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는 도시 외곽의 낮은 공장 지대에 있었다. 간판은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철문에는 자산신탁 관련 서류를 보관한다는 표지조차 없었다. 준성이 차를 세우며 말했다.
"불법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마.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문재가 원하는 대로 돼."
"알아. 관리 업체부터 확인하자."
서윤이 계약서의 바코드와 창고 주소를 대조했다. 창고를 운영하는 곳은 오래된 문서 보관 전문 업체였다. 인터넷에 영업 번호와 긴급 열람 담당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서윤은 정식 취재 요청을 했고, 민석은 자신이 기록에 이름이 올라 있는 당사자임을 설명했다.
담당자는 당장 원본을 보여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소유 회사의 청산 관리인 동의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정상적인 대답이네요." 민석이 말했다. "적어도 서류를 막 꺼내 주는 곳은 아니에요."
서윤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럼 보관 목록 중 공개 가능한 서식명과 이관 날짜만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개인정보는 없어도 됩니다."
잠시 후 담당자가 목록을 읽어 주었다. 백억 원 지급 지시서, 채권자 분류표, 외부 감사 반려 기록, 그 밖에 수십 건의 보관 문서가 있었다. 서윤은 공적인 확인을 위한 정보 공개 및 열람 절차를 안내받았다.
"오늘 밤 원본 열람은 어렵겠어요." 서윤이 말했다.
"그렇다고 없는 문서가 되는 건 아니죠." 민석이 답했다.
그는 시간을 봤다. 열 시 십육 분. 자정까지 한 시간 사십여 분이었다. 핸드폰에 나타난 -100억 원과 +100억 원의 상충된 예고도 계속 남아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창고 앞 도로는 조용했다. 주변 건물의 대부분은 작업을 마치고 불을 끈 상태였다. 민석은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두 개의 현실을 비교했다. 한쪽에는 밤 열한 시 오십구 분에 자신이 죽는다는 사진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보관 업체 직원이 실제 목소리로 확인해 준 문서 목록이 있었다.
"여기에 그 문서가 있다면 왜 지금 열어 볼 수 없는 걸까요?" 민석이 물었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보관 계약의 당사자와 열람권자가 따로 있으니까요. 서류가 있다고 아무한테나 보여 주는 곳이면 오히려 더 위험하죠."
그 말이 옳았다. 민석은 잠시 초조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서류에 있다는 이유로 무단 열람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보관처에 정식 이의 신청서를 남기고 기록 보존을 요청했다. 문서가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서윤은 통화 내용을 짧게 정리해 신문사 법무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특정인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말고, 원본의 존재와 열람 절차만 남기는 겁니다. 나중에 증거가 돼요."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곳에 문서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잠깐 짬이 나자 그는 가방에서 학교 앨범 사진을 꺼냈다. 십 년 전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모두가 얇은 티셔츠를 입었고, 민석은 발목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날 그는 대학교 운동장에서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다.
한빛자산신탁 사진에 찍힌 날짜와 같았다.
"보세요. 여기에는 제가 있네요." 그가 말했다.
서윤이 두 사진을 비교했다. "둘 다 정확한 시각을 모르면 같은 날 이동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중요한 단서예요."
민석은 웃었다. "역시 단정은 안 하시네요."
"단정하고 나서 틀리면, 이미 기사를 읽은 사람한테는 수정이 도착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건 정산하고 비슷하네요. 한번 결과를 확정하면 나중에 바꿔도 누군가는 손해를 보니까."
그는 앨범 사진을 다시 넣었다. 도용된 서명의 증거를 찾는 일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준성은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내가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뭔데?"
"원래 그 백억 원의 수취인은 나로 돼 있었어."
민석은 말을 잃었다.
"내가 미래 거래를 처음 이용했을 때, 그쪽에서 보상으로 제안했어. 그런데 계약서를 읽어 보니까 수익자 명단에 내 이름 대신 피해자들이 들어가 있었어. 그 돈을 다 받으면 내가 그들의 반환 청구를 대신 갚아야 한다는 뜻이더라."
"그래서 네 이름을 뺐어?"
