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리는 두 개의 녹음을 같은 화면에 띄웠다. 하나는 10번 봉투에서 나온 음성. 다른 하나는 사고 당시 펌프 정비팀이 무전에 남긴 녹음이었다. 두 자료 사이에는 삼십 분이 넘는 간격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격리를 유지하세요'라는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같았다.
현우가 말했다.
“같은 사람이 두 번 말한 건가요?”
“아니요.” 유리가 대답했다. “말하는 속도, 숨을 들이쉬는 소리까지 거의 같아요. 같은 녹음을 두 번 송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번 녹음한 걸 나중에 다시 내보냈다고요?”
“그럴 수 있죠. 다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주영은 오래된 무전기의 작동 설명서를 가져왔다. 당시 중앙 분소 중계기는 비상상황에서 미리 저장한 안내문을 반복 송출할 수 있었다. 현장 지휘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전에 승인된 표준 문장일 수 있었다.
가은은 메모를 고쳐 적었다.
'음성 발화자'와 '지시 승인자'는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음.
기술로 끝나는 조사라면 그 정도에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현우에게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문 안의 아이가 손잡이를 붙잡고 기다리는 장면. 누가 안전을 위해 잠갔다 해도, 풀릴 수 있는 순간까지 놓쳤다면 아이가 느낀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
오후에 주영은 중앙 분소의 폐기 서버에 남은 목차를 가져왔다. 파일 원본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지만 당시 음성 지시를 분류한 표는 남아 있었다.
[표준방송 A-4: 현장 중단 확인]
[표준방송 B-2: 격리 유지]
[표준방송 C-1: 조건 해소 후 수동 재확인]
주영은 마지막 줄에 손가락을 올렸다.
“C-1이 송출되지 않았습니다.”
“전산 기록상으로만 그런 건가요?” 가은이 물었다.
“네.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다는 증거까지는 아니에요. 별도 수동 전달이 있었을 수도 있죠.”
현우는 자료의 가장 작은 글씨를 읽었다.
'B-2 연속 송출 종료: C-1 접수 확인 시.'
“C-1을 접수하지 않으면 B-2가 계속 반복된다는 뜻이네요.”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스템에는 C-1 접수 확인이 없습니다.”
스무 해 전의 사고가 처음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문을 잠그라고 한 뒤 고의로 버린 일이 아니라, 위험을 막으려고 만든 절차가 끝나지 않아 생긴 비극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는 명령을 끌 사람이 없었다면 그 절차를 만든 사람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저녁 무렵 배윤석에게서 만나겠다는 답이 왔다. 장소는 오래된 시립 도서관의 작은 열람실이었다. 그는 팔십이 다 된 노인이 아니라 오십대 후반의, 어깨가 굽은 남자였다. 창가에 앉아 물병의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그날 관제실에 있었던 건 맞습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제가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들 하시겠죠.”
가은은 녹음이나 문서를 꺼내지 않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 기억부터 듣고 싶습니다.”
윤석은 창밖을 바라봤다.
“하부 수로에서 누가 미끄러졌다는 연락이 왔어요. 물이 갑자기 차오르고, 문 쪽으로 압력이 몰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멈추라고 했죠. 그건 지금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요?”
“중앙 분소에 연락했습니다. 현장 중단, 인원 재확인을 요청했어요. 돌아온 건 격리 유지 방송뿐이었습니다.”
“그 방송을 직접 들으셨나요?”
“예. 제 옆에 있던 동료도 들었습니다.”
“문을 열 수 있게 된 뒤엔 어떻게 하셨습니까?”
윤석의 손이 떨렸다. 물병을 놓는 소리가 크게 났다.
“저는 열라고 했습니다.”
현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누구에게요?”
“현장 조장에게요. 그런데 중앙 분소에서 그 지시가 아직 유효하지 않다고 했어요. 당직자가 바꾸면 안 되는 승인이라고.”
“그래서 기다리셨습니까?”
“예.”
짧은 말이었다. 그는 울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저는 그때 규정을 지키면 사람들을 살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규정이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 동안, 사람들은 물속에서 버티고 있었는데도요.”
윤석은 낡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흑백으로 복사한 팩스 수신 내역이었다.
'B-2 유지. C-1 확인 전 단독 해제 금지.'
발신 기관은 중앙 분소였다. 그러나 발신 담당자의 이름 칸에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코드만 찍혀 있었다.
[운영 02]
현우는 차분히 물었다.
“누가 그 종이를 보내 달라고 했는지 들으셨습니까?”
윤석이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이 전화했습니다. 분소 담당자라고 했죠. 그런데 그 사람은 격리를 유지하라고 말한 뒤, 잠깐 말을 멈추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거기… 아직 아이들이 있습니까?'
윤석은 눈을 감았다.
“제가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가은은 녹취를 멈추지 않았다. 윤석의 마지막 진술이 끝난 뒤 한참 정적이 흘렀다.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익명 메시지는 아니었다. 발신처는 시청 안전 기록 공개 게시판이었다.
[안내: 10번 봉투의 음성 원본에 대한 공개 이의 신청 접수]
[신청자: 배윤석]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윤석은 그의 휴대전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조용히 말했다.
“제가 신청했습니다. 거기에 제 목소리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들이 찾는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닙니다.”
제10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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