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회의실에는 둥근 탁자 하나와 물병 네 개가 놓여 있었다. 민서는 약속보다 십 분 일찍 와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정민서입니다.”
현우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현우입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민서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 말은 좀 믿고 싶네요.”
가은은 녹음 여부와 기록 범위를 설명했다. 민서는 개인적인 사연은 녹음하지 않고, 전산 오류 확인을 위한 일부 진술만 문서화하는 데 동의했다. 확인을 마치면 스스로 읽고 틀린 표현을 고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그들이 내민 의자에 앉기 전, 민서는 손으로 등받이를 한번 만졌다. 그 짧은 동작에 현우는 창고의 나무 의자를 떠올렸다.
“13번 의자를 본 적 있으십니까?”
민서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사진으로 보여 주실 수 있나요?”
가은이 기록기관에서 받은 사진을 건넸다. 민서는 그 사진을 보자 오래 접어 둔 편지를 꺼내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저기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계속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기억이 순서대로 나오지 않아요. 비 냄새가 나고, 누가 내 신발을 벗기고, 버스 문이 열렸어요. 그다음은 어떤 집의 부엌이에요.”
현우가 말했다.
“집이 두 개라고 하셨죠.”
“하나는 할머니 댁이었어요. 낡은 굴뚝이 있었죠. 다른 하나는 엄마가 일하던 작은 가게였고요. 창문이 크게 열려 있었어요. 비가 오면 그 창문을 닫으러 제가 뛰어갔죠.”
현우는 가방에서 작은 열쇠고리 사진을 꺼냈다. 태석의 수선점에서 확인한 두 채의 집 그림이었다.
민서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걸 아직 누가 가지고 있어요?”
“강태석 씨라는 운전기사분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가져가실지는 민서 씨가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한동안 사진을 들여다봤다.
“엄마가 만든 거예요. 한쪽으로 안 돌아오면 다른 쪽에서 찾을 수 있게 하겠다고.”
그 말 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민서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사고 뒤에 누가 저한테 이름을 알려 줬어요. 서류에 적힌 이름이라고요. 그 이름이 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사람들이 화를 냈어요. 저를 돌봐 준 분들도 나쁜 마음은 아니었겠죠. 그래도 저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누군가의 옷을 잘못 입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름을 바꾸셨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성인이 돼서요. 정민서는 제가 고른 이름이에요. 이건 누가 골라 줘도 되는 게 아니었어요.”
현우는 민서의 머리 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늘 그가 확인해야 할 것은 붉은 이름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말하는 이름이었다.
***
회의실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에 민서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저는 비가 오면 늘 젖은 신발부터 생각나요.” 그녀가 말했다. “그날 신고 있던 신발을 아무도 찾아 주지 않았거든요. 나중에는 제가 원래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도 헷갈렸어요.”
가은은 발언을 기록할지 물었다. 민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공식 기록에 넣지 않아도 돼요.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할게요.”
민서가 이상하다는 듯 현우를 보았다.
“예전엔 제 이야기를 들은 어른들이 전부 뭔가를 적었어요. 말도 안 한 걸 적기도 했고요.”
“저희는 듣기만 할 수도 있어요.”
민서가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었다. 현우는 그 웃음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기억은 붙잡을수록 자기 방식으로 바뀔 수 있었다. 대신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 마음에 새겼다.
면담을 마칠 무렵 민서가 질문했다.
“제가 혹시 어린 시절의 다른 누군가를 없앤 셈인가요?”
“그런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가은이 말했다. “오류의 책임이 민서 씨에게 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우리가 찾는 건 누가 어떤 근거로 기록을 연결했는지예요.”
“그럼 그 기록에서 저를 떼어 내면 되나요?”
“민서 씨의 현재 신원을 보호하면서 잘못 연결된 자료를 확인해야 해요. 단순히 하나를 삭제해 버리면 원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의 기록까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애가 저였다는 것에는 확신이 없어요. 하지만 그날 버스에 다른 아이가 하나 더 있었어요.”
현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아이 얼굴은 기억 안 나요. 다만 그 아이가 제게 부탁했어요.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아직 모른다고 해 달라'고요.”
“왜 그렇게 부탁했을까요?”
“저도 그때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는 자기가 불릴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그 이름으로 데려가려는 사람을 믿지 않았죠.”
가은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기억에 근거한 진술, 확인 필요.’
그날 밤, 민서는 집에서 보관해 온 상자 사진을 보내 왔다. 학교 졸업장과 이름 변경 서류 아래에 오래된 색종이 한 장이 있었다.
거기에는 파란 점을 찍은 종이배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아래 글씨는 단 한 줄이었다.
'먼저 내린 애가 내 이름을 가져갔어.'
제12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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