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이현우는 그 단어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회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미납 기록이라고 부르던 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호칭이었다. 그는 물류센터의 데이터를 정리하는 계약직 직원일 뿐이었다. 출퇴근 시간을 맞추고 야간 작업 로그를 정리하고, 월말이 되면 카드값을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어 왔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현우가 말했다.
반환 창구의 벽이 파르르 떨렸다. 곧 밝은 표면 위로 글씨가 떠올랐다.
[관리자 신원 확인]
[이현우 / 원기록 검토 권한]
[현재 상태: 임시 귀환]
윤가은이 현우를 올려다봤다. 의심이라기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을 들은 형사의 표정이었다.
"현우 씨. 자신이 여기 왔던 일을 정말 기억 못 해요?"
"못 해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황동 열쇠를 들어 보였다.
"열쇠를 만졌을 때 어린 시절 장면이 보였어요. 하지만 그것도 진짜 기억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내가 보도록 누가 꾸민 것일 수도 있잖아요."
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 확실한 것부터 정리해요. 당신은 붉은 이름을 볼 수 있어요. 한 시간만 남았던 숫자는 보류 신청으로 늘어났고요. 그리고 이곳에서 관리자라고 부르지만, 그게 본인의 의사였다는 증거는 아직 없어요."
현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무턱대고 그를 믿는 대신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편을 들어 주고 있었다. 확인된 사실을 붙잡는 것. 다른 모든 기록이 흔들리는 곳에서 그것만큼은 단단했다.
민하린은 황동 열쇠를 바라보았다.
"저도 하나는 알아요. 아저씨가 예전에 저를 내보내 줬어요. 그래서 제가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거예요."
"밖으로 내보냈는데 왜 아직 여기에 있어?"
"모든 기록 밖으로 보내진 못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저를 봐도 금방 잊어요. 어떤 때는 아예 못 보고요."
현우는 처음 경찰서에서 하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소녀의 머리 위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 사실은 여전히 이곳의 규칙과 맞지 않았다. 사라질 예정이라면 붉은 이름이 있어야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 없이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너는 지워진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등록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죠."
가은이 말을 이었다.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대답 같았다.
***
벽의 안내는 계속됐다.
[반환 대기 물품: 1건]
[대상자: 박정호]
[필수 서류: 원기록 확인 / 새 증인 관계 / 귀환 목적]
현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자신에 관한 수수께끼도 중요했지만, 박정호의 이름이 명확하게 적혀 있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저 사람을 돌려보낼 수 있다는 뜻이죠?"
벽에서는 잠시 아무 반응이 없다가 문장이 바뀌었다.
[원기록 반환은 관리자의 승인 대상입니다]
"그럼 승인할게요."
[승인 요청 전 본인 역할을 인정하십시오]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하린이 말렸던 바로 그 함정이었다. 누가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려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책임을 인정하라고 한다. 회수 담당자가 여러 번 시도하던 방식과 똑같았다.
가은이 낮게 말했다.
"인정하라는 말에 대답하지 마요. 다른 길이 있을 거예요."
현우는 화면을 찬찬히 훑었다. 벽에 붙어 있는 서류의 맨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보였다.
'기존 원기록 책임자가 부재한 경우, 증인 세 명의 서명으로 임시 반환 심사를 신청할 수 있음.'
"여기 있네요."
현우가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었다.
가은이 곧바로 수첩을 폈다. 하린은 종이봉투에서 오래된 연필을 꺼냈다. 현우는 박정호에 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정리했다. 그가 케이크를 샀다는 것, 딸을 만났다는 것, 오른쪽 발을 조금 끌며 걸었다는 것. 가은은 그의 실종을 조사했고, 하린은 0번 승강장에서 얼굴이 사라진 남자를 보았다.
"세 명이 모두 같은 장면을 본 건 아니지만, 각각 다른 장면을 확인했어요."
가은이 말했다.
"그게 더 믿을 만해요."
그들은 서류를 작성했다. 가은은 자신의 손글씨가 사라지지 않도록 가장 진한 펜으로 적었다. 하린은 본명이 불확실하므로 '민하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썼다. 현우도 자신의 기록이 불확실하다는 문장을 먼저 붙였다.
이상하게도 벽은 그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다.
[증인 서명 3건 접수]
[반환 심사 개시]
벽 가운데에 좁은 문이 생겼다. 문 너머에서 작은 바퀴 소리가 났다.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오래된 병원 카트가 지나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
문 안에는 병실처럼 하얀 공간이 있었다. 박정호가 누워 있었다. 눈과 코, 입이 모두 희미했고 양손에는 작은 주삿바늘 자국 같은 흰 점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박정호 씨."
하린이 그를 붙잡았다.
"여기서는 이름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바꿨다.
"편의점에서 초콜릿 케이크 사신 분. 딸 생일을 챙겨 주셨던 분. 제가 첫날 지하철에서 말을 걸다가 도망쳤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박정호의 눈썹 사이에 얇은 주름이 생겼다.
"케이크……"
현우는 숨을 죽였다.
"네. 딸이 기다렸어요."
"내 딸?"
"이름은 제가 몰라요. 하지만 작은 그림을 그렸어요. 집과 꽃과 가족을 그렸는데, 그중 한 사람의 얼굴이 지워져 있었어요."
박정호가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었다. 차가운 공기를 만지는 손짓이었다.