"그때는 거절했어. 그리고 다음 사람을 찾으라는 말을 들었지."
민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다음 사람이 나였어?"
"처음엔 그렇게 될 줄 몰랐어. 너한테 메시지가 왔을 때 알았어. 그래도 혹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네가 나보다 숫자를 더 꼼꼼하게 보니까."
"넌 나를 위험에 밀어 넣으면서 내가 똑똑하게 빠져나올 거라고 기대했구나."
준성은 고개를 숙였다. "변명할 생각 없어. 미안하다."
서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을 봤다. 민석은 화가 났다. 친구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올 미래의 빚을 알고도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난 널 믿고 온 게 아니야. 네가 갖고 있는 자료 때문에 온 거야."
"알아."
"앞으로는 필요한 사실을 숨기지 마. 판단은 내가 해."
준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그는 주머니 깊은 곳에 손을 넣더니 오래된 봉투를 꺼냈다. 민석은 봉투를 보는 순간 더 묻지 않았다. 준성이 지금까지 꺼내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듯했다.
준성이 뒷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건 원본이 아니고 복사본이야. 내가 예전에 보관했어."
민석은 그를 노려봤다. "있었으면 진작 꺼내야지."
"원본인 줄 알고 보여 주면 넌 그걸 믿었을 거야. 우선 직접 찾으려고 했던 건 잘한 일이야."
봉투에는 낡은 감열지 영수증과 서류 사본이 들어 있었다. '외부 감사 반려 기록' 하단에 찍힌 이름은 강민석이었다. 그러나 서명은 민석이 오늘 병원에서 본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긴 가로획이 글자 맨 마지막에 붙지 않고 시작 부분에 있었다.
"누가 내 서명을 따라 했어요."
준성이 물었다. "확신할 수 있어?"
"십 년 동안 수천 장 결재했어. 이름을 적을 때 습관이 있어. 심지어 바쁘면 가운데 글자 획을 하나 덜 쓰지. 여기는 너무 완벽해."
서윤이 서류 옆에 병원 접수증의 사본을 놓았다. 두 서명은 똑같았다. 획의 떨림과 잉크가 번진 자리까지 같았다. 사람이 각각 썼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동일했다.
"서명 이미지 한 장을 복사해 여러 문서에 넣은 것 같네요." 서윤이 말했다.
"위조 의심이네요. 아직 감정은 필요하지만요."
민석은 가슴이 조금 풀렸다. 적어도 서류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십 년 전 일을 했다고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서윤이 보관 업체 담당자에게 다시 문의해 원본의 외형과 보관 번호를 확인했다. 복사본에 적힌 번호와 같았다. 그 정보는 중요한 증거가 됐다. 눈에 보이는 미래의 파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법적 절차를 거쳐 보관된 물리적 문서가 존재했다.
복사본 왼쪽에는 작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지급을 '완료'했다는 인장이 아니라, 지급을 '보류'했다는 인장이었다. 민석은 같은 색으로 복사된 잉크를 자세히 봤다. 위조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기록이 말하는 절차는 분명했다. 당시에는 돈을 임의로 내주지 말라는 결정이 있었다.
"채권 보전 자금이라면 채무자 회사가 임의로 빼면 안 되잖아요." 민석이 말했다.
"그렇지. 청산이 진행되는 동안엔 채권자별 권리 확인 절차가 필요해." 준성이 답했다.
서윤이 덧붙였다. "그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당시 기록을 맡은 사람에게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나면서 연락이 끊긴 사람도 많겠죠."
민석은 수첩을 펼쳐 확인 가능한 기관과 사람을 적었다. 보관 업체, 청산 법무법인, 금융기관, 신고 채권자들. 누구 하나의 주장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교차 확인할 대상들이었다.
"오늘 밤 이백억이 생긴다 해도 이 사람들 몫을 내가 대신 받을 순 없어요." 민석이 말했다.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예전의 내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민석은 그 말을 들으며 봉투 안에서 영수증 하나를 꺼냈다. 오래된 지급 정지 확인서였다. 종이 끝에 번진 잉크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도장을 눌렀다는 뜻이었다. 화면에 떠오르는 미래 파일과 달리, 그 종이에는 시간의 흔적이 있었다.
