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리군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전, 현우는 기록관 옥상에 올라갔다. 산등성이 너머로 겨우 몇 개의 불빛이 보였다. 첫날 이곳에 왔을 때는 모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들 대부분이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이름을 숨기기로 했다. 그 역시 본인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선미가 따뜻한 종이컵을 건넸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우리를 탓했어요. 솔직히 듣기 싫을 때도 있었어요.”
“그럴 수 있죠.” 현우가 말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료를 제대로 보여 주고 선택하게 하니까, 화내던 분들도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무엇을 숨길지, 누구에게 보여 줄지.”
현우는 컵의 열기를 손바닥에 느꼈다.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겠죠.”
선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청리군 합동점검 결과는 이튿날 오전에 발표됐다. 자동 대행 응답은 본인 동의를 입증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됐고, 해당 응답을 근거로 진행한 일괄 병합은 중지됐다. 이미 잘못 합쳐진 자료는 원본 대조와 당사자 확인을 거쳐 순차적으로 복구하기로 했다. 긴급 의료 접근은 기존 독립 확인 체계를 유지하면서 필요한 정보만 제공하도록 했다.
가은은 현우에게 결과를 읽어 줬다. 그는 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확인되지 않은 의사는 동의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게 제일 중요하네요.”
“서람부터 청리까지 오느라 오래 걸렸어요.” 가은이 답했다. “다른 열한 지역에도 같은 확인이 필요하겠죠.”
“모든 곳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겠죠.”
“맞아요. 공통 규칙은 조사하되, 피해자의 선택은 각기 다르게 들어야 해요.”
주영은 수정된 검증 설계 자료를 운영기관에 넘기기 전에 보안 담당자와 함께 개인정보가 포함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문제가 된 중계 방식과 방지 조건은 남기되, 누가 보호 신청을 했는지는 공유하지 않았다. 작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경계를 세우는 것이 이번 사건의 결과였다.
***
오후에는 정은채가 친구들과 함께 기록관에 왔다. 그림을 직접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선미는 아이들의 이름을 묻되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은채는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 옆 친구는 고개만 끄덕였다.
현우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다가 하린을 바라봤다. 하린은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약속 지켰네.” 하린이 말했다.
“무슨 약속?”
“사람들 일 돕고도 집에 돌아오겠다는 거.”
“돌아가야지. 국이 식잖아.”
하린은 웃었다. 현우는 그 웃음이 좋았다. 그는 이름이 붉게 변한 사람을 따라 길을 잃던 때에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발 직전 가은이 그를 불렀다.
“영상에 나온 의자의 번호, 13에 관해서 추가 자료가 나왔어요.”
“열세 번째 구역이 아니라면서요.”
“번호는 구역이 아니었어요. 사람을 앉히는 대기 의자의 번호였습니다.”
가은은 옛 수기 안내도를 보여 주었다. 서람초 수문 대피소의 이동 접수용 의자들은 1번부터 12번까지 있었다. 사고 직후 남은 명단에서 각 의자는 한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임시 증설된 13번 의자는 어느 명부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여기서 접수된 아이들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냐고 했죠.” 현우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한 명을 뜻하는지, 여러 명을 뜻하는지는 아직 몰라요. 의자 하나를 보고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사진을 확대했다. 13번 의자 밑에 찢어진 하얀 종이가 끼어 있었다. 작은 글씨가 보였다.
'본인 기록을 신청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자리.'
누군가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사건이었다.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적어 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
그날 밤 버스는 청리군을 떠났다. 하린은 창에 이마를 대고 잠들었다. 현우는 가방에서 종이배를 꺼냈다. 가은이 건네준 영상 분석 요약이 안에 접혀 있었다. 열두 지역은 서로 다른 문제를 가진 채 연결되어 있었지만, 원래의 보호 규칙이 거쳐 간 곳은 더 있었다. 그곳은 지도에 점으로 표시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이동시키며 접수하던 차량과 임시 대피소, 하루만 열렸다 사라진 상담 창구들이었다.
창문에 비친 현우의 머리 위에는 이름이 선명히 보였다. 더는 붉지 않았다. 그가 청리군 경계를 벗어났다는 뜻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잊은 걸까. 현우는 섣불리 결론 내리지 않았다.
그때 휴대전화 화면에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당신이 찾는 13번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어 두 번째 문자가 떴다.
'하지만 13번 자리에 앉았던 아이는 아직 이름을 기다립니다.'
발신자는 숫자 없이 작은 빈칸으로만 나타났다.
현우는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못한 상대에게 먼저 약속할 수는 없었다. 대신 가은에게 두 메시지를 전송하고, 버스가 도착하면 함께 검토하자고 적었다.
하린이 잠결에 물었다.
“또 이름이 보여?”
“응.”
“붉어?”
“아니. 아직은 아무 색도 없어.”
현우는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는 창을 잠시 바라봤다. 사람을 지우는 규칙을 쫓으며 한 가지를 배웠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또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전부 아는 것도 아니었다.
버스가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의 불빛이 긴 선으로 늘어졌다. 어둠 속에서 현우는 종이배를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
다음에 찾아야 할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름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당신은 어디에 돌아가고 싶습니까?'
제12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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