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하린의 머리 위에 숫자가 나타났을 때, 이현우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정확히 말하면, 숫자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민하린 / 47:59:41]
소녀는 한빛요양원 접이식 의자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무릎 위에는 낡은 공책이 놓여 있었고, 연필을 쥔 손끝에 검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간병인이 복도를 지나가며 밀던 카트 바퀴가 일정한 소리를 냈다. 그 평범한 소리가 현우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했다.
세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형사님. 잠깐요."
그는 윤가은을 복도로 불렀다. 태경도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밀며 뒤따랐다. 현우가 휴대전화에 떠 있는 기록을 보여 주자 가은은 두 번 읽었다.
[최초 등록자: 이현우]
[삭제 대상: 민하린]
[처리 결과: 실패]
[재실행 예정: 2026-10-28 00:00]
"어릴 때 본인에게 권한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서류가 그렇게 주장해요. 그런데 저한테는 기억이 없어요."
"하린이는 봤어요?"
"아직이요."
가은은 잠든 소녀 쪽을 돌아보았다. 형사로 일하는 동안 거짓말을 숨기는 사람을 많이 봤다. 그러나 무서운 사실을 숨기는 사람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표정이 달랐다. 지금 현우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 일을 스스로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일단 휴대전화는 증거가 아니에요. 증거가 될 수도 있지만, 상대가 우리가 보게 하려는 화면일 수도 있죠."
"저도 그걸 알아요."
"그럼 순서를 정해요. 하린이의 안전을 먼저 확보하고, 그다음 기록을 검증합시다."
태경이 짧게 웃었다.
"검증할 원본이 지워지는 세상에서 말입니까?"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맞춰 볼 겁니다. 같은 화면 하나를 쳐다보는 건 검증이 아니니까요."
가은은 수첩의 새 페이지를 세 칸으로 나눴다. '눈으로 본 것', '기계에 표시된 것', '누군가 말한 것'. 그녀는 현우에게 붉은 숫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적게 하고, 자신은 화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태경에게는 화면을 보여 주지 않고 그가 알고 있는 '첫 번째 삭제' 이야기를 물었다.
태경은 오래 침묵했다.
"딱 한 장면만 기억납니다. 종이를 찢는 소리요. 그날 누군가 종이를 찢었고, 아주 어린애가 울었습니다. 난 그 아이한테 울지 말라고 했어요. 그다음부터 내 손목 팔찌에 이름이 없어졌죠."
"아이 얼굴은요?"
"없습니다."
"현우 씨 얼굴은요?"
"그것도요."
그는 팔찌를 풀려고 하다가 멈췄다. 팔찌는 피부와 종이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오래 붙어 있었다.
"그런데 누가 자꾸 내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범인이라고. 아주 정확하게요. 어른도 아닌 아이가 처음으로 사람을 지웠다고."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요?"
"그걸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상하군요. 그 목소리는 내 기억 속에서 항상 안내 방송처럼 들렸습니다."
가은이 수첩을 덮으려다 작은 종이 한 장을 떨어뜨렸다. 시장에서 박정호를 돌려보낸 날 받은 계산 영수증이었다. 커피 두 잔과 생수 한 병. 시각과 금액까지 온전했다. 영수증 뒷면에는 가은이 적은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오늘 이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때는 누군가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적어 둔 문장이었다. 지금 보니 그보다 더 실질적인 증거였다. 결제한 사람과 영수증을 준 사람, 정호가 마셨던 물까지 서로 다른 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느 한 장의 원본을 바꾸어도 쉽게 동시에 없어지지 않을 흔적이었다.
"우리가 실수한 게 있어요."
가은이 말했다.
"뭘요?"
"줄곧 지워지는 사람의 과거를 되찾으려고만 했어요. 그런데 정호 씨는 과거를 다 돌려받지 않고도 집에 갈 수 있었죠. 새로 만든 약속 때문이에요."
현우는 하린이 잠든 의자를 바라봤다. 오래전 자신과 소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지금 하린에게 필요한 사람은 과거를 아는 관리자보다도 아침을 함께 맞아 줄 누군가일지 몰랐다.
태경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 이십 년을 보냈는데, 그동안 누구하고도 새 약속을 안 했어요. 기억을 찾고 나면 시작하려고요."
"이제부터 하시면 되죠."
가은이 대답했다.
태경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누구도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과거의 지워진 보관자만 찾으려 했다.
"그럼 첫 번째 약속은 이걸로 합시다. 서람초등학교가 정말 있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혼자 사라지지 않기."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현우가 말했다.
세 사람은 각각 같은 뜻을 다른 문장으로 적었다. 가은은 그 종이를 보며 생각했다. 똑같은 글씨로 복제된 증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확인한 사실이 중요했다. 이곳에서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수사 원칙이기도 했다.
