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희가 꺼낸 봉투는 돈의 흔적보다 사람의 흔적을 더 많이 품고 있었다. 2016년의 문의서, 대조 요청 접수증, 제목만 남은 설명서. 그리고 접힌 종이 한 장. 소희는 그 종이를 담당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제가 보관한 사본입니다. 원본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오늘 요청한 범위 안에서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종이에는 숫자 49까지의 목록이 있었다. 이름은 모두 가려져 있었고, 처리 상태만 적혀 있었다. 스물세 건은 계좌 대조 완료, 열한 건은 지급 지시 생성, 나머지는 확인 대기였다. ‘입금 확인’이라고 적힌 항목은 두 개뿐이었다.
“쉰 번째는 어디 있어요?” 준성은 대기실에서 전해 들은 내용만으로 물었다.
“당시 목록의 쉰 번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민석이 답했다. “미확인 자료를 보관하는 칸이었어요.”
회의실 안에서 소희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저는 050번의 돈을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제 신청과 상관없는 보관인 항목에 제 기록이 연결됐다고 들어서 확인하러 왔습니다.”
민석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원장에서는 사람을 쉰두 명이라고 세었다가, 쉰 번째를 보관인으로 바꾸고, 이제는 그 보관인을 자신의 이름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기태는 원본 대조 결과를 토대로 작은 도표를 그렸다. P01은 첫 번째 지급 확인 요청이었다. 050은 지급할 사람을 모를 때 사용하던 보관 상태였다. M36은 장기 보관 시험에서 쓰던 서비스 이름이었다.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세 기호가 어떤 외부 조회 화면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권리처럼 표시됐다.
“그런데 어떻게 천억 원이라는 숫자가 붙었죠?” 민석이 물었다.
“평가 모델에서 여러 기록을 묶어 계산한 값으로 보입니다. 개별 지급액과 같은 단위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기태가 말했다.
하은은 감사 기록을 보탰다. 외부 시스템에는 아직도 대체 보관인의 예정 작업을 참조하는 낡은 문구가 남아 있었다. 당장 금융기관에서 돈이 움직인 흔적은 아니었지만, 투자 설명서와 연결되면 누군가 또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었다. 정정 작업은 계속돼야 했다.
소희는 원본 자료를 모두 공개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문의서 가운데 사실관계 확인에 필요한 부분만 공식 기록으로 남겼다. 그 범위 밖의 내용은 개인의 생활이었고, 사건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 선택을 존중했다.
오전 열한 시, 담당자가 오늘의 결과를 요약했다.
2016년 최초 지급 신청은 존재했다. 신청인은 입금 여부에 이의를 제기했고, 해당 이의가 후속 집계의 일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P01을 ‘완료’로 표시한 일이 실제 지급까지 뜻하는지는 더 대조해야 했다. 또한 050 보관 상태에 사람이 임의로 결합되지 않았는지 별도 조사가 필요했다.
민석은 마지막까지 들은 뒤 조용히 물었다.
“그럼 오늘은 무엇이 확정된 겁니까?”
“돈이 지급됐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급 여부를 확인할 권리를 갖고 온 사람이 있었고 그 요청이 오늘 정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전 자신이 지키려던 원칙이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몰랐다. 확인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
회의가 끝난 뒤 소희가 민석에게 작은 사본을 하나 내밀었다. 공식 담당자가 제공 범위를 확인한 겉표지였다. 민석은 그곳에서 처음 보는 항목을 발견했다.
[2016년 10월 25일 16:44]
[반출 물품: 원본 상자 1개]
[별도 전달 물품: 이의 기록 봉투 1개]
[봉투 수령: 미확인]
민석은 전날 밤 발견한 주차권을 떠올렸다. ‘상자 이동은 민석. 사본은 별도.’ 두 기록은 서로 다른 경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봉투는 누가 가져갔습니까?” 그가 물었다.
“저도 몰라요.” 소희가 말했다. “다만 제 문의서가 담겼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신청이 빠져 있었고요.”
민석은 봉투의 사라진 경로를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공식 대조기관에 남겼다. 서명은 조심스러웠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돈을 받았다는 확인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범위를 적는 서류였다.
