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승합차의 헤드라이트가 세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민석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방금 일곱 번째 거절이 확정됐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차 안에 앉은 남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서문재는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다. 대신 조수석 창문을 내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역사상 가장 비싼 거래를 취소했군요."
"취소한 건 내 이름을 도용한 계약입니다."
"말은 쉽죠. 이제 누가 그 돈을 돌려줄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찾아봐야죠."
문재가 웃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반환 승인자라면 백억 원의 채권자 명단을 관리할 권리가 생기죠. 그 명단만 제게 넘기세요. 돈은 제가 정산하겠습니다."
"당신이 만든 문제를 당신이 해결하겠다고요?"
"제가 만들었다고 누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민석은 서윤을 바라봤다. 기자는 이미 휴대전화 녹음 버튼을 켜 놓고 있었다. 준성은 차의 번호판을 찍었다. 문재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도 말리지 않았다.
"당신들이 얻은 자료는 대부분 미래 기록입니다. 법정에서 얼마나 인정받을지 의문이군요."
"그래서 오늘은 미래 얘기 안 할 겁니다." 민석이 대답했다. "십 년 전에 보관된 종이 문서를 조사할 거예요. 회계 사본, 채권자 신고서, 입출금 전표. 지금도 존재하는 것들이죠."
문재의 미소가 사라졌다.
민석은 말을 이었다. "아까 은행에서 백억 원이 내 실제 계좌에 없다는 것도 확인했어요. 그럼 당신이 보여 준 돈은 사람을 움직이려는 숫자에 불과하죠. 은행 장부가 아니라 당신들 장부였어요."
"사람을 움직이는 숫자라." 문재가 창문 위에 팔을 올렸다. "강민석 씨는 금융이 원래 무엇인지 참 늦게 배우셨군요. 금리가 바뀌면 가게가 문을 닫고, 주가가 오르면 사람들이 일자리를 옮깁니다. 숫자로 사람이 움직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맞아요. 하지만 그런 숫자를 일부러 조작해 특정 사람에게 책임을 씌우면 사기죠."
차 안은 조용해졌다.
문재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제 제안을 거절하십니까?"
"네."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찾아올 겁니다."
"당신이 시켜서 오는 사람들이라면 기록에 남겠죠."
민석의 대답에 문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창이 올라갔다. 승합차가 돌아나갈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준성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무모해."
"백억 원을 공짜로 준다는 말보다 서류 원본이 더 무섭긴 처음이야."
서윤이 녹음 파일을 저장했다. "우리 손에 있는 건 충분하지 않아요. 하지만 취재를 시작할 이유로는 충분해요."
셋은 근처 스물네 시간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갔다. 따뜻한 국밥을 주문하자 민석은 그제야 배가 고팠다는 걸 느꼈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은 게 거의 없었다. 그는 테이블에 노트를 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적었다. 채권 신고인 확인, 보관 기록 보존 요청, 금융기관 계좌 조회, 사망한 도현의 조사 자료 확인. 공적인 절차가 필요한 일은 해당 기관에 맡기기로 했다.
"문재가 다른 사람의 기록을 지워 버리면 어떡해?" 준성이 물었다.
"그래서 복사본을 나눠 둬야지."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복사본의 양이 아니라 출처예요. 누가 언제 만들고 어떻게 보관했는지가 확인되지 않으면 수십 장 있어도 소용없어요."
민석은 그 말을 노트 맨 위에 썼다. 자기가 할 일은 초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거래의 책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정이 되기 십 분 전, 서윤의 동료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한빛자산신탁 청산 절차를 맡았던 법무법인에 과거 공개된 재판 기록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자료에는 그동안 보도되지 않았던 계좌 하나가 있었다. 백억 원의 지급 정지 가처분이 걸렸던 별도 보관 계좌였다.
"실제 돈이 있었네요." 민석이 말했다.
"있었다는 기록이요. 현재 잔액과 귀속은 확인해야 해요." 서윤이 정정했다.