"아빠……"
그가 중얼거렸다.
현우의 가슴이 뛰었다. 얼굴 없는 남자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던 일을 손이 먼저 기억해 내는 듯했다.
가은이 물었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집."
남자의 대답은 희미했다.
"집에서 누가 기다리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왜 집에 가고 싶으세요?"
박정호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말했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이니까요. 누가 기다리는지 몰라도."
하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현우는 그 대답이 심사에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말만은 누가 외우라고 시킨 대답이 아니었다.
벽에서 문장이 떠올랐다.
[귀환 목적 확인]
[원기록 일부 반환]
박정호의 얼굴에 조금씩 윤곽이 돌아왔다. 어제 편의점에서 보았던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고 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손을 한참 만졌다.
"제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며칠이요."
"그럼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현우는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같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가은이 대신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했다.
"밖에 나가서 확인하죠."
***
돌아오는 길은 긴 터널이 아니었다. 반환 창구의 문을 열자 한빛요양원 근처 골목이 나타났다. 네 사람은 박정호를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서태경과 김세진이 골목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경이 박정호를 보자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이……"
"일단 돌아왔어요."
가은이 말했다.
박정호는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지나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소리에 몇 번이나 놀랐다.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이면서도 오랫동안 그리웠던 것 같았다. 현우는 이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소를 찾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휴대전화에는 박정호의 집이 등록돼 있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의 동·호수는 기억했지만, 그곳에는 다른 사람 이름이 붙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가은은 가족에게 무작정 접근하는 대신 근처 주민센터에서 신원을 확인할 방법을 마련하자고 했다.
"아내분이 남편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어요. 아이도 그렇고요."
"알아요."
박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분들을 안다고 해서 그분들이 절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죠."
말끝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곧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멀리서라도."
현우는 그 말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 앞 놀이터에는 늦은 시각인데도 불이 켜져 있었다. 정호의 딸은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이는 현우를 보고 멈칫했다. 며칠 전 그림을 물어본 사람이란 걸 어렴풋이 알아보는 듯했다.
정호는 멀리 떨어진 벤치 옆에 서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 아이가 자신을 기억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가은의 부탁을 지켰다.
그때 아이가 현우에게 물었다.
"아저씨, 그림 찾았어요?"
"무슨 그림?"
"제가 잘못 그린 거요. 세 사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밖에 없었잖아요."
현우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림은 잘못 그린 게 아닐 수도 있어."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현우 쪽을 가리켰다. 엄마는 낯선 사람이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가은이 앞에 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이 그림과 관련해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잠깐만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박정호는 끝내 벤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현우는 한 사람을 돌려보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까지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록은 일부 되찾았지만, 함께 살던 시간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어 있었다.
그때 아이가 벤치 쪽을 봤다.
"엄마, 저 아저씨도 케이크 좋아하시나 봐."
정호의 손에는 구겨진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반환 창구를 나온 뒤에도 없어지지 않은 물건이었다.
아이가 한 걸음 가까이 와서 말했다.
"우리 아빠도 초콜릿 케이크 좋아했다고……"
아이는 말을 멈췄다. 엄마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아이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자기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낡은 그림의 일부였다. 얼굴을 지운 사람의 손에만 초콜릿 케이크가 그려져 있었다.
"저기요."
아이가 박정호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케이크 자를 때 왜 가운데 딸기를 먼저 빼요?"
정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우는 그가 대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비어 있는 상자 안쪽에 딸기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정호는 울면서 웃었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니까. 먼저 빼서 네 접시에 놓으려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엄마의 손을 놓지 않았지만, 정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누구세요?'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럼 다음에도 제 거 먼저 빼 주세요."
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만들어진 약속 하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누군가가 다시 시작할 자리가 생긴 것이다.
***
그날 새벽, 가은의 수첩에서 현우 이름이 더 흐려지는 일은 멈췄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오늘 새로 기억하게 되었고, 그 기억은 처음 확인 창구에 제출했던 과거와 달랐다. 현우의 시간도 정상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현우 / 53:29:08]
아직 사흘이 다 지나기도 전이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다가 낯선 파일 하나가 생성된 것을 발견했다. 파일 이름은 날짜도 제목도 아닌 짧은 문장이었다.
'첫 번째 삭제자.'
파일을 열자 검은 화면 위에 어린아이의 사진이 나타났다. 작은 남자아이가 수많은 이름이 적힌 서류 앞에 앉아 있었다. 사진은 오래전 현우 자신이었다.
그 아래에는 문서 하나가 펼쳐졌다.
[최초 등록자: 이현우]
[권한: 원기록 작성 및 수정]
[과거 작업: 1건]
[삭제 대상: 민하린]
현우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질 뻔했다.
그는 잠든 하린을 돌아보았다. 소녀는 태경의 요양원 방 한쪽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얼굴에는 어린아이 특유의 무방비한 평온함이 남아 있었다.
현우는 화면을 다시 보았다. 마지막 줄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처리 결과: 실패]
[재실행 예정: 2026-10-28 00:00]
그 아래, 맨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문장이 나타났다.
'관리자 본인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삭제 절차가 진행됩니다.'
현우는 휴대전화를 꺼 버렸다. 그러나 어두워진 화면에도 붉은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민하린 / 48:00:00]
처음 만난 날부터 하린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에게도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제1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