회의가 끝나고 민석은 소희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소희가 먼저 직원에게 맡긴 짧은 메모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저를 사건의 증인으로만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제 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러 온 사람입니다.’
민석은 메모를 읽고 자신이 아까 했던 질문을 돌아봤다. 사라진 봉투를 누가 가져갔는지 묻는 순간 소희의 본래 요청은 또 뒤로 밀려났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과거를 설명할 의무가 없었다. 민석은 메모 사본의 보관 범위를 확인한 뒤 서류를 돌려보냈다.
하은은 외부 감사 회의에서 오늘 밝혀진 사실과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두 칸으로 나눴다. 지급 이의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됐다. 실제 지급액과 최종 소유자는 확인 중이다. P01과 050, M36이 서로 다른 의미였다는 것은 원본 설명서로 확인됐다. 누가 외부 자료에서 이를 한 덩어리로 묶었는지는 확인 중이다.
준성이 표를 보더니 말했다. “결국 확정된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네.”
“그런데 이제 모르는 걸 안다고 쓰진 않잖아.” 민석이 답했다.
오후에는 보관기관으로부터 한 가지 안내가 더 왔다. 사본 B의 별도 전달 기록은 계약상 일정 기간 보존 대상일 수 있으며, 계약 업체의 이관 내역과 함께 대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관은 자료 보존을 요청했고 민석에게는 추측에 근거한 공개 발언을 삼가 달라고 했다. 단순한 서류 이관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용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민석은 저녁에 준성을 만나 따뜻한 국수를 먹었다. 준성은 불쑥 물었다. “처음 네 통장에 백억이 찍혔을 때, 정말 부자가 된 기분이었냐?”
“몇 초 동안은.”
“그 몇 초가 여기까지 왔네.”
“그렇지. 그런데 내가 진짜 부자가 됐다면 그 사람의 문의서는 끝까지 못 봤을지도 몰라.”
준성은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 “다음에 네 원장에 돈이 보이면, 네가 제일 먼저 뭘 할지 이제 알겠네.”
“누구 돈인지 물어볼 거야.”
“내 돈이라고 하면?”
“그럼 네 돈이라는 증거부터 보자.”
그들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민석은 시계의 작은 날짜 창을 바라봤다. 11월 30일. 어제까지 자신의 미래를 위협하던 날짜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오후 세 시. 한서윤은 기사 초안을 수정했다. 제목에서 ‘천억’이라는 단어를 지웠다. 대신 ‘십 년 만에 재개된 최초 지급 대조’라고 적었다. 편집장은 한참 제목을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은 그날 저녁 집에서 검은 원장을 열었다.
[2026.11.30 09:05 예정 작업: 미실행]
[050-C 대체 보관인: 무효 유지]
[P01 지급 상태: 대조 중]
오랫동안 그를 위협하던 확정적인 말들이 ‘대조 중’이라는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안도하면서도 이상한 허전함을 느꼈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미래를 판정하던 프로그램이, 다른 한편에서는 한 사람의 오래된 문의조차 정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앱을 닫으려는 순간 알림이 떴다.
[신규 분기 생성: P00]
[생성 시각: 2016.10.25 16:43]
[상태: 인계 확인 필요]
[연결 물품: 별도 전달 봉투]
민석은 화면을 촬영했다. 자신이 상자를 반출했다는 기록보다 1분 이른 시각이었다. 누가 그 데이터를 등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공식 시스템에 같은 기록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휴대전화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는 검은 원장이 아니라 세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보관기관이 봉투의 이동 경로를 찾기 위해 확인한 운송 접수 목록에서 낯익은 회사명이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수령 요청 회사: 익일금융의 전신과 계약한 외부 업체.'
그 아래에는 개인 이름이 아니라 당시의 업무 코드가 적혀 있었다.
'M36-ORIGIN.'
민석은 오래된 수첩을 펼쳤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숫자가 아닌 질문을 맨 위에 적었다.
‘이 프로그램은 미래를 보여 주려고 만들어졌나, 아니면 과거에 받지 못한 사람을 지우려고 만들어졌나.’
그 순간 원장은 내일의 잔액을 표시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래된 어제의 접수번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제9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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