그 신중한 말투가 민석에게는 오히려 희망처럼 들렸다. 미래 앱의 숫자보다 오래된 종이 기록이 강했다. 보관된 현금이 실제로 남아 있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적어도 추적할 수 있는 경로가 생겼다.
국밥이 식을 무렵, 민석은 한빛자산신탁 피해자들이 십 년 동안 무엇을 겪었는지 궁금해졌다. 채권 신고서에는 투자금만 남아 있었다. 그 돈을 마련하려고 어떤 집은 집을 팔았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퇴직금을 맡겼을 수도 있었다.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선주 씨 가족부터 연락드려야겠어요." 민석이 말했다.
서윤이 수첩을 덮었다. "오늘 밤에는 하지 마세요. 급히 사실을 전달하면 가족들이 확인되지 않은 기대를 품을 수 있어요. 백억 원이 실제로 남아 있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맞아요.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섣불리 말하면 안 되겠죠."
"반환이 가능한지부터 확인하고, 동의받은 분들과 순서대로 이야기합시다."
민석은 그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늦게까지 친구와 일하고 있으니 먼저 주무시라는 내용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달랐다. 그는 어머니에게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면서도 백억 원을 받지 않기로 했다. 그 선택이 내일을 바꿀지는 아직 모른다.
준성이 식당 계산대에서 카드를 꺼냈다. 민석이 손을 잡았다.
"내가 낼게."
"왜?"
"내 돈으로 계산하고 싶어서."
준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카드 지갑을 집어넣었다. 민석은 실제 계좌에 있는 잔액을 확인하고 식사비를 결제했다. 식당 주인이 영수증을 건네주었다. 아주 평범한 종이였다. 민석은 그것을 접어 노트 사이에 끼웠다. 은행 앱에 예고가 뜨지 않는 결제를 하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서윤은 웃으며 말했다. "이걸 왜 보관하세요?"
"오늘 내가 한 거래라는 걸 증명하는 영수증이니까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습관이 돼 버렸나 봅니다."
준성이 물었다. "그럼 원래 네가 원하던 돈 버는 인생은?"
민석은 국밥집 유리창 너머의 불빛을 보았다. 상가 건물의 창문마다 누군가 야근하고 있었고, 도로에는 밤늦게 배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도 그중 하나였다.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돈 벌어야지. 월급으로도 벌고, 투자할 수도 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누가 위험을 부담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싶어."
"예고가 다시 뜨면?"
"적어도 무작정 따라가지는 않을 거야."
서윤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민석은 무슨 제목으로 기사를 쓸지 묻지 않았다. 사건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사 제목부터 정한다면 다시 숫자가 사람을 앞서게 될 것 같았다.
식당을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사만 팔천 원 택시비를 적은 흔적이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예언이 맞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예언이 누구의 돈을 움직이는지 묻고 있었다. 겨우 이틀 사이의 변화였다.
그는 첫 줄 밑에 작은 문장을 적었다.
'돈을 받기 전, 받을 이유부터 확인한다.'
이 문장은 예측 기록이 아니었다. 앞으로 자기가 지키기로 한 규칙이었다.
11시 58분. 민석의 휴대전화에 새 알림이 나타났다.
[미래 정산 기록 제7호]
[확정 시각: 23:59]
[최종 진술 대기]
준성이 화면을 보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건데?"
민석은 아까 들었던 미래 음성 파일을 떠올렸다. '이 정산을 수락하면 안 된다.' 그 문장을 그대로 말한다면 미리 녹음된 미래가 현실이 된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서윤이 물었다. "기록이 요구한 말이 있어요?"
"없어요. 진술만 하래요."
민석은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자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서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자금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는 현재 존재하는 증거와 당사자들의 권리로 판단해야 한다. 누구의 내일도 거래 대금으로 잡지 않겠다."
화면에 파형이 생겼다. 그가 말한 문장은 미래 음성에 들어 있던 말과 달랐다.
[최종 진술 접수]
[미래 정산 기록 제7호: 변경됨]
11시 59분. 정산 앱이 갑자기 꺼졌다.
