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띠는 두 개였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의 주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가은은 상자 발견 장소부터 봉인 상태까지 기록했다. 시설팀은 벽체 안에 침수 흔적이 있는지 살폈고, 주영은 띠에 찍힌 인쇄 방식이 당시 대피소에서 쓰던 것과 같은지 비교할 자료를 모았다. 현우는 말없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자꾸 그에게 물었다. 두 번째 띠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으냐고. 그의 답은 늘 같았다.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대답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여은은 공식 확인 절차에 입회하기로 했다. 다만 현재 사용하는 이름과 연락처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는 조건을 문서로 남겼다. 서명란에는 자신의 손으로 ‘장여은’이라고 적었다. 서유림은 증언 속 과거 이름으로만 표시했다.
그날 비공개 심사실에는 현우, 가은, 주영, 여은이 참석했다. 한예린은 가족이 보관한 자료에 관한 질문에만 영상으로 답하기로 했다. 백도윤의 행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확정’이라는 표현을 유지했다.
가은은 첫 번째 문장을 읽었다.
“스무 해 전 서유림은 이현우라는 이름이 붉게 보였다고 진술했다. 현우는 같은 현상을 현재 경험한다고 말하지만, 이 현상의 원인은 검증되지 않았다.”
여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에는 그녀가 본 것과 확인되지 않은 것이 함께 구분돼 있었다.
“그때 왜 현우를 처음 적으셨습니까?” 심사 담당자가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비를 피하려고 몸을 숙이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문을 보고 있었어요. 이름이 붉게 보였고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그 아이가 저를 보고 먼저 물었어요.”
“뭐라고요?”
여은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도 보여요?’ 하고요.”
현우는 문득 젖은 신발의 감각을 떠올렸다. 한 손에 들린 작은 손전등, 빗물에 번진 종이, 반쯤 열린 문의 어둠. 그것이 실제 기억인지 들은 이야기들의 조합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질문을 알고 있었다.
“그때 저는 누구를 가리켰나요?”
“문 안에 있던 사람이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몰랐어요. 얼굴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다만 그쪽으로 누군가 손을 내밀고 있었어요.”
현우는 두 번째 손목띠를 떠올렸다. 띠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 빈칸을 누군가의 이름으로 채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물었다.
“그때 왜 제 이름을 적었어요? 문 안의 사람이 아니라.”
여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공책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현우라는 이름 옆에 쓰인 첫 문장은 붉은색도, 숫자도 아니었다.
‘저 아이는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 안에 남았다고 말한다.’
“이름이 붉게 보이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려 했던 건 다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할 때, 당신만 계속 안에 누군가 남았다고 말했거든요.”
심사실 밖에서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여은의 예전 이름을 알아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가은은 서류에 적힌 비공개 원칙을 확인하고, 공식 발표에는 실명과 거주지가 아니라 기록 처리의 문제만 담았다.
오후 다섯 시. 주영은 운영 02의 자동 공개 예약이 완전히 취소됐다는 공문을 받았다. 문서에는 더 이상 두 번째 관찰자를 강제로 지정하지 않겠다는 임시 조치도 포함돼 있었다. 여은의 일상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최소한 오늘 밤 이름이 마음대로 공개되지는 않게 됐다.
현우는 여은과 함께 제본소로 돌아왔다. 낡은 책의 표지를 붙이던 청소년들이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은은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한쪽에 종이를 쌓아 놓고 오늘은 자기 이름을 적어도 되고 적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현우는 작업대에서 빈 종이를 한 장 받아 들었다.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였다. 유리창에 가늘게 선이 그어졌다.
여은이 문을 닫으러 가는 동안, 현우의 시야에서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이현우 / 보호 관찰 종료 예정]
그 아래에는 숫자가 없었다. 대신 새로운 문장이 있었다.
[열두 지역 최종 동기화 / 72:00:00]
현우는 숨을 멈췄다. 자신의 이름은 또다시 위험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의 실종 예정 시간을 보는 느낌과 달랐다. 이름 아래에 찍힌 것은 개인이 아니라 열두 지역을 가리키는 문구였다.
현우가 가은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여은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낯설게 흔들렸다.
“왜 그래요?” 현우가 물었다.
여은은 곧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현우의 머리 위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잊으려고 했던 글씨가 다시 떠오른 것처럼.
“저도 보여요.”
현우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뭐가요?”
“당신 이름. 그리고 시간.”
그녀는 현우가 말하지 않은 숫자를 한 자리씩 읽었다.
“일흔한 시간, 오십구 분, 오십칠 초.”
현우는 손목시계를 봤다. 그 숫자는 조금 전 자신에게만 보였던 숫자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그의 눈에 보이는 시간을 독립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은은 더욱 놀라운 말을 했다.
“스무 해 전에도 그랬어요. 다른 사람의 이름은 희미했는데, 당신 이름만 꼭 지금처럼 선명했어요.”
현우는 통화가 연결되자 가은에게 서둘러 말했다.
“관찰자가 둘이 됐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제가 본 것을 다른 사람도 보고 있어요.”
여은은 작업대 위에 새 공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과거 이름이 아닌 현재 이름을 직접 적었다.
‘장여은. 오늘 오후 여섯 시 무렵, 이현우의 붉은 이름과 72시간 표시를 보았다고 진술함. 원인 미확정.’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을 덧붙였다.
‘아직 남은 사람을 찾을 것.’
제본소 한쪽에 있던 팩스기에서 짧은 기계음이 났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발신자 표시가 없는 용지가 천천히 밀려 나왔다. 위쪽에 ‘운영 02’가 찍혀 있었다.
‘12개 지역 동기화 시작. 원본 증인 정보 소거 전 최종 확인.’
현우는 그 문서를 자신의 수락으로 바꾸지 않았다. 가은에게 팩스 원본 사진을 전송하고, 여은에게도 자신이 지금 보는 글씨와 종이에 찍힌 문장을 별도로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부터 일흔두 시간.
그들이 찾아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스무 해 전 문 안에 남아 있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아직 남았다고 알렸던 마지막 한 번의 두드림이었다.
제18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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