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젖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운동화 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손에 든 투명 우산은 한쪽 살이 부러져 있었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는 희끗한 먼지가 묻어 있었다. 평범한 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발뒤꿈치 너머에는 지하철 승강장이 펼쳐져 있었다. 폐교 운동장과 이어질 수 없는 장소였다.
[윤소은 / 31:10:48]
이현우가 숫자를 읽었다. 민하린의 시간보다 더 짧았다.
윤가은은 교문으로 뛰어갈 듯하다가 멈췄다. 낯선 여자에게 다짜고짜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가은은 숨을 고르고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여자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윤소은이요. 그런데 누가 시켜서 나온 건 아니에요."
"누가 시킨다고 생각했습니까?"
"그 안에서 자꾸 누가 부르거든요. 언니가 기다린다고."
가은의 목이 잠겼다. 그녀는 자신이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소녀의 생일 케이크가 떠오르는 대신,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아 있던 빈 사진첩만 떠올랐다.
"제가 당신 언니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소은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우산을 접었다.
"없어요. 저도 언니 얼굴을 모르거든요."
그 대답이 가은의 마음을 오히려 붙잡았다. 만약 시스템이 억지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면, 원하는 답을 이렇게 쉽게 거절할까.
"그럼 우선 여기서 나와 주세요."
가은이 손을 내밀었다.
소은이 한 걸음 옮기자 운동장에 놓인 책상들이 동시에 삐걱거렸다. 지하 승강장에 노란 안전선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이 교문 기둥을 지나려는 순간 검은 선 하나가 허공에 그어졌다.
[미반환 원본의 출구 통과 제한]
여자가 넘어질 듯 휘청였다. 현우가 달려가 팔을 받쳤지만 손끝에 잠깐 얼음 같은 감촉이 스쳤다.
"안 돼요!"
하린이 외쳤다.
"문이 아니라 사람을 잡아당기는 거예요."
***
정연실은 교문 안으로 서둘러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이 쓰던 줄넘기 상자를 열어 빨간 줄을 하나 꺼냈다. 운동장 흙 위에 줄을 곧게 펴서 놓고, 양쪽 끝을 현우와 가은에게 잡게 했다.
"다리로 생각해요. 아이가 혼자 뛰어넘지 않게 손잡고 건너게 하던 놀이를 기억하죠?"
"줄넘기로 무슨 일을 하려는 겁니까?"
가은이 물었다.
"문은 물건이 지나가면 통과로 판단해요. 사람을 사람과 연결된 존재로 등록해야 합니다. 그럼 혼자 들어가거나 나간 게 아니게 되죠."
"그런 규칙을 누가 만들었죠?"
연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그 사람 얼굴은 몰라요. 다만 예전에는 보호 규칙이었어요.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은 아이를 혼자 돌려보내지 말라는."
태경이 자기 종이 팔찌를 뜯으려는 시늉을 했다.
"관계 기록이 필요한 거군요. 그럼 과거에 가족이었다는 걸 증명하려 하지 말고 지금 서로 만났다는 걸 적읍시다."
가은은 수첩을 펼쳤다.
'오늘 나는 교문 앞에서 윤소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을 만났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지만, 위험에 처한 것을 확인했다. 나는 그녀를 혼자 두지 않기로 선택했다.'
현우도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썼다. 하린은 작은 별을 그리고 '교문에서 우산을 접어 준 사람'이라고 적었다. 셋이 종이를 줄에 묶자 검은 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소은의 신발이 운동장 흙을 다시 밟았다.
그녀가 넘어오자 승강장 쪽에서 열차가 들어오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학교 문은 쾅 닫혔다. 줄에 묶은 세 장의 종이 가운데 현우가 쓴 것만 검게 그을렸다.
[증인 자격 이의 제기: 이현우]
현우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쓴 글씨를 다시 지운 것이다. 가은의 수첩과 하린의 별 그림은 남아 있었다.
"왜 제 것만요?"
정연실이 대답했다.
"관리자 계정으로 등록된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어요. 관리자가 자기가 한 일을 확인하는 건 자기 말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라서."
가은은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관리자 신분 자체가 현우 씨를 불리하게 만드는 셈이네요."
"그렇죠."
"그 신분을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요?"
연실은 잠깐 침묵했다.
"원하지 않았던 사람도 많았어요."
운동장으로 돌아오는 동안 현우는 자꾸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 했다. 초등학교 때 누가 짝이었는지, 졸업 앨범을 어디 두었는지, 처음 받은 생일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평범한 질문들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 살의 어느 가을 한 달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일기장에 빈 페이지가 한 장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누군가 책에서 장을 뜯어 내고 다시 제본한 것처럼 앞뒤 문장이 너무 매끄럽게 이어졌다.
"사람이 기억을 잃었는지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현우가 물었다.
가은은 학교 담장의 오래된 공고문을 보고 있었다. 일부만 남은 졸업생 모집 공고가 이상하게도 거울에 비친 듯 뒤집혀 있었다.
"가능하겠죠. 사람은 원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으니까. 중요한 건 그 빈칸에 어떤 이야기를 멋대로 써 넣지 않는 거예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 02가 남긴 설명만으로 자신을 범인이라 부르는 일이, 바로 그 빈칸을 남의 글씨로 채우는 일이었다.
