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린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울지 않았다.
그녀는 녹음을 끝까지 들은 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분명히 알아듣는 말이었지만, 기억 속의 아버지와 연결할 수 있는 음색은 남아 있지 않았다. 스무 해 전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세 살이었다.
“제가 듣고 싶다고 해서 들은 거예요.” 예린이 말했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은은 녹음의 수집 경로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을 설명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재생을 멈췄다.
'예린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처리하지 마세요.'
“엄마가 왜 아빠 얘기를 거의 안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아빠를 잊어서가 아니라, 제 이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어머니 뜻을 저희가 대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린은 얕게 웃었다. “알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날 그녀는 어머니가 남긴 작은 재봉 상자를 가져왔다. 안쪽 천이 뜯겨 있었는데, 최근 보관 자료를 정리하다가 그 틈에서 얇은 종이띠를 발견했다고 했다. 종이에는 바느질 구멍이 남아 있었고, 글씨가 여러 번 접혀 일부는 닳아 있었다.
'백조등대 야간 구조일지. 열람 요청자 확인. 연락하지 말 것.'
종이 반대편에는 세 자리 숫자가 적혀 있었다. 현우는 남쪽 센터에서 발견한 세 개의 홈을 떠올렸다. 그 숫자는 상자를 여는 암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영은 먼저 종이가 원래 어느 자료에 붙어 있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걸 모두 공개하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예린이 물었다.
“공개 범위를 넓힐수록 찾는 사람도 늘 수 있지만, 원치 않는 사람이 가족의 정보를 사용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가은이 답했다. “어떤 부분까지 공개할지는 예린 씨가 정하셔야 해요.”
예린은 상자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창밖으로 아파트 놀이터가 보였다. 그네를 타던 아이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럼 제가 먼저 할 일이 있네요. 아버지의 이름은 조사에 사용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엄마 일기와 제 어릴 적 주소는 공개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원하는 건 아버지를 찾는 거지, 우리 집을 구경시키는 게 아니에요.”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 한 문장 때문에 사건은 느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너무 많은 사람을 빠르게 구하려다가 이름보다 먼저 사람을 잃을 뻔했다.
백조등대는 서람시에서 차로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해안에 있었다. 가은은 현지 구조대와 연락해 과거 일지의 보관 여부를 확인했다. 등대는 무인화됐지만 옆의 구조창고는 아직 운영 중이었다. 거기에는 당시 교대 근무를 했던 기록원 정혜옥이 간헐적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전화 너머의 정혜옥은 백도윤이라는 이름을 듣자 침묵했다.
“백 선생님을 아십니까?” 가은이 물었다.
“그분이 여기 왔던 날은 알아요. 폭풍 때문에 배들이 묶였죠.”
“언제입니까?”
“실종 신고가 접수된 다음 날이에요. 날짜는 일지에 있습니다.”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백도윤 / 10:12:38]
이십 년간 사라진 줄 알았던 사람이 실종 신고 다음 날 다른 장소에 있었다면, 그가 처음부터 죽었다는 전제도 다시 살펴야 했다. 하지만 정혜옥의 기억만으로 생존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가은은 서동재의 수첩에 있던 통신함 번호 BK-031을 확인하러 갔다. 구조창고의 과거 장비 목록에도 같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남쪽 보관소의 철제 상자와 등대의 일지는 하나의 이동 경로로 이어져 있었다.
예린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잠긴 재봉 상자를 다시 열어 어머니가 사용하던 굵은 바늘을 발견했다고 했다. 바늘 손잡이에는 조그맣게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B.D.Y.'
“아빠 물건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바늘 안이 비어 있어요. 안에서 종이가 나옵니다.”
예린이 조심스레 펼친 것은 한 줄뿐인 쪽지였다.
'내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네가 아는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믿지 마라.'
현우는 갑자기 자신이 본 모든 붉은 숫자가 부끄러워졌다. 확인해야 할 것은 눈앞의 이름뿐 아니라,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누군가의 의도였다.
제16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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