 두 번째 출구를 보지 못합니다.'
보낸 사람은 박정호였다.
'우리 딸 그림 뒷면에 0번 승강장의 반대쪽 출구가 그려져 있습니다.'
제1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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