민석은 복사본의 지급 목적을 읽었다.
'미지급 투자자 채권 보전을 위한 별도 신탁 계정 개설.'
"백억 원은 누군가 가져가라고 남겨 둔 돈이 아니었어." 민석이 말했다. "돌려주기 위해 묶어 둔 돈이야."
준성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돈을 먼저 받겠다고 내 이름을 넣었군. 그러려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돌려받을 몫이 줄어들어."
서윤이 종이 위의 채권자 명단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이선주 아버지의 이름도 있었다. 정도현의 회사는 채권 정산 업무를 맡은 곳으로 표시돼 있었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 장부에 연결됐다.
"도현 씨가 이걸 찾았기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겠네요." 서윤이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증거가 없어요. 사망 원인을 단정하면 안 됩니다." 민석이 대답했다.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를 기사로 만드는 것보다 사실을 남기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은행 앱에서 새로운 창이 열렸다.
[분쟁 처리 결과: 추가 증빙 확인]
[원본 서명과 제출 서명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선택 기한 재개]
멈춰 있던 열한 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00:00:10]
"잠깐, 왜 지금?"
민석은 휴대전화를 붙잡았다. 남은 시간은 구십 분이나 되었지만 선택 시계는 별도의 열 초였다. 그는 앱 안에서 세 가지 메뉴를 찾았다. 수락, 거절, 정산 근거 보기. 그가 기한을 멈췄던 이의 신청은 이미 처리됐다는 표시가 나왔다.
[00:00:08]
"거절 눌러!" 준성이 말했다.
서윤은 반대했다. "도현 씨처럼 될 수 있어요!"
민석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원본 서명 불일치를 인정한 메시지. 그러면 누구에게 거절을 보낼지가 중요했다. 지금 열려 있는 것은 어떤 계약일까. 첫 번째 백억 원 정산인가, 서문재가 제안한 입막음 계약인가.
그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상세 내역을 열었다.
[00:00:05]
상세 화면의 맨 아래에 거래번호가 있었다. 'HBT-2016-07'. 십 년 전 채권 보전 신탁의 식별자였다. 그는 숫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원본 복사본 번호와 일치했다.
"이건 내 계약이 아니에요. 도용된 서명이 올라간 계약이에요."
[00:00:03]
민석은 '거절'을 눌렀다.
[선택 사유: 본인 서명 부인]
[00:00:01]
[거절 접수 완료]
화면이 하얗게 바뀌었다. 민석은 숨을 멈췄다. 사망한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주변은 조용했다.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고, 검은 승합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은행 앱이 다시 켜졌다.
[7차 선택 기록 확정]
[수락 0회 / 거절 7회]
[신탁 자금 정산 책임: 강민석에서 분리]
"됐어요?" 서윤이 물었다.
민석은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이너스 백억 원 예고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보관 금액 백억 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처럼 보이던 거래에서 자신의 이름이 분리됐다.
"내 빚은 아니게 됐어요." 민석이 말했다. "하지만 돈을 빼앗긴 사람들은 그대로예요."
준성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윤은 숨을 내쉬었다. 사망 예금주 확인서도, 장례식 사진도 앱에서 사라졌다.
휴대전화가 마지막으로 울렸다.
[제7호 기록 확정에 따라 반환 절차가 시작됩니다.]
[반환 승인자 지정: 강민석]
민석은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마이너스 백억 원을 막은 대가로 또 다른 역할이 주어졌다.
"이번엔 무슨 계약인데?"
승인자 상세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반환받을 권리를 증명한 사람에게만 돈을 지급할 것.]
민석은 한참 그 문장을 봤다. 처음으로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다음 줄에는 날카로운 단서가 붙어 있었다.
[반환 전까지 관리 책임자 신변 위험 등급: 최고]
등 뒤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창고 정문을 비추는 검은 승합차였다.
차 안의 남자가 은색 시계를 들어 보였다.
제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