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실은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턱에 신발 앞코를 가지런히 맞춘 채 서 있었다. 오래전에 정해진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검은 이름표 같은 직사각형이 희미하게 떨렸다.
[증언 권한: 영구 박탈]
윤가은은 신분증을 꺼냈다가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이곳에서 경찰 신분증이 얼마나 힘을 가질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질문하는 방식만큼은 놓지 않기로 했다.
"정연실 씨. 스스로 증언 권한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요?"
"내가 말하는 건 증언으로 인정되지 않아요. 하지만 듣는 것까지 금지된 건 아니지."
"그럼 듣겠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연실은 창밖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서로의 이름을 가르쳤어요. 잊지 않게요."
"이름을 가르치는 게 왜 문제죠?"
"여긴 이름을 잃어버린 애들이 모이는 곳이었거든. 부모가 없어서가 아니에요. 부모가 아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뒤에 보내진 애들이었어요."
민하린이 공책을 꼭 쥐었다. 정연실은 소녀를 바라보다 얼굴을 돌렸다.
"여덟 번째 애가 들어오면 이 학교는 문을 닫을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일곱 번째 애가 들어온 날부터 문제가 생겼지."
"무슨 문제요?"
"아무리 이름을 적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지워졌어요."
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날 아침마다 다시 불렀죠."
연실은 눈을 감았다.
"그래. 그리고 네가 대답할 때마다 나도 네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놀랐어."
하린은 정연실을 보지 않으려 했다. 소녀는 공책을 손바닥으로 누른 채, 교탁 아래에 서서 연실의 신발만 바라봤다. 연실이 이름을 부르려 하자 하린은 손바닥을 들어 막았다.
"오늘은 선생님이 먼저 이름 부르지 마세요."
연실은 입을 다물었다.
"왜?"
"제가 말해 보고 싶어서요."
하린이 잠시 숨을 골랐다.
"저는 민하린이에요. 선생님이 아는 그때의 아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까지 제 발로 왔어요."
연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교사의 얼굴에 익숙한 감정이 지나갔다. 성적표에 이름을 적는 일을 떠맡은 교사가 아니라, 오래전에 가르치던 학생이 스스로 발표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래. 잘 왔다."
하린이 물었다.
"선생님, 저한테 화났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잊으니까. 같은 걸 열 번 가르쳐도 또 모르면 화날 것 같아서요."
연실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가 교탁 모서리를 붙잡았다.
"화를 낸 적이 있지. 네가 아니라 나한테. 매일 아침 너를 처음 보는 얼굴로 대하는 나한테 화가 났어. 선생인데 학생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럼 선생님은 나쁜 선생님이 아니네요."
"그렇게 단정하지 마. 좋은 선생이었으면 네가 이곳에서 겪은 일을 더 일찍 알아차렸을 거야."
하린은 공책을 다시 펼쳤다.
"그럼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일은 꼭 말해 주세요. 나중에 선생님이 잊어버려도 제가 적어 둘게요."
연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잊어버려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아직 할 일이 있다는 부탁이었다. 그녀는 창밖 운동장의 잡초를 오래 바라봤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 순간 연실의 검은 직사각형이 한 번 흔들렸다.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증언 권한 박탈'이라는 표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표지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현우는 문득 이곳의 규칙이 능력이라기보다 관리 절차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했다. 누군가 증언할 권리를 없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이들이 듣지 않도록, 듣더라도 믿지 않도록 만들어 왔을 뿐이었다.
***
가은은 연실을 복도 창가로 데려갔다. 현우와 태경은 교실에 남아 검증관이 칠판에 띄운 기록을 지켜봤다. 두 사람을 나누면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모두 함께 있으면 연실이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대신 교실 문을 열린 채로 두었다.
"제 동생을 아십니까?"
"그 아이가 네 동생인지까지는 내가 증명할 수 없어. 하지만 소은이라는 애가 있었지. 열두 살쯤 됐던 너와 달리, 아직 작은 애였어."
"그 애는 몇 살이었죠?"
"일곱 살. 노래를 잘 불렀어. 귀가 어두운 아이에게도 크게 불러 줬지."
가은의 눈에 물기가 돌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때 살던 집의 부엌 식탁에서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세 개의 의자를 사 놓고 두 개만 쓰던 기억. 왜 그랬는지 부모에게 물었더니 두 사람이 똑같이 '원래 그랬다'고 대답했던 기억.
"소은이는 어디 갔습니까?"
연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둘뿐인 오른손으로 코트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 애는 학교에 들어온 적이 없어요. 정확히는 입학 명부에 한 번도 적히지 않았지."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내가 교문 밖에서 만났으니까. 거기서 노래를 불렀으니까."