창문 밖 버스 정류장에 첫 차가 섰다. 졸린 승객들이 차례로 올라탔다. 현우는 문득 자신이 저 승객 중 하나로 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저 평범한 버스를 아무렇지 않게 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
새벽 네 시, 하린이 깨어났다.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는데 소녀는 현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시선을 피했다. 공책을 가슴 쪽으로 당기고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문질렀다.
"아저씨, 저한테 시간 생겼죠?"
현우는 대답하는 대신 의자에 앉았다. 어른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나쁜 소식을 전하는 자세가 싫었다.
"네가 볼 수 있어?"
"아니요. 하지만 공책에서 새 종이 냄새가 나요. 지워질 때는 늘 그래요."
"내가 널 지우려고 했다는 기록이 나왔어."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 있어. 내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진짜 했는지는 아직 몰라."
하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공책을 펴서 맨 뒤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어린아이 글씨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를 잊어도 약속은 버리지 말 것.'
"이 글씨 알아요?"
"모르겠어."
"아저씨 글씨예요."
하린이 말했다.
"그날 나한테 줬어요. 난 처음에는 화가 났어요. 왜 사람을 잊게 하면서 약속은 버리지 말라는지 모르겠어서."
현우는 종이를 보았다. '약속'이라는 글자의 받침이 기울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어떻게 글씨를 썼는지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널 내보냈다고 했잖아."
"네. 그런데 나가기 전에 사람들이 서로 싸웠어요. 어떤 어른은 제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고, 어떤 어른은 나가야 모두 산다고 했어요. 아저씨는 제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 안 나요. 그 부분만 오면 노래가 들려요."
"노래?"
하린은 가은을 흘끗 보았다. 가은의 수첩에 적힌 다섯 음. 잃어버린 동생이 남겼다는 자장가의 앞부분이었다.
하린이 작게 흥얼거렸다. 가은이 펜 끝을 멈췄다. 같은 노래였다. 하지만 여섯 번째 음에서 소녀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그 뒤의 선율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가르쳐 줄 수 있어?"
가은이 물었다.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부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 노래가 문을 열거든요."
***
아침이 오자 현우는 일터에서 전화 세 통을 받았다. 물류센터 팀장은 그가 야간 작업을 무단으로 빠졌다며 출근하라고 했고, 동료는 전날 정리해 놓은 출고 파일이 통째로 없다고 불평했다. 마지막 전화는 낯선 번호였다.
"이현우 씨죠? 오늘 오전 열 시, 원본 서명 확인을 진행하겠습니다."
어제 반환 창구에서 들었던 지나치게 상냥한 목소리였다.
"당신 누구예요?"
"기록관리과 임시 안내 담당입니다. 고객님은 서명자가 맞으니까요."
"전 그런 데 서명한 적 없어요."
"기억하지 못하는 서명도 효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업무의 장점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통화 목록에는 발신 번호가 남아 있지 않았다.
현우가 상황을 말하자 가은은 즉시 물류센터로 가자고 했다. 기록관리과가 '원본 서명'을 보여 주려 한다면, 그전에 바깥세상에 남아 있는 현우의 실제 글씨부터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물류센터는 도시 외곽의 회색 건물이었다. 경비실 옆 자동판매기에서 캔커피가 굴러 떨어지고, 지게차의 경고음이 출입구까지 들렸다. 현우는 이곳이 반가울 줄 몰랐다. 이름을 부르면 사람들이 돌아보는, 수상한 의미가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인사팀 직원이 내민 입사 서류에서 현우의 손이 멎었다.
이력서 아래쪽의 서명과 하린이 건넨 종이의 '약속' 글씨가 똑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도 쓰는 습관이었다. 하지만 입사일 칸은 비어 있었다. 직원은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서류를 가져가려 했다.
"입사한 날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현우가 물었다.
"저희 시스템에선 오래 근무한 걸로 나와요.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직원은 눈을 깜빡였다.
"아, 잠깐. 이현우 씨 전에 일하던 분이 누구였죠?"
책상 위 달력에서 숫자 하나가 하얗게 지워졌다. 가은이 직원의 손목을 잡고 뒤로 물렸다. 현우가 다시 서류를 보니, 서명란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가 생겨 있었다.
[원본 서명 검증 장소: 구 서람초등학교 기록실]
[검증 시각 10:00]
[동행인 불허]
현재 시각은 오전 아홉 시 사십 분이었다.
"가면 함정일 거예요."
가은이 말했다.
현우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하린이 시간은 계속 줄어요."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경비실의 작은 모니터에 이상한 화면이 떴다. 전날 밤 요양원에서 잠들었던 하린이 영상 속에서 교문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지금은 태경과 함께 있어야 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녹화 시각이 표시되어 있었다.
2026-10-28 00:01.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다.
영상 속 하린이 카메라를 올려다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아저씨. 여기는 혼자 오면 안 돼요.'
제1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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