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 기한 만료까지 71:58:43]
숫자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유병철은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뭐 잘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선미가 대답했다. “저 숫자가 무엇인지 아직 확인하는 중이에요.”
현우는 노인의 손등에 솟은 핏줄을 보았다. 억지로 차분해지려는 사람의 손이었다. 서람에서 자신에게 72시간이 주어졌을 때 느낀 공포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보는 붉은 표시가 아니라 공개 화면에 붙은 회색 숫자였다. 공포를 피할 장소도 없었다.
가은이 민원실 전체 단말기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원 둘이 수동으로 화면을 점검했다. 스물일곱 개의 이름 없는 조회 항목 중 세 개에 숫자가 붙었다. 모두 72시간을 전후한 시간이었지만 시작 시점은 달랐다.
“이게 실종 예정 시간일까요?” 현우가 물었다.
“그렇게 단정하면 안 돼요.” 가은이 말했다. “지금 확인된 건 전산상 보호 상태의 만료 예정 시각뿐이에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몰라요.”
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노인에게 종이 신청서를 내밀었다. 성명란을 직접 쓰게 하고, 오늘 접수했다는 도장을 찍었다.
“전산이 멈춰도 신청하셨다는 사실은 남겨 둘게요.”
노인은 펜을 오래 쥐고 있었다.
“이걸 누가 읽기는 할까요?”
“저부터 읽겠습니다.”
그제야 노인은 이름을 또박또박 썼다.
***
청리 기록관 지하에는 보존 서고가 있었다. 선미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열람할 수 있던 안내 지도를 꺼냈다. 청리는 오래전 큰 산사태를 겪은 군이었다. 20년 전 주민 대피 과정에서 신원 노출을 막기 위해 임시 번호가 쓰였고, 이후 일부 자료가 통합 보존 체계로 이관됐다.
“임시 번호를 만든 이유는요?” 가은이 물었다.
“대피 과정에서 서로 떨어진 아이들과 신고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현장 제보자가 섞여 있었어요. 이름을 밖에 드러내면 위험한 사람이 있었죠.”
현우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떤 이름은 공개되지 않아야 살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것은 이름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었지만, 지킨다는 말이 언제나 세상에 드러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 현재 시스템도 선한 목적으로 시작됐을 수 있네요.”
“그렇죠.” 선미가 답했다. “문제는 누가 보호를 요청했는지, 언제까지 적용하기로 했는지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선미는 보존함에서 낡은 카드를 꺼냈다. 카드 맨 위에는 '본인만 열람 가능'이라는 문구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이름 대신 작은 회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게 옛날 원본이군요.” 현우가 말했다.
“네. 하지만 종이를 떼면 이름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선미는 카드를 빛에 비춰 보였다. 종이 아래에는 단순한 코드만 있었다. 보호받는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서 지우는 대신, 본인이 직접 쓴 이름 봉투를 따로 보관했던 것이다.
“봉투가 아직 있습니까?”
“일부는요. 문제는 열람 키를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선미는 작업대 위에 두 가지 문서를 놓았다. 첫째는 스무 해 전의 안내서였다. '본인이 지정한 질문 두 개 중 하나에 답하고 직접 열람한다.' 둘째는 열세 해 전의 전산화 사업 안내서였다. '운영 02가 열람권을 대행한다.'
가은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서람에서 본 문장과 같습니다.”
“맞아요.” 선미가 말했다. “서람에서는 비어 있던 승인란을 채웠고, 청리에서는 보호받는 사람이 직접 열던 봉투를 대신 열도록 바꿨어요.”
현우는 유병철의 이름을 떠올렸다. 병철은 오늘 분명히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화면은 그의 말보다 대행 계정의 침묵을 더 신뢰했다.
***
점심때 기록관 앞에서 아이들이 서로를 숫자로 불렀다.
“열여섯 번, 여기 와!”
하린이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아이들은 장난처럼 웃었다. 그러나 한 여자아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열여섯 번 싫어.”
“선생님이 번호로 부르잖아.”
“엄마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데.”
하린이 다가가 아이의 말을 들었다. 아이는 배움터에서 출석 확인 시스템이 고장 난 뒤 선생님이 번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린은 어른들이 해결할 일이라고 말하고,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정은채.”
“예쁜 이름이네.”
아이는 그제야 웃었다.
하린이 현우에게 이 일을 전하자 현우는 종이 신청서가 왜 중요한지 다시 이해했다. 기록의 오류는 화면 안에서만 사람을 지우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방법까지 바꾸고 있었다.
그날 밤, 가은은 유병철의 동의를 받아 그의 보호 기한과 대행 로그를 비교했다. 화면에는 병철의 열람권을 갱신한 계정이 남아 있었다.
[운영 02 / 원격 열람 허용 / 신청인 대리: 000]
선미는 마지막 번호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000은 사람 번호가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현우가 물었다.
“청리군의 재난방송 시험용 단말기 번호예요. 전화선만 있고, 그곳에 상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은이 노트북을 닫았다.
“내일 그 단말기를 확인하겠습니다. 종이에 적힌 이름을 대신 읽었다는 기계가 도대체 무엇을 봤는지요.”
제11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