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접수대의 전광판에는 환자의 이름이 정상적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기이했다. 종이에 적힌 이름은 멀쩡한데, 그 이름을 불러야 할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든두 살의 유말순은 병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녀 다영이 사 온 감귤은 옆 탁자에 놓여 있었고, 말순의 손에는 손녀가 초등학생 때 그린 가족 그림이 들려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기억하세요?” 다영이 물었다.
“잘 그렸네.”
“할머니, 제가 그렸잖아요.”
말순은 미안한 듯 웃었다. “아는 사람 같은데,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서.”
의사는 갑작스러운 혼돈 상태와 약물 영향을 먼저 확인하고 있었다. 다영은 울먹이면서도 그런 점검을 거부하지 않았다. 현우 역시 병이 아니라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접수 기록에 같은 시각, 이상한 수정 요청이 찍혀 있었다.
'가족 관계 참조 원본: 이전 보호 신청서. 검증 불가. 임시 해제.'
다영의 어머니는 십 년 전 재난 때 신원 확인을 받으며 말순의 보호자로 등록돼 있었다. 이후 주소와 가족 관계는 정상으로 정리됐지만, 전산망 안에는 당시 임시 신청서가 남아 있었다. 그 하나를 거슬러 올라가자 손녀의 방문 권한까지 보류된 것이다.
“서류가 꼬인 건 이해하겠어요.” 다영이 말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왜 저를 모르는 거죠?”
“지금은 따로 봐야 해요.” 가은이 조용히 대답했다. “의료진이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록의 변화를 살펴볼게요.”
다영은 휴대전화에서 지난해 여름의 영상을 틀었다. 말순이 시장에서 다영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장면이었다. 휴대전화 속 목소리는 분명 '다영아'라고 외치고 있었다. 말순도 그 영상을 한참 들여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저 아이를 좋아했네.”
“저예요, 할머니.”
“그런데 왜 자꾸 얼굴이 낯설까.”
현우는 병실 출입문을 나섰다. 말순의 머리 위에는 붉은 글씨가 없었다. 다영의 이름도 정상적인 검은 글씨로만 보였다. 위험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의 능력이 알려 주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여은이 복도 끝 자판기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못 봤어요. 아무 숫자도.”
“그럼 이건 다른 현상일까요?”
“그럴 수 있죠. 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고요.”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같은 장소를 보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현우에게는 그 무지가 묘한 안심이 되었다. 자신에게 보이는 글씨가 세상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었으므로.
주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국 단위 전산망 문제가 아니라 열두 지역에서만 공통으로 쓰는 오래된 '재난 관계 복원 규칙'이 야간 배포된 것이 확인됐다고 했다. 사용하지 않던 보조 프로그램이 켜지면서 과거의 임시 기록을 현재보다 먼저 참조하고 있었다.
“배포를 되돌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린이 물었다.
“그게 보통 방법이죠. 그런데 이 규칙은 각 지역의 옛 기록을 기준으로 서로 확인을 요구합니다. 하나만 되돌리면 그 지역이 다른 열한 곳에서 잘못된 데이터로 취급될 수 있어요.”
말순의 담당 사회복지사는 접수 권한이 막혀도 손녀가 병실에 머물 수 있도록 임시 면회를 허용했다. 가족 그림과 신분증, 오래된 주민센터 기록을 함께 확인하고 방문 사실을 수기로 남겼다. 이름이 흔들릴 때 누군가 손으로 쓴 기록 하나가 사람을 붙잡았다.
다영은 할머니 옆에 앉아 감귤 껍질을 벗겼다.
“이건 기억하세요? 제가 까면 꼭 반쪽 주셨잖아요.”
말순은 조용히 감귤 한 조각을 받았다. 한참 뒤 그녀가 손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영은 울음을 터뜨렸지만 의사는 아직 상태를 관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복처럼 보이는 순간과 완전한 회복은 달랐다.
병원을 나서는 길, 현우의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관찰자 연결: 3 / 12]
여은은 같은 글씨를 보지 못했다. 대신 지하 주차장 기둥 곁에 선 낯선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혹시 이현우 씨입니까?”
여자는 손바닥을 펼쳤다. 아까 병실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감귤 껍질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지금 제 눈에도 빨간 이름이 보입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사람이 없었다. 빈 휠체어 한 대만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었다.
제18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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