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람시장 서고의 종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세 번 울렸다.
첫 번째 소리에 벽의 영수증이 뒤집혔다. 두 번째 소리에 바깥 복도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졌다. 세 번째 소리에는 모든 사람이 잠깐 자기 이름을 잊었다.
이현우는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현우 씨. 이현우 씨. 지금 여기 있어요."
윤가은이었다. 그녀도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손에 든 수첩에서 현우를 여러 번 만난 기록을 찾고, 그 기록을 읽어 주고 있었다.
"저는 윤가은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소은 씨를 만났고, 당신은 편의점에서 문이 지워지는 걸 봤어요."
현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자기 이름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형사님도 위험해요."
"그러니까 서로 확인하는 거예요."
하린은 소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소은은 자기 이름을 입술로 되뇌며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나는 오늘 따뜻한 물을 마셨다. 하린이가 뚜껑을 열어 줬다."
그 작은 사실이 두 사람을 다시 붙잡았다.
***
서태경은 놋쇠 종 아래에서 기록 용지를 발견했다. '증인 호출'이라고 적힌 서류에는 응답자 이름을 쓰는 칸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검은 도장이 세 개 찍혀 있었다.
[증인 01: 응답 거절]
[증인 03: 소재 불명]
[증인 06: 응답 접수]
"06은 나였죠."
태경이 말했다. 그의 팔찌 안쪽 숫자와 일치했다.
"내 의사를 묻지 않고 응답 처리했어요."
가은은 종이를 살폈다. 작은 글씨가 난간의 그림자에 숨어 있었다.
'통지 후 거절 기회는 10분간 보장한다.'
"지금 몇 분 지났어요?"
"사 분 정도요."
"그럼 아직 거절할 수 있겠네요."
태경은 종이에 '응답하지 않음'이라고 썼다. 검은 도장 하나가 흐려졌다. 서고 저편에서 누군가 종이를 찢는 소리를 냈다.
[증인 06: 응답 철회]
현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쪽이 싫어하겠네요."
"증언은 명령이 아니니까요."
태경이 대답했다.
"내가 무슨 일을 봤는지 말할 권리도 있지만, 아직 기억나지 않는 일을 보았다고 억지로 인정하지 않을 권리도 있어요."
그는 자기 팔찌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그것이 수갑처럼 보이지 않았다.
***
가은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정했다. 첫째, 소은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둘째, 자신을 동생이라고 믿게 강요하지 않는다. 셋째, 복구된 기억이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증언을 남긴다.
"너무 느린 것 아닙니까?"
현우가 물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더 서두르면 안 돼요. 잘못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삶을 붙일 수는 없으니까."
그들은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대신 가은이 아는 작은 가족상담센터를 찾아갔다. 이곳에서는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도 자신의 이야기를 상담사에게 말할 수 있었다. 가은은 소은에게 서류를 만들기 전에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상담사는 소은이 말하는 과거를 곧바로 믿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곳에서 쉬고 싶은지, 자신을 어떻게 부르면 편한지를 먼저 물었다. 소은은 의외로 그 질문에 오래 생각했다.
"제가 고를 수 있어요?"
"네. 여기서는 본인이 말한 걸 먼저 적습니다."
"그럼 윤소은이라고 적어 주세요. 그 이름은 마음에 들어요."
가은은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소은이라는 아이와 지금 이 여자가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앞에 앉은 사람은 자기 이름을 고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 문장이 새로 태어났다.
***
현우는 기다리는 동안 하린과 센터 복도에서 얘기했다.
"넌 민하린이라는 이름이 좋아?"
하린은 공책 모서리를 쥐었다.
"왜요? 제 진짜 이름이 따로 있대요?"
"아직 몰라. 다만 네가 좋아하는 이름인지 궁금했어."
"좋아요. 처음엔 누가 붙여 줬는지 몰라서 싫었어요. 제가 없어져도 이름만 남을까 봐. 그런데 아저씨가 불러 줬잖아요. 형사 언니도, 소은 언니도. 그래서 지금은 좋아요."
현우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널 못 알아보게 되면 어떡하지?"
"그럼 다시 말할게요."
"계속?"
"네. 저도 아저씨를 매일 처음 만났으니까."
하린은 일부러 씩씩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오랜 외로움 끝에 나온 것인지 현우는 어렴풋이 느꼈다.
"아저씨도 똑같이 해 주세요. 기억이 없어도 거짓말하지 말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 주세요."
현우는 대답했다.
"그럴게."
복도 대기석에는 잡지가 여러 권 놓여 있었다. 소은은 그중 한 권을 펼쳐 첫 페이지를 넘겼다. '올해의 유행색'이라는 글자가 보이자 그녀는 한참 웃었다.