소은은 두 사람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그녀가 걷다가 가끔 멈추는 것을 하린이 먼저 알아챘다. 소은의 발밑 그림자는 걸을 때마다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역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라 몸이 아직 바깥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언니, 힘들면 쉬어도 돼요."
하린이 말했다.
"좋아. 그런데 사람들이 기다리는 길에서도 쉬어도 되나?"
"그럼요. 지금은 급히 타야 하는 열차가 없잖아요."
소은은 길가 벤치에 앉았다. 한참 뒤에야 자신이 가방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는 걸 알아챘다. 지갑도, 신분증도,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가은은 근처 가게에서 물건을 사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소은은 벤치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다.
"열네 줄이에요."
"뭐가요?"
"이쪽 나무 무늬요. 기차역에는 이런 의자가 없어요. 오늘 처음 본 거라 기억해 두고 싶었어요."
가은은 계산한 물건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물 한 병, 얇은 양말, 작은 손수건. 소은이 봉투를 받아 들고 한동안 안쪽을 들여다봤다.
"다 저한테 주는 거예요?"
"필요한 게 다른 거면 말해 주세요."
"아뇨. 이거면 돼요. 아무도 저한테 필요한 걸 물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가 양말을 꺼내자 손수건 사이에 종이 영수증이 끼어 있었다. 가은은 실수로 넣은 것이라며 빼려다가 멈췄다.
"가지고 있어요. 오늘 이 물건을 산 사실이 기록돼 있잖아요."
소은은 영수증을 다른 보물처럼 접어 손수건 속에 넣었다.
***
소은은 가까운 편의점에서 따뜻한 물을 마셨다. 뚜껑을 돌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 병을 들여다보다가 겨우 열었다. 가은은 계산대에서 영수증을 받아 날짜를 확인했다. 영수증에는 정상적인 날짜가 찍혀 있었다. 소은은 실제로 물을 받았고, 점원은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어디서 지내셨어요?"
가은이 물었다.
"역이요."
"언제부터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거기서는 내일이라는 말이 없어요. 어제 놓친 열차가 오늘 다시 오고, 내가 보낸 편지가 내가 쓰기 전에 돌아와요."
"나이는요?"
소은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스물일곱 살인 것 같아요."
그녀는 잠깐 웃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일곱 살이었어요. 누가 1년에 한 번씩 생일 날짜를 적어 줬거든요. 그래서 나이를 셌어요. 몸도 조금씩 커졌고요. 하지만 바깥에서 산 날은 하루도 없어요."
가은은 그 말이 얼마나 쓸쓸한지 생각했다. 소은은 스물일곱 해를 살았지만, 한 번도 신호등 앞에서 길을 기다리거나 초등학교 친구와 싸우고 화해하는 날들을 가져 보지 못했다.
"그때 왜 역으로 갔는지 기억하세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요?"
소은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저 아저씨요. 그런데 그때는 아저씨가 아니었어요. 저보다 조금 큰 애였어요."
현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스물일곱 살 여자가 자신을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 알고 있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린 현우의 사진과 황동 열쇠, 그리고 손글씨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중에 누가 너를 못 알아보면, 먼저 네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생각하라고 했어요."
소은은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역에서 사람들한테 물을 나눠 줬어요. 그런데 다들 마시고 나면 나를 잊어버렸어요."
***
편의점 밖 가로등이 차례로 꺼졌다. 골목 입구 간판에서 글자가 떨어져 나갔다. '행복 세탁소'가 '행복'만 남았다가, 잠시 후 빈 흰 판으로 변했다. 지나가던 배달 기사가 골목을 바라보고 핸들을 급히 틀었다.
"왜 길이 없지?"
그는 방금까지 자신이 어디로 가려 했는지 잊어버린 듯 길가에 섰다.
현우의 시야에 새로운 안내가 떠올랐다.
[미반환 원본 이동 경로 추적 중]
[노출 구역 자동 정리]
"소은 씨를 찾아서 골목을 지우는 거예요."
현우가 말했다.
가은이 편의점 주인에게 손전등을 빌리고, 가장 가까운 큰길까지 사람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현우는 건물 벽에 붙은 오래된 주소 표지판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러나 사진 속 주소도 곧 흐려졌다. 잊히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장소일 수 있었다.
소은이 갑자기 골목 끝을 가리켰다.
"저기요. 저 문은 지우면 안 돼요."
좁은 빨간 철문이었다. 사라질 듯 흔들리는 벽에 작게 적혀 있었다.
'서람시장 후문. 서고 연결 통로.'
문 아래에는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다. 현우가 주워 들자 낯익은 공무원 서식처럼 생긴 문장이 보였다.
[관리자 변경 신청서]
[현 관리자: 이현우]
[신청 사유: 미성년자 본인 의사 미확인]
맨 아래 신청인 칸에는 소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옆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접수 연도: 2006.'
"제가 썼어요."
소은이 말했다.
"그때 누군가가 저한테 도와 달라고 했거든요."
가은이 물었다.
"누가요?"
소은은 현우의 얼굴을 보았다.
"그 애를 지우지 말아 달라고 울던 사람요. 지금 현우 아저씨 얼굴하고 똑같이 생긴 어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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