가은이 손끝으로 수첩을 눌렀다.
"두 분의 관계를 증명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연실은 가은을 보며 슬프게 웃었다.
"증언을 못 하는 사람에게 증명하라니. 당신도 참 형사답네."
"말씀을 믿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 내 말만 믿지는 마. 뒤를 확인해."
연실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녹슨 호루라기를 꺼냈다.
"예전에 운동장 집합할 때 썼던 거야. 아래에 날짜가 긁혀 있어. 교실 다섯 번째 서랍 열쇠와 연결돼 있어."
그녀가 호루라기를 가은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쇠가 피부에 닿았다. 가은은 손가락으로 흠집을 더듬었다.
2006.10.27.
그날은 첫 번째 삭제 명령 하루 전이었다.
***
교실 안에서는 현우가 검증관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작성자를 알려 달라고 했지, 관리자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기록상 동일인입니다."
"기록이 그렇게 돼 있다는 것과 사실인 건 달라요."
검증관의 얼굴이 잠깐 흔들렸다. 회색 제복은 그대로였으나 얼굴이 하나의 그림처럼 겹쳐 보였다. 늙은 남자, 어린 여자, 아무 특징도 없는 마네킹. 곧 다시 비어 있는 얼굴로 돌아왔다.
"기록 외 사실은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삭제된 사람을 어떻게 돌려보냈죠? 박정호 씨는 자기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게 기록에 없던 사실이었잖아요."
검증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태경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이 시스템은 사실보다 기록이 먼저라고 믿는군요. 그런데 사람들은 기록 밖에서도 살아요."
"사실 판단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규정인가요?"
검증관의 손이 멈췄다. 규정의 문장이 보이지 않으면 실행을 멈추는 것처럼 보였다.
현우가 칠판 아래 서류를 들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눈앞에 생긴 경고를 보았다.
[원본 입력 권한 사용 시 본인 귀환 보류 해제]
어제였다면 무심코 터치했을 문장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사용하면 권한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권한을 인정하는 순간 다른 권리를 잃는다'는 계약이었다.
"권한은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청인으로서 오류 정정은 요청합니다."
검증관이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정정 청구 접수]
[원본 작성자 열람: 상급 검토 필요]
그 순간 종이가 한 장 떨어졌다. 책상 사이에 가려져 누구도 보지 못한 작은 영수증이었다.
[2006-10-28 00:00]
[지시자: 기재 없음]
[입력자: 이현우]
[당사자: 민하린]
[서명 확인자: 정연실]
현우는 마지막 줄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정연실은 방금 증언 권한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검증 담당자로 적혀 있었다.
***
가은이 돌아와 다섯 번째 서랍에 호루라기를 갖다 댔다. 금속 끝을 작은 구멍에 끼우자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있었다. 스티커에 어린아이 글씨로 '소은이 생일 축하 연습'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린이 다가와 테이프를 내려다보았다.
"그 노래예요."
"어떻게 알아?"
"뒤에 별을 그려 뒀잖아요. 소은이가 저 대신 그려 줬어요."
태경은 학교 비품장에 있던 카세트 플레이어를 찾았다. 배터리 덮개가 떨어져 있었지만 재생 단추를 누르자 모터가 돌아갔다. 낡은 테이프 특유의 잡음 뒤로 두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네가 먼저 불러!'
'언니, 나 음이 틀려.'
'틀려도 괜찮아. 네 목소리인 거 알면 되잖아.'
소리는 평범했다. 계절과 나이를 가진 실제 아이들이 장난치며 노래하는 소리. 가은은 눈을 감았다. 그 목소리를 안다는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노래가 여섯 번째 음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하린이 카세트를 멈췄다.
"여기까지만요."
"왜?"
"뒤에 문 여는 소리가 녹음돼 있어요."
정말이었다. 정지한 뒤에도 플레이어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운동장 쪽 교문이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그 너머의 풍경이 학교 담장 대신 낯선 지하 승강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0번 승강장 / 입장 경로 활성화]
현우는 카세트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검증관이 바로 앞을 막았다.
"테이프는 반환 대상이 아닙니다. 원본 증거물입니다."
가은은 카세트 재생 단추를 한번 더 눌렀다.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언니, 나 음이 틀려.'
교문 너머에서 누군가 크게 대답했다.
"아니. 이번에는 맞았어."
그 목소리는 어른의 것이었다. 하린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은의 기억 속 어디선가, 이미 한 번 죽은 줄 알았던 이름 하나가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윤소은.
그리고 교문 앞에, 그 이름을 단 여자가 서 있었다.
[윤소은 / 31:11:09]
제1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