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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18화
PAYLUA ORIGINAL · 제18화

18화. 얼굴을 빌린 관리자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4,467자

오프라인 책장
"한 사람만 고르라네요." 윤가은은 수첩을 이현우에게 보여 주었다. 자신이 쓴 글씨가 아닌 문장이 페이지 뒷면에 박혀 있었다. 종이를 비춰 보면 잉크가 종이의 뒤까지 스며든 것이 보였다. 누군가 얇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끼운 흔적은 없었다. "둘 중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실제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가은이 말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뻔했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이 배운 것은 하나였다. 문장 뒤에 숨어 있는 조건부터 읽어야 한다. 민하린은 상담센터의 의자에 앉아 소은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여러 번 적고 있었다. 소은이 옆에서 손가락으로 잘못 쓴 받침을 가르쳐 줬다. 두 사람은 누구도 고르라고 하지 않았는데 서로를 돕고 있었다. "저들이 고르라고 해도 고르지 않을 거예요." 현우가 말했다. "그럼 두 사람 다 구할 방법을 찾죠." *** 서태경이 노파에게 연락해 오래된 시장 서고의 도면을 확보했다. 도면에는 다른 건물과 달리 서람초등학교, 서람시장, 0번 승강장이 한 점으로 이어진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노파는 전화로 말했다. "중앙 원기록실은 장소가 아니야. 모두가 같은 사실을 다르게 기억할 때 그 틈에 생기는 공간이지." "그럼 어떻게 가죠?"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두 사람이 같은 문으로 들어가면 돼. 단, 무엇이 다른지 알고 있어야 해." 가은은 동료 형사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곧 포기했다.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을 위험에 끌어들이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이미 관련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골라야 했다. "저와 현우 씨가 가겠습니다." "두 분이요?" 태경이 물었다. "어린 현우가 하린을 보호했다고 믿는 사람과, 그가 하린을 지웠다고 적힌 기록을 본 사람이에요. 같은 사건을 정반대로 기억하죠." 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전 둘 다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억이 아니라 각각 확인한 사실이 달라요.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몰라요." 그들은 소은과 하린을 태경에게 부탁했다. 가은은 상담센터 직원에게 두 사람을 돌봐 달라고 요청하고, 경찰 신분증의 비상 연락처를 남겼다. 당장 두 사람을 어디에도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출발하기 전에 가은은 박정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호는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직장을 잃은 채 돌아왔는데도 원래 출퇴근길이던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고 했다. "정호 씨. 예전에 돌아오실 때 마지막으로 본 장면을 기억하세요?" "정확히는 아닙니다. 다만 문을 지나가기 전에 누가 자꾸 집으로 갈 자격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 같아요." "그때 뭐라고 대답하셨죠?" "자격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가고 싶어서 간다고요. 그리고 나서 딸 생각을 했습니다." 가은은 대답을 오래 되뇌었다. 소은에게도 하린에게도 필요한 말이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확인하는 일은 누군가 자격을 허락하는 것과 달랐다. "한 가지만 더요. 돌아오는 문이 하나뿐이었습니까?" 정호는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빨간 문과 작은 문이 있었어요. 저는 작은 문으로 나온 것 같아요. 아이가 그린 꽃 그림이 붙어 있었거든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사실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 애 그림을 봤어요. 그림에는 처음부터 꽃이 있었고요. 어떻게 같은 그림을 봤는지 모르겠네요." 가은은 그 말을 중요하게 기록했다. 원본과 충돌하는 기억이 있을 때 나타나는 공간이라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기억이 작은 출구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추측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문이 하나뿐이라는 안내를 믿지 않을 근거는 됐다. 전화를 끊자 현우가 물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가은은 잠시 웃었다. "저는 수사할 때 범인이 꼭 잡힐 거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증거를 모으는 일을 그만두지도 않죠." "이게 무슨 수사인지조차 모르겠어요." "지금은 알고 있는 것만으로 움직이면 됩니다. 누가 기록을 바꿀 수 있는지, 왜 두 사람을 선택하라고 하는지, 규정을 누가 작성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저쪽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현우는 가은이 적은 메모를 봤다. 그녀는 단정적인 결론 대신 물음표를 남겨 두었다. 