평소 은행 앱의 홈 화면이 나타났다. 잔액은 삼백여만 원. 지난 이틀을 뒤흔든 백억 원도, 마이너스 정산도, 두 개의 선택 버튼도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어요." 민석이 말했다.
준성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자신의 예측 기록도 더 이상 새로고침되지 않았다. 서윤의 기사는 아직 한 줄도 출고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녹음 파일과 실물 문서 사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말 끝난 걸까요?" 서윤이 물었다.
민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래를 보여 주는 앱이 사라졌다고 해서 한빛자산신탁 피해자들의 돈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사망한 도현의 의문도 남았다. 서문재라는 남자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숫자를 보고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민석은 회사에 출근했다. 팀장은 어제 보고서를 왜 늦게 냈느냐고 따졌고, 신입은 커피를 내려 주었다. 한밤중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별다르게 변하지 않았다.
출근길에 그는 평소처럼 지하철을 탔다. 개찰구에서 카드가 찍히고, 승강장 안내 방송이 울리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는 며칠 전 쓰러진 남성을 돕느라 급행열차를 놓치고 택시비 사만 팔천 원을 냈던 일을 떠올렸다. 미래 예고를 처음 믿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날의 자신은 예상 금액이 맞았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 쓰러진 사람을 도왔다는 사실도 있었다. 그 행동이 예고에 포함돼 있었다고 해도, 민석은 다시 같은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청할 것이다. 돈을 잃는다는 숫자가 먼저 보인다고 해서 외면할 이유는 없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은 보고서 마지막 표의 합계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민석은 다시 계산해 숫자를 수정했다. 잘못된 합계를 찾아내는 데는 예지 능력이 필요 없었다. 원본 데이터를 확인하고, 누락된 항목을 찾고, 작성 책임자에게 물으면 됐다.
그는 그 단순한 과정에서 묘한 위안을 얻었다. 숫자는 여전히 틀릴 수 있었다. 그러나 틀린 숫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죽거나 내일이 사라질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확인하고 고칠 수 있으면 됐다.
오전 열 시 십칠 분. 민석은 전날의 종이 노트를 책상 서랍에서 꺼냈다. '확인된 사실'과 '확인할 사실'을 다른 색 펜으로 구분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이선주 가족이었다. 병원비를 누가 대신 냈는지 궁금하다는 연락이었다.
민석은 아직 모른다고 답했다. 대신 오래된 채권 신고서에 관한 확인 절차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자 휴대전화 화면이 한 번 깜박였다.
[내일의 정산: +0원]
[예상 반영 시각: 10:18]
[거래 상대방: 본인]
민석은 그 숫자를 한참 바라봤다. 어제였다면 0원짜리 예고를 하찮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아무도 돈을 잃지 않고 아무도 누군가의 선택을 빼앗지 않는 거래. 준성이 성공이라고 불렀던 0퍼센트의 정산이었다.
10시 18분. 화면이 꺼졌다. 어떤 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민석은 노트에 짧게 적었다.
'첫 번째 검증 가능한 정산. 0원.'
그리고 서랍을 닫았다.
하지만 오후 세 시가 되기 전, 서윤에게 긴급 전화가 왔다.
"강민석 씨. 도현 씨가 죽기 전에 보낸 메일이 하나 더 발견됐어요. 지금 바로 들어보셔야 해요."
"무슨 메일이요?"
"당신한테 보낸 거예요. 그런데 수신 날짜가 내일로 표시돼 있어요."
민석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서윤이 말을 이었다.
"첨부 파일 제목이 '원장 가입자 목록'이에요. 그 안에 강민석 씨 이름이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이름들이 수백 개 있어요."
민석의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 앱에는 은행 로고도 버튼도 없었다. 검은 화면 위로 하얀 숫자 하나가 나타났다.
[내일의 정산: -1,000,000,000,000원]
마이너스 일조 원.
그 아래에는 처음 보는 선택지가 있었다.
[이 거래는 개인의 선택으로 종료할 수 없습니다.]
[공동 정산 참여자: 413명]
민석은 숨을 고르고 서윤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화면에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원장 접속 인원: 414명]
강민석이 가입한 순간, 숫자가 하나 늘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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