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펌프장 앞에는 노란 안전선이 쳐져 있었다.
간밤에 폭우가 내린 것도 아니었다. 배수관 교체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만 새로 붙어 있었다. 시작 날짜는 어제였고, 공사 승인 도장은 사흘 전 날짜였다. 가은은 둘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기록했다.
“문서를 지키려는 건지 없애려는 건지 아직 모릅니다. 함부로 단정하면 안 돼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는 붉은 숫자는 이제 서른여섯 시간을 가리켰다.
구청 기록관의 보존 전문가 윤채림이 조사를 돕기로 했다. 채림은 현장에 오자마자 빈 공간이 표시된 도면을 펼쳤다. 볼펜으로 벽 한쪽을 두드리는 대신 오래된 급수 배관 표시를 가리켰다.
“여기 점선 보이죠? 벽이 아니라 이동식 차수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홍수 때 수로를 막고 보관물을 보호하는 방입니다.”
“그럼 지금도 있을까요?” 하린이 물었다.
“모릅니다. 부식됐다면 문을 열다가 안의 물건까지 망가뜨릴 수 있어요.”
채림은 정식 출입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구청 보존 관리 서버에서 이관 목록을 조회했다. 목록은 있었다. 그러나 제0기록실이라는 제목을 검색하면 조회 권한이 없다는 메시지만 나타났다. 한 단계 위의 '긴급 임시 보존' 분류에서 찾자 품목 열세 개가 나왔다.
“품목이 열세 개면, 13번 의자와 연관이 있나요?” 현우가 물었다.
“숫자가 같다고 같은 사건일 순 없어요.” 채림이 말했다. “다만 기록 연번은 확인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출력된 목록을 보여 줬다. 품목 1번부터 9번까지는 문서철, 10번은 접수 장부, 11번과 12번은 자기테이프, 13번은 '열람 대기함'이었다. 관리 장소는 전부 같은 코드였다.
[북부 수문 부속실 / 00-00]
가은은 구청 감사 부서에 긴급 보존 조치를 요청했다. '증거물'이라는 말 대신, 보존 기간과 소유 기관이 불명확한 공공 기록물이라는 확인 가능한 사실을 적었다. 기록을 무작정 가져갈 권한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적법하게 보존하게 할 책임이 있는 기관을 불러야 했다.
오후 세 시, 시설 관리 책임자가 현장 개방을 허락했다. 대신 채림이 현장에서 훼손 위험을 판단하고, 가은은 출입 인원과 시간을 기록하기로 했다.
출입 허가가 내려오기 전까지 하린은 펌프장 옆 안내판을 읽고 있었다. 폭우 당시 이곳이 주민들에게 임시 식수를 공급했다는 짧은 설명이었다. 사진에는 줄을 서서 물을 받는 어른들 사이로 어린아이가 종이컵을 든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희미해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사진이 쓸모없는 건 아니지?” 하린이 물었다.
“그렇지. 저 아이가 그날 물을 받았다는 건 알 수 있으니까.” 현우가 말했다.
“그럼 저 방에도 누군가 기다렸던 사실이 남아 있을 거야.”
현우는 하린이 종종 자신보다 정확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알아내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보려는 질문이었다.
지하 계단은 생각보다 좁았다. 바닥에는 오래된 물 자국이 층층이 남아 있었고,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파란색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금속판의 한쪽 모서리에 달린 작은 손잡이는 녹슬어 움직이지 않았다.
채림은 손전등으로 표면을 비췄다.
“봐요. 누가 이 문을 용접하지 않았어요. 볼트를 빼면 열 수 있는 구조예요.”
관리 책임자가 현장 사진을 찍은 뒤 정비 기사를 불렀다. 볼트 네 개가 풀리자 금속판 안쪽에서 공기가 길게 빠져나왔다. 그 냄새는 눅눅한 종이와 철분이 섞인 것이었다.
벽 뒤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발을 딛자 먼지가 일어났고, 금속 선반 위에 밀봉된 상자들이 보였다. 상자 표면에는 '열람 대기함'이라는 흰 글씨가 찍혀 있었다.
맨 아래 상자에는 뚜껑 대신 작은 편지 투입구가 있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봉투를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 같았다.
하린이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 글씨가 있어.”
투입구 아래에는 아이의 필체처럼 삐뚤어진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돌아와서 읽을 수 있게 해 주세요.'
현우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붉은 글씨가 문장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기록 잠금 전환 / 31:12:06]
방이 발견됐다는 사실만으로 시계가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찾으러 오기 전에 이 상자를 처리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선반 뒤편에서 작은 진동음이 들렸다. 전기가 끊긴 곳이라고 했던 방 안에서, 벽에 고정된 오래된 단말기 한 대가 켜지고 있었다.
제14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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