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라는 무대에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살아왔다.
칠십을 바라보는 그녀는 서람시 외곽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지냈다. 현관 옆 진열장에는 오래된 라디오 드라마 대본들이 꽂혀 있었고, 부엌 창가에는 끝이 무뎌진 연필이 컵에 가득했다. 가은이 방문 이유를 설명하자 소라는 방문객의 신발부터 정리했다.
“그 사건 얘기하러 왔군요.”
“북하 방송국 시험 원고를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읽었습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장면과 그때 녹음된 장면이 같다고 장담하진 못해요.”
그녀가 꺼낸 대본 표지에는 '비상방송 시범 3차'라고 적혀 있었다. 무전 대본의 문장은 간단했다. '대피 안내를 받은 분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확인을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연필로 그어진 선이 중간에 있었다.
“왜 그었습니까?” 채림이 물었다.
“백도윤 씨가 바꿔 달라고 했어요. 이름을 말하기 전에 묻는 말을 넣으라고.”
소라는 밑줄 친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당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습니까? 없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린의 얼굴이 달라졌다. 자기 이름을 고를 수 없던 시절의 기억이 그 한 줄에 걸려 있었다.
“왜 그런 문장이 필요했을까요?” 가은이 물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시끄러운 곳에서 남의 질문에 습관처럼 대답하는 걸 무서워했어요. 이름이 잘못 들리면 그 뒤 절차가 모두 잘못된다고.”
소라는 컵에서 연필 하나를 꺼내 식탁에 눕혔다. “사고가 나던 밤, 저는 한 문장을 더 읽으라는 전화를 받았죠. '미응답자는 자동 보호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그 문장에 도윤 씨가 몹시 화를 냈어요. 나는 그가 화내는 걸 처음 봤습니다.”
“누가 전화했습니까?”
“운영실이라고 했습니다. 성함은 못 들었어요.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는데, 마치 녹음을 재생하는 사람 같았죠.”
가은은 그 문장을 원본 대본과 구분하여 기록했다. 소라가 기억하는 사실이고, 발신자의 정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백도윤 씨가 사라지기 전날엔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현우가 물었다.
소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대본 가장 뒷장을 펼쳤다.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붉은 이름을 처음 보았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도윤 씨는 제게 질문을 했어요. 자기가 본 것이 실제로 보이는 건지,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를 눈으로 본다고 착각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그러면서도 자기 눈앞에는 분명히 시계가 있다고 했죠.”
“72시간?”
“그 숫자까지 말했어요.”
현우는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소라는 그의 표정을 보고 차를 밀어 놓았다.
“젊은 사람. 나를 찾아온 건 답을 얻으려는 거겠죠. 하지만 나는 남의 목소리로 답해 주는 직업을 오래 했어요. 그래서 알아요. 목소리가 비슷하다고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때 채림이 가져온 복원 파일을 틀었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 뒤에 남자가 '이 아이는 아홉 번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짧은 구간이었다. 소라는 두 번 들었다.
“도윤 씨 목소리 같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높낮이는 비슷해요. 그러나 마지막 '다'를 내리는 습관이 달라요. 무슨 말을 했는지는 분명하지만, 이게 본인의 목소리인지 단정하면 안 됩니다.”
이어 다른 파일을 재생하자 소라의 손이 멈췄다. 비상 방송 시험 원고의 끝에, 방송에는 송출되지 않았던 짧은 대사가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은 누가 지켜 줍니까?'
“이건 제가 읽었어요.” 소라가 말했다. “그런데 원고엔 없었어요. 당시 누군가 헤드폰 너머로 한 글자씩 불러 줬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 목소리라면 기억해요. 이상할 만큼 어린 목소리였거든요.”
하린이 눈을 들었다. “어린아이였다고요?”
“그렇게 들렸다는 거예요.” 소라는 선을 그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어린아이 하나가 스튜디오 밖에 서 있었어요.”
소라는 작은 사진을 꺼냈다. 방송국 복도에서 무대 장비를 옮기던 직원들 사이에 손에 종이를 쥔 아이가 있었다. 사진이 흐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허벅지 뒤쪽의 오래된 상처가 당기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물었지요. 이름이 뭐냐고.”
“대답했습니까?”
“고개만 저었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소라가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따라 했다.
'이름을 말하면, 저 사람은 사라져요.'
그 순간 현우의 시야에서 소라의 대본 표지가 붉게 흔들렸다. 사람의 이름도 숫자도 아니었다.
[전달되지 않은 원고 / 53:02:17]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백도윤의 숫자와 대본에 나타난 숫자가 정확히 같았다. 사라질 예정인 것은 하나가 아니라, 같은 시간에 묶인 여러 개의 기록일 수 있었다.
제16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