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에는 우체국 소인이 없었다.
여은은 그것부터 알아보았다. 배달원이 아니라 제본소를 드나들던 거래처 직원이 가져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녀는 봉투를 열기 전에 앞뒤를 촬영했다. 현우도 서둘러 손을 뻗지 않았다.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니라 여은에게 온 편지였다.
안에는 오래된 대피소 명단 사본과 최근 출력한 공지문이 들어 있었다.
‘미확정 증인 실명 공개. 48시간 후.’
봉투의 가장자리에는 압착된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전에 같은 종이에 다른 문서를 인쇄했던 흔적 같았다. 여은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문장보다, 누가 자신이 이 장소에 산다는 사실을 알아냈는지가 더 두려웠다. 제본소 주소는 간판에 적혀 있었지만, 서유림과 장여은이 같은 사람이라는 연결은 공개한 적이 없었다.
“이걸 보내려면 나를 먼저 찾아야 했겠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신고와 보존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가은은 접힌 가장자리까지 사진에 담았다. “누군가 겁을 주기 위해 알고 있는 정보를 사용한 것일 수 있어요.”
문서 아래에는 관리자 번호 02가 표시돼 있었고, 증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확정 신원으로 분류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여은은 마지막 문장을 오래 읽었다.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어요. 대답하지 않으면, 대신 대답한 것으로 처리했죠.”
가은은 문서를 받아 검토했다.
“이건 정식 행정 통지 형식이 아닙니다. 발신 기관과 이의 절차, 담당자 연락처가 없어요. 협박이거나 위장된 알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공개가 확정됐다고 믿지 마세요.”
주영은 봉투 안에 있는 인쇄 코드가 예전 시스템의 시험 양식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운영 02라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해서 시스템 전체가 자동으로 문서를 보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오래된 양식을 복사해서 위협에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디로 공개한다는 겁니까?” 현우가 물었다.
“주소가 없어요.” 여은은 종이를 접었다. “그게 무서운 겁니다. 어느 날 내가 쓰지 않는 이름으로 누가 찾아올지 모르니까.”
제본소의 청소년반 수업은 오후 여섯 시에 시작됐다. 여은은 학생들에게 외부인의 방문을 설명하지 않고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표지를 고르고 두꺼운 종이를 접으며 떠들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책에서 이름을 바꾸면 내용도 바뀌어요?”
여은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표지에는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지. 그렇다고 안에 쓴 이야기가 지워지는 건 아니야.”
현우는 창고 쪽에서 그 말을 들었다. 자신이 찾고 있는 첫 번째 관찰자는 특별한 능력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선생님이었고 평범한 수요일 저녁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가은에게 연락이 왔다. 기록관이 운영 02의 시험 보관소에서 등록 대기 작업 하나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작업 이름은 ‘관찰자 연결 정보 공개 사전 검증’. 아직 외부에 공개된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48시간 후 자동 처리를 예약해 둔 흔적은 실제로 있었다.
“예약을 한 사람은요?” 현우가 물었다.
“관리자 계정 하나로는 모릅니다. 접근 경로와 승인 근거를 찾아야 해요.” 가은이 말했다. “이번에는 현우 씨가 직접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만나도 될까요?”
여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선택할 시간이었다. 현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잠시 뒤 여은이 자기 의자 옆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스무 해 전부터 그녀가 따로 보관해 온 종이들이었다. 맨 위에는 대피소의 방 구조가 어린아이의 필체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실명 공개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누가 내 말을 가로채서 다른 아이의 대답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실은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녀는 서류 한 장을 직접 썼다.
‘진술 보존에는 동의. 실명 대외 공개에는 동의하지 않음.’
현우는 그 문장이 이상할 만큼 단단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켜 준다는 것은, 이름을 세상에 외치는 일과 같지 않았다.
서류가 완성된 순간 제본소의 오래된 팩스기가 움직였다. 용지가 한 장 밀려 나왔다. 발신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원본 관찰자 진술을 접수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관찰자를 제출하십시오.’
여은은 현우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요? 그날은 나 말고도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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