거기에는 초조한 사람의 비겁함이 아니라, 섣불리 남의 삶을 결정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이 있었다. *** 원기록실의 문은 서람시장 후문의 골목에서 나타났다. 현우와 가은이 손에 든 서로 다른 기록을 비교해 읽자 빨간 철문 아래로 계단이 생겼다. 계단 벽에는 사람 이름 대신 수많은 질문이 적혀 있었다.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당신은 존재합니까?' '서로 다른 두 증언 중 어느 것이 사람을 만듭니까?' 가은이 세 번째 문장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질문이 잘못됐어요.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는 조건부터가 이상하죠." 현우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계단 끝에는 책상 하나가 있었다. 책상에 앉은 사람은 이현우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현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은 눈썹의 흉터도, 왼손 손톱의 작은 금도 똑같았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사람을 바라보는 대신 사람의 머리 위를 보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원본." 남자가 먼저 말했다. "당신 누구죠?" "관리자 02. 원기록 업무를 계속해 온 대행자입니다." "내 얼굴을 왜 하고 있어요?" 02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 얼굴은 기록의 기준입니다. 어린 이현우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남긴 자기 모습을 성장 예측으로 복원했죠. 원본이 오지 않아도 업무를 계속하려고요." "이십 년 전부터 내 어른 얼굴을 만들었다고요?" "가능한 장래 모습을 추정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기록을 오래 보관하니까요." 가은이 물었다. "그러면 진짜 이현우가 아닌 당신이 현우의 성인 서명을 만들어 붙였겠군요." 02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행 서명은 허용된 절차입니다. 원본의 선택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가장 정확한 예측이 동의는 아니죠." "동의는 시간이 걸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더 많은 사람이 지워질 수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먼저 지웠다고요?" 02는 책상 위에 얇은 보고서를 올렸다. [20년 간 기록 불일치 2,184건] [임시 보관 구역 잔여 용량 3%] [조정 실패 시 인접 구역 확대 위험] "여러분은 한두 사람을 구하겠지만, 그렇게 늘어난 기록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밀어냅니다. 제가 하지 않으면 더 큰 규모의 소멸이 일어납니다." 현우는 화면을 살폈다. 숫자는 정확해 보였다. 하지만 누가 측정했는지, '기록 불일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은 없었다. "그 숫자도 당신이 만든 거죠?" "관리 시스템이 산출했습니다." "그 시스템을 누가 고쳤는데요?" 02는 대답하지 않았다. *** 가은은 책상 위 문서를 넘기며 한 장을 따로 뽑았다. '관리자 대행을 종료하려면 원본의 의사 확인과 외부 증인 세 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그 아래 조건이 있었다. '단, 최초 명령의 피해 대상은 외부 증인 자격 없음.' "하린이는 증인으로 쓸 수 없다는 뜻이네요." "정확합니다." "소은 씨도 보관된 원본이라 자격 없다고 주장하겠죠?" "정확합니다." 02의 목소리에 만족이 묻어 있었다. 상대에게 선택지를 없애 보여 주는 것이 자신의 일인 듯했다. 현우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건 대행 관리자 종료 조건이죠. 하린이를 살릴 조건은 별개 아닌가요?" "관련 절차입니다." "같다는 뜻은 아니네요." 현우가 말했다. 02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현우는 보고서를 넘겼다. 한참 뒤 페이지 맨 아래에서 전혀 다른 항목을 찾아냈다. '보호 대상은 본인이 신원 확정을 거절할 수 있으며, 그 결정은 보호 종료 사유가 될 수 없음.' "왜 이 조항은 알려 주지 않았죠?" 02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 조항은 현재 운영 방침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삭제되지 않았네요." "원본 규정은 삭제할 수 없습니다." 가은은 펜을 들었다. "그럼 저희가 그 규정을 사용할 겁니다." 02가 책상에서 일어섰다. 현우의 얼굴을 한 남자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거울 속 그림자가 현실로 나온 것 같았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윤소은 또는 민하린 한 사람을 선택하면 나머지 전원의 기록을 안정적으로 보관하겠습니다." 현우는 그가 내민 계약서를 보았다. 계약서는 한 장처럼 보였지만 안쪽에는 다른 문장이 숨어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대상의 소멸에 동의한다.' 현우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난 당신한테 사람을 고를 권한을 준 적이 없어요." 그때 휴대전화에서 경보가 울렸다. [윤소은 / 00:59:59]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어 있었다. 남자는 현우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니까 제가 대신 결정하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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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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