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15화
PAYLUA ORIGINAL · 제15화

15화. 동의서의 뒷면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4,559자

오프라인 책장
"이십 년 전인데 저와 똑같이 생긴 어른이 있었다고요?" 이현우는 소은에게 신청서를 다시 보여 주었다. 종이 가장자리는 젖었지만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날짜와 내용은 처음부터 오래된 것이었다. 반면 마지막 서명은 방금 한 것처럼 선명했다. "정말 저였습니까?" 소은은 확답하지 않았다. "얼굴은 같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아저씨처럼 눈을 맞추지 않았어요. 항상 제가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뒤를 봤어요." 현우는 자기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골목 끝에서는 지워지는 벽이 아스팔트까지 번져 오고 있었다. 소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 사람은 제가 다른 사람을 기억할 때마다 화를 냈어요. 이름을 지우는 게 모두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했거든요." 윤가은이 물었다. "그 어른은 무엇을 입고 있었습니까?" "회색 옷. 그런데 다른 직원들하고 달랐어요. 이름표가 있었어요." "뭐라고 쓰여 있었죠?" "종이처럼 자꾸 바뀌어서 못 읽었어요." 가은은 수첩에 적었다. '현우와 같은 얼굴을 가진 성인, 회색 제복, 변하는 이름표.' 그것은 현우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도, 범인이라는 증거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모르는 사람이 얼굴을 빌려 썼을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 골목이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그들은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는 서람시장의 좁은 서고였다. 며칠 전 시장에서 보았던 노파가 낡은 영수증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은을 보자 손에서 실타래를 떨어뜨렸다. "너는 돌아오면 안 되는 아이였는데." 가은이 표정을 굳혔다. "그 말, 본인이 원해서 안 돌아와야 했다는 뜻입니까?" 노파는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돌아오면 다치는 아이였다는 뜻이지." 소은은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저를 알아요?" "전에 네가 내게 귤을 줬어. 어디서 구한 귤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네 이름을 세 번이나 잊고도 말이야." 소은은 웃지 못했다. 그 대신 주머니에서 낡은 사탕 포장지를 꺼냈다. "그럼 아줌마도 나한테 사탕 줬어요. 매번 처음 보는 사람처럼." 노파가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것은 별것 없는 간식이었다. 그러나 그 간식들이 누군가의 생활을 간신히 이어 왔다는 사실이 방 안을 조용하게 했다. *** 관리자 변경 신청서를 접수하려면 원본 기록 관리대장이 필요했다. 노파는 영수증 서랍 바닥을 뜯어 낡은 서류철을 꺼냈다. 서류철 표지에는 '첫 번째 교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삭제라고 써 있지 않네요." 현우가 말했다. "옛날엔 삭제가 아니었어. 교정이었지. 잘못 적힌 정보를 바로잡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사람을 지우게 됐어요?" "처음에는 세상에서 이미 잊힌 사람을 다시 찾아 주려고 만든 장부였어. 누군가 실종되면 남겨진 기억과 물건과 증언을 모아 길을 만드는 거였지. 그런데 사람을 되돌리는 일에는 늘 불일치가 생겨.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다고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을 이미 잊었거든." 노파는 서류철을 넘겼다. "위에서는 그 불일치가 번지는 걸 막으려 했어. 남겨야 할 기록 하나를 고르라고 했지. 그리고 나머지는 오류라고 불렀어." "오류가 사람이라도요?" "그래. 그때부터 이곳은 복원하는 곳이 아니라 없애는 곳이 된 거야." 서류철 안에 있던 문서들은 표면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현우가 하나를 펼쳤다. [보호 대상 07] [가등록 이름: 민하린] [원본 상태: 등록 불가] [조치: 기억 단절 후 분리 보호] 그 아래 '삭제'라는 단어 위에 굵은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빈칸에 새로운 단어가 덧씌워져 있었다. [최종 조치: 삭제] 필적이 달랐다. 현우는 두 단어를 오래 바라봤다. 자신이 하린을 지우려 했다는 기록은 처음부터 어떤 문서의 최종 문장만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일 수 있었다. "이거 누가 고쳤습니까?" 노파는 말없이 마지막 장을 펼쳤다. [검토 책임자: 02] [신원: 원본 관리자 대행] [처리 방침: 기록의 완전성 우선] "책임자 02가 누군지 알아요?" "얼굴은 알아. 이름은 몰라. 언제나 지금 관리자랑 같은 얼굴이었거든." 현우는 말문이 막혔다. 소은이 말한 어른과 같은 사람이었다. *** 그날 오후, 박정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우는 처음에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번호를 정식으로 교환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님은 어떠세요?" "오늘 아침에 제 이름을 한 번 불렀습니다." 정호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아빠라고는 안 했어요. 