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청했다고?”
준성은 아침 식당에서 국물도 뜨지 않은 채 민석의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검은 원장에는 그렇게 써 있어.”
“너 열 해 전부터 그 원장에 가입해 있었던 거 아니냐?”
“그 말이 문제야. 원장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도 내 이름을 붙일 수 있으니까.”
민석은 종이 위에 두 줄을 썼다.
원본 상자 이동: 강민석, 공식 기록 존재.
별도 봉투 이동: 요청자 강민석, 원장 주장만 존재.
준성은 첫 줄과 둘째 줄 사이에 굵은 선을 그었다. “그러면 이걸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세린에게서 연락이 왔다. 폐업한 수탁 업체가 보관하던 운송장 목록 일부가 법률상 보존 기간 중 다른 업체로 이전됐고, 소유 관계를 확인한 담당자가 공식 열람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서류에는 한 물품에 대해 발행된 접수 표가 두 장 있었다.
첫 번째 표는 원본 상자 운송 취소 내역이었다. 취소 시각은 오후 네 시 삼십팔 분. 민석이 기억하던 바로 그 운송이었다.
두 번째 표는 별도 봉투 접수 대기 내역이었다. 생성 시각은 오후 네 시 사십삼 분. 인계 확인란에는 사람이 서명한 흔적 대신 프린터로 출력된 별표 네 개가 있었다.
“전자 서명을 뜻합니까?” 하은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담당자가 답했다. “이 시스템은 미입력 칸도 별표로 채웠거든요.”
서윤은 그 말을 들으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과장된 기사 제목 하나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미래에서 찍힌 서명’이라는 제목을 쓰기에는, 당장 서명인지조차 불명확했다.
운송장 오른쪽 위에 작은 숫자가 있었다. B-17. 임시 구역 B의 열일곱 번째 보관 칸이었다. 열 해가 지난 지금 그 공간에는 다른 업체 물품이 들어 있었다. 누가 그 자리를 사용했는지 과거 목록을 찾기 위해서는 보관 장소 운영자의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직원 이름이 나오면 그 사람을 찾아가서 바로 물어보는 겁니까?” 서윤이 물었다.
“먼저 접촉을 원하시는지 여쭤야죠.” 세린이 답했다. “담당 업무를 했다는 이유로 사건의 범인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날 오후 운송장과 함께 보존된 서비스 공지가 발견됐다. 문구는 건조했다.
‘2016년 10월 25일 이후 별도 보관물은 수신자 정보 미확정 시 원천 보존함으로 자동 전환.’
준성이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이제는 봉투가 자동으로 걸어 다니네.”
“자동으로 *기록이 바뀐다*는 뜻이겠지.” 기태가 고쳐 말했다.
바뀌는 것은 물건의 위치가 아니라 화면 속 위치일 수 있었다. 기태는 예전 시스템에서 ‘인수 대기’ 상태의 물건이 밤이 되면 ‘보관 완료’로 일괄 변환되던 문제를 기억했다. 검증 없는 완료 표시가 지급 기록뿐 아니라 물품 보관에도 있었던 셈이다.
민석은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 다른 두 실수가 같은 규칙으로 만들어졌다면,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서윤이 계약 목록을 훑다가 한 이름을 발견했다. 당시 임시 구역 B의 야간 관리자는 배성규였다. 하지만 연락을 받겠다고 밝힌 적은 없었다. 서윤은 공식 대행 창구를 통해 취재 의사를 전달했다. 취재 거절이나 무응답도 그대로 존중할 생각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준성은 운송장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 민석은 운전 중인 준성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지 않았다. 신호를 기다릴 때 보여 주겠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은밀한 자료라도 찾은 것처럼 흥분했을 것이다. 지금은 나란히 적힌 두 시각 때문에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선명했다.
“근데 그때 너는 왜 자기 차를 안 탔을까?” 준성이 물었다.
“잘 기억이 안 나.”
“주차권은 있잖아.”
“그게 내 차 주차권이라는 증거는 없어. 공용 주차권일 수도 있어.”
준성은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네가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네가 틀릴 가능성부터 찾는구나.”
“내가 틀리면 고칠 수 있으니까.”
민석은 문득 십 년 전 창고의 불빛을 떠올렸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간 기억. 누군가 종이상자의 바닥이 젖었다며 테이프를 다시 감던 기억. 그 조각들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첩에 '기억: 바닥이 젖어 있었음. 사실 여부 미확인'이라고 썼다.
차 안에서 그는 봉투 수령인으로 자신의 이름이 등장한 화면에 반박문을 적어 보았다. '나는 가져가지 않았다.'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과거의 자신이 정말 가져가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었다. 문장을 바꿨다. '현재 확인된 공식 인수 기록에는 나의 서명이 없다.' 훨씬 길고 답답했지만, 그것이 지금 자신이 아는 전부였다.
밤 열 시, 답변이 왔다.
‘만날 의사는 있습니다. 다만 저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기사는 쓰지 말아 주세요. 저는 그날 문을 닫은 사람입니다.’
서윤은 민석에게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문을 닫은 사람?”
“2016년 10월 25일, 처음 문을 잠근 사람을 묻던 질문이 있었죠.”
민석의 손끝이 굳었다. 그 질문에 모두가 서문재라는 이름을 떠올렸지만, 기록은 ‘처음’이라고 물었었다.
메시지의 마지막 줄에는 약속 장소가 적혀 있었다. 폐쇄된 보관소 앞의 작은 찻집, 다음 날 오전 열한 시.
그리고 별도의 요청이 있었다.
‘가능하면 강민석 씨도 와 주세요. 십 년 전 그 사람이 어느 문을 열어 줬는지 설명하고 싶습니다.’
제9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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