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는 오래된 서점이었다.
남쪽 진료소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 강 건너 소도시에 자리한 작은 가게였다. 유리문에는 '수요일 휴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지만, 그날은 수요일이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갓 내린 차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가은과 현우는 먼저 서점 주인의 안내를 받았다. 상담사 본인은 면담을 녹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실명 또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당시 있었던 일을 확인할 수 있는 물품은 가져왔다고 했다. 필요한 진술은 본인이 검토한 뒤 서명해서 남기겠다는 조건이었다.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이름이 보이지 않는 사람, 혹은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은 뭔가를 잃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불편함일 뿐이었다. 상대의 권리를 줄일 이유는 되지 않았다.
“동의합니다.” 가은이 말했다.
서점 안쪽 문이 열렸다. 회색 재킷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눈가에는 오랜 세월 웃고 울면서 생긴 주름이 얇게 남아 있었다. 현우의 눈에는 그 사람의 머리 위가 보였다. 특별한 붉은 글씨도, 초록빛 이름도 없었다. 그냥 빈 공간이었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를 이름 없는 사람으로 부르진 말아 주세요.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일을 위해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겁니다.”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여자는 가방에서 격자무늬 수첩을 꺼냈다. 오래된 필름에 찍힌 바로 그 수첩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세 개의 원은 어제 주영이 보여 준 문양과 같았다. 내부에는 빗물에 번진 날짜와 아이가 그린 작은 종이배가 있었다.
“스무 해 전, 저는 이동 상담 인력이었습니다. 그날 남쪽 진료소에 갔고, 임시 진료 차량에 마지막으로 올라탔습니다.”
“왜 올라타셨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아이가 자기 이름을 고르기 전에 외부 인계가 진행되려고 했거든요.”
여자는 그날의 소리를 천천히 되짚었다.
차 문밖에는 파란 장갑을 낀 직원이 있었다. 그는 보호자 지정 서명이 없으므로 다른 기관으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희는 거부했다. 아이는 물컵을 쥔 채 떨고 있었고, 노란 비옷의 사람은 차 앞에서 길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직원이 말했어요.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차에 올랐어요. 그리고 아이에게 물었죠. 지금 어디에 있고 싶은지.”
“아이는 무엇이라고 답했나요?”
“'여기서 기다릴래요.' 그 한마디였어요.”
현우는 가슴이 조여 왔다. 이름을 묻는 모든 사람 앞에서 아이는 기다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기록은 침묵으로 처리되었다.
“그 뒤로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는 차량이 움직이는 동안 아이 옆에 있었어요. 파란 장갑을 낀 직원은 차에서 내렸고, 처음에 차를 몰던 사람은 다른 곳에서 교대를 했어요. 어디서 내렸는지, 그 뒤 아이가 어느 시설에서 지냈는지는 지금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현우가 말을 잇기 전에 서점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민서였다. 그녀는 가은에게 따로 연락해 면담 참석을 요청했고, 상대방이 직접 허락했다는 답을 받은 뒤에야 들어왔다.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는 자신이 접은 작은 배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서점 한쪽에 자리를 잡고 '질문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내를 들은 다음 조용히 인사를 했다. 상담사는 말없이 빈 의자를 빼 주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는 데에는 스무 해가 걸렸지만, 누구도 그 시간을 한꺼번에 돌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민서의 눈이 붉어졌다. 그녀는 동행 여부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렸지만 결국 직접 참석하겠다고 했다.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제가 먼저 내렸다는 건 기억하세요?”
여자는 민서를 오래 바라봤다.
“네. 당신이 먼저 내렸어요. 그 아이가 차창으로 손을 흔들었죠. 당신이 손을 흔들던 장면도 기억합니다.”
민서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 아이는 잘 살고 있나요?”
여자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제가 말할 권리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기다렸다는 말은 전하겠습니다. 원한다면, 그 아이가 답할 방법도 남겨 둘게요.”
민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수첩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글씨가 흐릿했지만 날짜와 문장은 선명했다.
'열 시 십삼 분. 대상자 직접 의사 확인. 이름과 귀환지 선택은 유예. 외부 인계에 동의하지 않음.'
그 아래 서명 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서명 없음은 미확인이 아니라 당사자 선택 보류에 따른 조치. 최종 승차 확인자는 이 보류를 목격함.'
“왜 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그날 누군가 제 이름을 찾으려고 했어요. 아이를 인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까지 승인자로 넣겠다고 했죠. 그래서 실명은 따로 봉인했고, 제 역할만 기록했어요. 아이도, 저도 누군가 대신 책임을 씌우는 기록에서 벗어나려 했던 거예요.”
그녀는 가은에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
“제 신원은 적법한 절차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대신 제 진술은 확인해도 좋아요. 그날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은은 봉투를 받았다. 드디어 마지막 탑승자를 만났지만, 뜻밖에도 현우는 이제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스무 해 동안 어떤 말을 지켜 왔는지였다.
면담이 끝나려 할 때 여자가 현우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날 같은 대피소에 있었죠?”
현우는 눈을 들었다.
여자는 수첩을 펼쳐 마지막 장 뒷면을 보여 주었다. 미세한 연필 자국 아래 짧은 문장이 있었다.
'아홉 번째로 남긴 목격자에게는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이건 제가 쓴 글이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그날 밤, 아이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전해 달라며 남겼어요.”
제1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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