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름표요.”
현우가 말하자 담당 직원이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흰 플라스틱 판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그는 손으로 몇 번 문질러 보았다.
“여기 분명 제 이름이 있었는데….”
가은은 즉시 문을 닫고 직원의 신분을 확인했다. 서류상의 이름은 박동규였다. 직원증 번호와 인사 기록은 정상인데 오늘 출입 기록에만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현우는 머리 위를 보았다. 다행히 붉은 시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겁주려는 건가요?” 주영이 작게 물었다.
“겁을 주는 방식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봉투를 본 시점부터 일어났다는 건 기록해 둬야겠죠.” 가은이 답했다.
그들은 봉투를 더 이상 보관실에서 다루지 않았다. 봉인과 인수증을 새로 만들고, 방 안의 카메라 시간을 확인한 뒤 음성 기록 매체를 전문 복원실로 보냈다. 동규는 처음엔 자신의 이름이 어째서 빠졌는지만 반복해 물었다. 가은이 손에 종이를 쥐여 주고 오늘 직접 한 일을 적게 하자 조금씩 침착해졌다.
'저는 오늘 아침 9시 14분에 10번 보관함을 열었습니다.'
자신의 글씨를 읽던 동규가 말했다.
“이런 일도 나중에 지워집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복사본을 세 군데 남기려는 겁니다.”
동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그가 펜을 내려놓는 모습을 오래 봤다. 누군가의 존재를 기록할 때 필요한 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는 시간일지도 몰랐다.
***
복원실에서 음성 매체를 받은 사람은 음향 기사 출신의 정유리였다. 오래된 경찰 녹음과 재난 방송을 복원해 온 그녀는 먼저 현우 일행의 기대를 낮췄다.
“말하는 사람을 목소리만으로 특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음질이 나쁘고 편집이 있으면 더 그렇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음성이 어떤 순서로 기록됐는지, 서로 다른 소리가 겹쳤는지 정도예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가은이 말했다.
유리는 매체의 표면을 확대해 보였다. 오래된 자석 테이프의 접합부에 작은 흰 표시가 있었다. 원본에서 끊어진 자리를 연결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이어 붙인 시점이 사고 당시인지 열세 해 전 전산화 때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첫 번째 재생에서는 익숙한 문장이 나왔다.
'재확인은 필요 없습니다. 격리를 유지하세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목소리는 중년 남자의 것처럼 들렸다. 단단하고 피곤한 음색이었다. 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이 어린 시절 기다리던 복도의 냄새를 떠올렸다.
유리가 재생을 멈췄다.
“이제 앞뒤를 복원해 볼게요.”
긴 잡음이 흘렀다. 쇳소리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주 작게 누군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그러면 아래층 사람들은요?'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 이어 다른 사람이 기침을 했다.
'누가 그런 지시를 했습니까?'
그 다음에야 문제의 문장이 나왔다.
'재확인은 필요 없습니다. 격리를 유지하세요.'
그런데 이번엔 억양이 달랐다. 질문하는 듯 위로 올라가는 말끝. 유리는 속도를 낮췄다. 현우에게도 들렸다. 화자는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읽고 있었다.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라고 단정하면 안 되겠군요.” 가은이 말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 한 구절만으로는 최초 지시자와 전달자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주영은 사고 당시 무전 교신표를 펼쳤다. 질문이 들리던 시각은 자료상 오후 여섯 시 팔 분이었다. 그런데 전산 음성의 타임스탬프는 여섯 시 십이 분으로 저장돼 있었다. 불과 네 분 차이였다.
“그 네 분 사이에 문이 잠겼을까요?” 현우가 물었다.
“문이 언제 잠겼는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가은이 답했다. “녹음 시각과 실제 조치 시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유리는 마지막 부분을 한 번 더 재생했다. 문제의 문장 바로 뒤에서 작은 종소리가 났다. 두 번, 그리고 한 번 더. 현우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또 세 번이에요.”
“이건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에요.” 유리가 말했다. “금속 물건을 두드린 울림과도 달라요. 오래된 사무실의 호출 벨 같아요.”
주영은 서랍에서 사고 당시 시청 별관의 배치도를 꺼냈다. 수문 대피소에는 호출 벨이 없었다. 하지만 외부 관제실에는 민원용 작은 종이 있었다.
“그럼 이 녹음은 대피소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 수 있겠네요.”
화면을 보던 가은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사고 현장과 지시를 내린 장소가 달랐다는 뜻이죠.”
그 순간 유리의 복원 프로그램에서 파일 하나가 자동으로 열렸다. 별도 이름이 없는 텍스트 파일이었다.
[원본 듣기 제한]
[제한 사유: 발화자 보호]
[예외 승인 경로: 02]
유리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제가 실행한 파일이 아닌데요.”
화면 아래쪽에 새로운 줄이 생겼다.
[열람자 중 증인 09 식별]
[보호 절차 재검토]
현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아직도 자신을 그 스무 해 전 문 앞의 아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제10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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