하지만 제가 언제 케이크를 가져올 수 있는지 물었어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잘됐네요."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아침에 아이랑 찍은 사진을 보니까 제 얼굴만 다시 희미해져 있더군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이 먼저요." 현우는 노파를 돌아봤다. 그녀도 통화 내용을 들은 듯 서류철을 닫았다. "사람을 돌려보내고 끝난 게 아니었네요." 현우가 말했다. "기록을 지우는 쪽이 계속 다시 시도하고 있어요." 가은이 휴대전화를 받아 정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따님에게 억지로 과거를 설명하지 마세요. 오늘 같이 한 일만 하나씩 적어 두세요. 본인이 동의한 만큼만요. 저희가 확인할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가은은 현우에게 물었다. "우리가 백스물여덟 명을 구했다고 했죠. 정말 구한 겁니까?" "시간은 벌었어요." "맞아요. 시간을 번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시간이 지나도 남을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 말이 현우의 마음에 박혔다. '기억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삶을 돌려줄 수 없었다. 살아서 밥을 먹고, 일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날들이 필요했다. 가은은 박정호의 통화 내용을 수첩에 적으면서 한 가지를 발견했다. 처음 박정호가 돌아왔을 때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스스로 질문하고, 정호가 대답하고, 새로운 약속을 만든 뒤부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났다. 시스템이 만들어 낸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으로 생긴 변화였다. "이걸 쓸모 있는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요?" 가은이 노파에게 물었다. "관계라는 말은 도구가 아니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친한 척하면 금방 어긋나."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를 처음 만난 순간도 관계의 시작이잖아요. 그 사실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거죠." 노파는 진열장 아래에서 오래된 카드들을 꺼냈다. 물건을 맡길 때 받은 접수증이었다. 위쪽에는 이름과 날짜가, 아래에는 물건을 맡긴 이유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만든 코트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다시 돌아오면 찾으려고', '전하지 못한 편지를 보관하려고'. 누군가의 이야기와 마음이 짧은 문장 안에 남아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로 사람을 찾았어. 남겨 둔 물건이 어디서 왔는지 묻다 보면 아는 사람이 한 명씩 생겼지." "이 접수증들도 변할 수 있나요?" "물론이지. 하지만 물건을 맡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누군가 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어. 그걸 물어보기 위해 반환 창구를 만든 거야." 현우는 종이 한 장을 들었다. 이름은 흐려져 있었지만 '비 오는 날 받은 작은 우산'이라는 설명만은 남아 있었다. 그는 하린의 빨간 우산을 떠올렸다. 우산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던 아이가 누군가에게서 받았거나 누군가에게 건넨 물건이었다. "그날 어린 제가 하린이를 잊게 해 달라고 한 건, 나중에 다시 물어보기 위한 시간 벌기였을까요?" "그럴 수 있지." 노파가 답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도 아이에게 그런 결정을 시키면 안 됐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현우는 노파의 말을 가슴에 남겼다. 자신이 좋은 마음으로 했던 일이더라도 반드시 옳았던 것은 아닐 수 있었다. 다만 누군가 그 선택을 '완전 폐기'라는 문장으로 바꿔 이용했다면, 그 책임까지 어린아이에게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답이 면죄부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 노파는 서류철 맨 뒤에서 투명한 비닐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두 장의 서류가 겹쳐 있었다. 어린 현우가 삐뚤빼뚤 쓴 한 장과, 성인 남성이 반듯하게 작성한 한 장이었다.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린이를 잊게 해 주세요. 그러면 다들 하린이를 못 찾아올 거예요. 내가 꼭 다시 데리러 올게요.' 두 번째 문장은 달랐다. '민하린에 대한 모든 인적 기록을 완전 폐기한다. 신청인 이현우.' 내용은 달랐고, 글씨도 달랐다. 그러나 시스템에는 두 문서가 하나의 원본으로 등록돼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현우가 중얼거렸다. 그때 하린이 첫 장을 손끝으로 만졌다. "이것만은 기억나요." "뭐가?" "그날 아저씨가 정말 울었어요. 누가 저를 데려가려고 해서." 소녀는 두 번째 장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있었다. '보호 명령은 20년 경과 시 자동 종료. 종료 후 보호 대상은 원본에 귀속됨.' 현우가 날짜를 계산했다. 이십 년이 끝나는 날은 이틀 뒤였다. 그런데 바로 아래, 인쇄되지 않은 손글씨 한 줄이 나타났다. '대행 관리자 02에게 원본 복구 권한을 부여함.' 서명란의 이름은 이현우였다. 하지만 이번 서명은 단정한 어른의 글씨였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5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