"올해가 있다는 게 신기해요."
하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역에서는 매번 오늘이 같았거든.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에 열차를 기다리고, 안내 방송도 같은 말을 했어. 달력은 바뀌는데 날씨가 안 바뀌었지. 그래서 나만 늙는 건지, 다른 사람들은 계속 같은 하루를 사는 건지 몰랐어."
하린은 잡지를 함께 들여다봤다.
"밖은 별일 없어도 계속 바뀌어요. 어제는 편의점 삼각김밥이 품절이었는데 오늘은 많았어요."
"그 정도면 큰 변화인데?"
소은이 말했다.
두 사람은 웃었다. 현우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누구도 저들에게 지금까지 겪은 일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줄 의무가 없었다. 소은은 오늘 처음 마신 커피가 쓰다고 했고, 하린은 자신이 아직 커피를 마실 나이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 사소한 구별이 두 사람에게 나름의 현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다 소은이 잡지 한 귀퉁이에 실린 여행 광고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해변 사진이었다. 여름 옷을 입은 사람들이 파도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 저기 가 보고 싶어요."
가은이 그 말을 들었다.
"어디요?"
"바다요. 내가 처음 봤던 물은 역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뿐이었거든요. 진짜 바다에 가서 파도가 무슨 소리 내는지 듣고 싶어요."
가은은 약속을 쉽게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지켜 줄 수 없는 약속일 수 있었다. 대신 물었다.
"어떤 바다가 좋아요? 사람이 많은 곳이요, 조용한 곳이요?"
소은은 얼굴을 밝히며 한참 고민했다. 그동안 누구도 그녀에게 여행의 취향을 물어보지 않았으니, 그런 질문 자체가 낯설었다.
"처음엔 조용한 곳이요. 나중엔 사람이 많은 곳도 가 보고 싶어요."
가은은 그 대답을 수첩에 적었다. 인적 사항 옆이 아니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제목 아래에.
현우는 그 페이지를 보다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누가 누구의 동생인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였지만, 소은이 직접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한 사실은 어떤 원본과 대조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
소은의 상담이 끝날 무렵, 가은의 휴대전화에 가족관계 증명서 이미지가 한 장 도착했다. 발신자는 '엄마'였다. 가은은 최근 부모와 통화하면서 어린 시절 가족사진이 왜 적은지 조심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화를 냈고, 그 뒤로 사흘 동안 아무 답도 주지 않았다.
사진에는 오래된 등본의 한 부분이 찍혀 있었다.
'자녀 2명.'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칸은 첫 번째만 선명했다. 윤가은. 두 번째는 누가 종이를 지운 듯 희었다. 그러나 서류 맨 아래에 파란 볼펜으로 누군가 '소은이 병원 예약'이라고 써 두었다.
가은은 한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건 어머니가 쓰신 글씨예요."
현우가 물었다.
"확실해요?"
"전 어머니 글씨를 수백 번 봤어요. 지금도 명절 때마다 택배 상자에 저렇게 쓰시거든요."
그녀는 여전히 소은에게 달려가 안기지 않았다. 대신 상담실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소은 씨. 혹시 제 어머니를 만나 볼 생각은 있습니까?"
소은은 눈을 크게 떴다.
"엄마가…… 저를 기억하나요?"
"아직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럼 만날래요. 기억이 안 나도 괜찮아요."
***
저녁 무렵, 어머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통화 중에 가은은 어머니가 갑자기 운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등본을 찾다가 책장 뒤에서 작은 양말 한 짝을 발견했는데, 그걸 쥐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엄마, 양말은 버리지 마세요."
"왜? 소은이 거 같아서?"
가은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엄마, 방금 무슨 이름이라고 했어요?"
"무슨 이름?"
"소은이요."
전화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니?"
가은은 눈을 감았다. 방금 생겼던 기억이 벌써 빠져나간 것이다.
"네. 하셨어요. 제가 적어 뒀어요."
***
전화를 끊자 화면에 알림이 떴다.
[윤소은 / 06:00:00]
[증인 등록 미완료]
현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예상한 속도보다 숫자가 빨리 줄었다. 누군가 남은 시간을 강제로 앞당긴 것 같았다.
동시에 하린의 숫자도 흔들렸다.
[민하린 / 22:48:10]
두 사람을 붙잡아 두려는 증언이 쌓일수록 시스템은 오히려 시계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가은의 수첩 뒷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윤 형사. 둘 중 한 사람만 구하고 싶으면 원본 관리자에게 와라.'
서명은 없었다.
대신 종이 아래에 인쇄된 작은 숫자가 있었다.
02.
제1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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