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겸은 면담에 세린이 동석하는 것을 허락했다. 대신 장소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중립적인 회의 공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서윤은 취재 목적의 참석이 허락되지 않아 따로 질문서를 보냈다. 그 사실은 민석을 다소 안심시켰다. 적어도 오늘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서명할 자리는 아니었다.
정태겸은 탁자 위에 파일을 올려놓았다.
“백소희 씨 건에 대해 우리 회사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다고요.”
“네. 그리고 왜 제 계좌에 그분과 연결된 금액이 예측됐는지도요.”
태겸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금액을 알고 있습니까?”
“원장에서 봤습니다. 실제 지급액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태겸은 숨을 내쉬었다. 예전처럼 호기롭게 금액을 말하지 못했다. 그는 회사 내부에 배포된 시험 정산 화면의 설명서를 내밀었다. 수취인 후보를 넣고 전산 연결이 정상인지 확인하는 기능. 시험 시연에서는 실제 돈이 이동하지 않아도 '처리 성공'으로 표시될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다.
“실제 금융기관 이체와 무관한 테스트입니까?” 세린이 물었다.
“그렇게 설계됐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계좌번호와 실명을 왜 넣었습니까?”
태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에어컨 소리가 방을 채웠다. 민석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 남자가 당장 거짓말을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웠지만, 실명을 넣어야 할 이유 역시 듣지 못했다.
“이 설명서를 제게 주려는 이유가 뭡니까?”
“외부로 나간 자료를 취소하고 싶습니다. 그 자료가 금융상품의 가치 평가에 쓰이면 회사도 심각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태겸은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관련 문제에 대해 상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포함된 합의서 초안이었다. 특정 항목의 정정 협력을 조건으로 민석에게 지급할 보수도 제안돼 있었다.
세린이 서류를 덮었다.
“사실확인을 위한 면담에 이런 합의서가 나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검토하더라도 별도 절차로 해야 합니다.”
민석은 펜을 집어 들지 않았다.
“보수를 받으면 제가 할 일은 뭔데요?”
“외부에서 돌아다니는 원장 화면이 실제 미래 예측이 아니었다고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설명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것까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태겸의 입가가 굳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일이 커진 겁니다.”
“처음부터 확인되지 않은 걸 완료라고 적어서 커진 게 아닙니까?”
잠시 후 태겸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회의가 끝나기 직전, 민석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2016년 자료가 왜 2036년 제 이름으로 서명됐는지 아십니까?”
태겸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그건 제가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요?”
“시뮬레이션 시험 계정을 실제 서비스에서 쓸 수 있도록 연동한 사람이 있었어요. 나중에 그 계정을 중지하려 했을 때는 이미 여러 업체가 같은 값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인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권한 있는 조사기관에 제출할 수 있는 변경 승인 이력의 문서 번호를 말했다. 세린은 그 번호가 실재하는지 공식 확인을 요청했다.
태겸이 자료를 접으려 할 때 세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민석이 서명을 거절한 합의서 초안에 회수 표시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태겸은 서류를 접으며 말했다.
“합의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회사가 조사를 진행하는 데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질문의 범위를 문서로 보내 주세요.” 세린이 답했다. “그리고 다른 신청인의 자료를 당사자 허락 없이 받으려 하지 마세요.”
태겸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태겸이 잠시 다른 서류를 찾는 동안 민석이 세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을 믿어도 될까요?”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확인 가능한 자료가 있느냐의 문제죠. 자신에게 불리한 문서를 내놓는다고 반드시 진실만 말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 문서가 실제라면 확인에 도움이 될 겁니다.”
태겸은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했다. 민석은 그가 합의서보다 변경 승인 이력에 관한 질문에 더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태가 말했던 미래 담당자 계정을 누가 열었는지, 그 사람이 지금도 권한을 갖고 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 문제를 묻자 태겸은 보고서 제목만 이야기했다. 민석은 제목을 수첩에 적었다. 서류 이름은 단순했다. 장기 대조 자동화 시험 결과. 누군가 그 이름으로 실제 사람들의 기록을 움직이려 했다는 것이 복잡한 문제였다.
회의실 문 앞에서 태겸이 민석을 불렀다.
“당신은 그 시뮬레이션이 모두 가짜라고 믿고 싶겠죠.”
“아니요.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고 싶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태겸이 보여 준 화면에는 ‘미래 실행 중단 테스트’라는 항목이 있었다. 예약된 작업을 중지하면 그 작업의 예상 결과도 바뀌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대부분의 행에는 정상적으로 ‘취소됨’이라고 적혀 있었다.
맨 아래 한 줄만 달랐다.
[대상: 2036년 강민석]
[미래 실행 중단 요청: 2026.12.04]
[결과: 이미 수행됨]
실행 시각은 2036년 11월 20일 오후 네 시 사십이 분이었다. 민석이 며칠 전 보관기관의 출력물에서 봤던 것과 동일한 시각이었다.
“시각이 같다는 게 실제 미래에서 접속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세린이 먼저 말했다.
“그걸 저도 압니다.” 태겸이 답했다. “그래서 이상한 겁니다. 시험 계정의 시간표를 누가 바꿨는지 제가 찾고 있어요.”
복도에 나온 민석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섰다. 거짓 미래라고 믿으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 그 거짓말을 설계했든, 설계하지 않았든, 화면 속 시간은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서윤에게서 연락이 왔다.
“민석 씨, 우리가 찾던 봉투에 관한 제보가 왔어요. 도현 씨가 숨긴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람입니다.”
“누굽니까?”
“원본을 보존해 온 사람이에요. 아직 이름은 확인하고 있어요. 다만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넘기지 않겠다고 했던 조건이 있답니다.”
민석은 눈을 감았다.
“무슨 조건인데요?”
“원래 돈을 받지 못했다고 쓴 사람이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9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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