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석이 기억하는 사람은 노란 비옷을 입은 여자였다. 다른 직원들은 이름표를 달았지만 그 여자만은 투명한 비닐 주머니에 빈 종이를 넣어 두었다고 했다.
“왜 이름을 적지 않았을까요?” 현우가 물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아직 내 이름으로 누군가를 데려갈 자격이 없다고.”
“그 말이 정확히 기억나십니까?”
“뜻은 분명한데 말은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스무 해 전이잖아요.”
가은은 확인되지 않은 표현이라고 메모했다. 사람의 기억은 단서가 될 수 있었지만 그대로 판결문이 되어서는 안 됐다.
그들은 태석의 동의를 얻어 서면으로 다시 진술을 받았다. 노란 비옷은 당시 임시 이송팀의 공용 물품이었고, 누구나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투명 주머니 속 빈 명찰이라는 묘사는 다른 기록과 맞아떨어졌다.
재난기록관의 사진 한 장에 노란 비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빗방울과 손전등 불빛에 가려졌고, 가슴팍에 걸린 비닐 명찰은 비어 있었다.
하린이 말했다.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어?”
“찾아볼 수는 있지. 하지만 그 사진으로 누군가를 지목하면 안 돼.”
“알아.”
하린은 잠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때 아이가 이름을 말할 때까지 기다려 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
조명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예전에 청리역에서 일괄 정리 알고리즘을 설명했던 기술자는 해명서 형태의 자료를 보냈다. 가은은 그를 정식 참고인으로 조사 중이었다.
“13번 의자 기록의 일부가 중앙 목록으로 옮겨진 흔적이 있습니다.” 조명진은 영상 통화에서 말했다. “사람의 인적 사항이 아니라 '자기 확인 유예'라는 상태 코드였어요.”
“자기 확인 유예?”
“아이에게 여러 이름과 주소가 제시됐지만 그중 하나를 정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담당자가 기다려야 한다는 표시였죠.”
현우는 장부 속 문장과 의자 아래의 글씨를 떠올렸다.
“그런데 전산화 이후에는요?”
“그 상태가 비정상 자료로 분류됐어요. 기한 안에 확인되지 않으면 가장 근접한 기존 인적 사항에 자동으로 연결하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럼 아이의 이름이 다른 사람에게 붙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연결 구조만 보면 가능합니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원본과 대조해야 합니다.”
가은이 끼어들었다.
“누가 그런 규칙을 승인했습니까?”
“제가 가진 문서에는 승인자가 없어요. 대신 '현장 확인 권고'라는 미완료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검수 당시 누군가 문제를 발견한 거죠.”
“현장 확인은 이루어졌습니까?”
“기록에는 없어요.”
전화를 끊은 뒤 현우는 주영에게 물었다.
“지금도 그 자동 연결이 작동합니까?”
“대부분의 연계는 막았습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합쳐진 자료를 뒤에서 참조하는 시스템이 있을 수 있어요. 함부로 원본을 수정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기록이 손상될 겁니다.”
현우는 답답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록 먼저 당사자를 찾아야 했다.
***
현우는 통화를 마친 뒤 가은에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이름을 안 알려 준 아이를 시스템이 결함으로 분류했고, 그 결함을 없애려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져왔을 수 있다는 거죠?”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이름이 사용됐는지 모르죠.”
“그 아이가 지금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면요?”
“그렇다면 우리가 멋대로 찾아서 과거의 이름을 돌려줘서도 안 되겠죠. 당사자의 현재가 먼저예요.”
현우는 가은의 말을 수첩에 적었다. 사라지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했지만, 구한다는 말이 누군가의 삶을 다시 쓰는 허가증이 될 수는 없었다.
작업실 창에는 빗물이 조금씩 맺혔다. 서람초 사고의 기록을 뒤지며 비가 오지 않은 날을 보낸 적은 손에 꼽혔다. 그래도 오늘의 빗소리는 경보가 아니라, 천천히 생각하라고 시간을 주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날 새벽 하린은 현우의 집에 들렀다. 말없이 식탁에 앉아 종이배 두 척을 접었다. 하나에는 파란 점을, 다른 하나에는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
“왜 두 개야?” 현우가 물었다.
“집이 두 개라고 했잖아. 한쪽으로만 가야 할 필요는 없는 거야.”
그 말에 현우는 웃으려다 멈췄다. 하린이 종이배 아래에 접어 둔 쪽지에서 다른 글씨가 보였기 때문이다.
'열세 번째 의자는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다.'
그는 쪽지를 펼쳤다. 하린의 글씨였다.
“이걸 네가 썼어?”
“응. 그런데 방금 생각난 게 아니야. 어렸을 때 어디선가 들었던 문장이야.”
“그럼 누구를 기다리는 자리였을까?”
하린은 빈 종이배를 손바닥에 올렸다.
“처음부터 자기를 데려갈 사람을 믿지 않아도 되는 자리.”
바로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13번 접수 재개]
아무도 신청하지 않은 옛 절차가, 20년 만에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제12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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