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접속 인원: 414명]
민석은 그 숫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사백열네 명.”
사람의 이름이라면 얼마든지 익숙해질 수 있는 숫자였다. 대학교 강의실을 다섯 개쯤 채우거나, 중소기업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인원. 하지만 그들의 내일에 붙은 가격이 마이너스 일조 원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회사 복도 끝의 복합기가 종이를 뱉었다. 누군가 인쇄한 회의 자료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사무실이었다. 민석은 휴대전화를 쥔 채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서윤 씨, 가입자 목록부터 설명해 주세요.”
“실명은 일부만 보입니다. 대부분은 번호와 가입 시각, 연결된 채권 코드뿐이에요. 1번부터 413번까지 있고, 마지막 줄에 오늘 오후 세 시 십이 분, 414번 강민석.”
“제가 신청한 적 없는데요.”
“메일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가입이라는 단어를 믿지 말 것. 이 원장은 동의를 가입으로 표시한다.’”
정도현은 죽기 전에 자신에게 경고를 남겼다. 수신 날짜가 내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메일 헤더는 평범했다. 서윤은 원본을 손대지 않고 보존해 두었다고 했다.
“마이너스 일조 원은 뭡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파일에 명세표가 있는데 합계를 검증하기 전엔 손실액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민석은 숨을 골랐다. 일조 원은 거대한 숫자였지만,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확인하기 전에 겁부터 먹는다면 서문재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캡처된 화면이 있으면 보내 주세요. 개인정보는 가려서요.”
“원본은 건드리지 않고 분석용 사본을 만들게요. 대신 지금 회사에 있어요?”
“네.”
“혼자 있지 마세요. 사무실을 벗어나기 전에 준성 씨에게 연락해요.”
민석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두 시간 전에는 자신의 빚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얼굴도 모르는 사백열세 명의 숫자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상계단의 센서등이 꺼졌다. 민석은 발을 굴러 다시 불을 켰다. 이곳에서는 휴대전화 숫자 말고도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있었다. 이상하게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는 잠깐 회사 내부 업무 시스템을 떠올렸다. 채무 관리 프로젝트를 맡았던 때, 한 고객의 채권이 여러 부서에 나누어 기재되면서 회계 보고서 합계가 실제보다 크게 나온 적이 있었다. 신용관리팀에는 원금이, 고객지원팀에는 이자 포함 예상 채권이, 회계팀에는 대손충당금 산정을 위한 위험 노출액이 있었다. 회의 자료에서 숫자 세 줄을 한꺼번에 더한 신입 직원이 '돈을 세 배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민석은 그때 원본의 식별 번호를 맞춰 보고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항목을 분리했었다.
'원장은 채권자가 아니라 숫자만 보는구나.'
그는 413이라는 숫자에 얼굴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413명의 피해자가 정말 있는지, 일부는 동일 인물의 여러 기록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은 숫자 하나와 교환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원장이 예고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거액을 벌 수 있다면 어떨까. 처음 며칠 동안 벌었다고 생각했던 수익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어머니의 대출금을 갚고, 회사에 사직서를 낸 뒤, 남은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민석은 그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돈을 누구에게서 받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방화문 바깥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팀장이었다.
“강 대리, 결산표 어디 있어?”
“공유 폴더에 올려 두었습니다.”
“이상하게 잔액이 두 번 잡혔어.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확인해 줘.”
민석은 짧게 대답했다. 현실에서도 같은 금액이 두 번 잡히는 일은 있었다. 다만 현실에는 수정 분개를 승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반면 이 낯선 원장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은 채 수정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을 강제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가 준성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는 첫 신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받았다.
“봤지?” 준성이 말했다.
“네가 내 휴대전화를 보고 있어?”
“아니. 내 원장에도 떴어. 공동 정산 풀 가동. 가입자 사백열네.”
“너도 가입자야?”
준성이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나는 열람 권한만 있어. 그 차이 때문에 십 년 동안 살아남았고.”
열람 권한만 있어도 살아남는다는 말이 민석의 가슴에 걸렸다. 참가자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기에 친구가 그런 표현을 쓰는가.
“지금 원장에 나오는 금액이 실제 빚이야?”
“원장 속에선 그렇게 취급하지. 하지만 그걸 우리 법정에서 유효한 채무라고 단정하면 안 돼. 네가 일곱 번째 거절에서 배웠잖아.”
“그럼 일조 원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넘어온 권리를 한 장부에 다 올렸을 때의 최대 노출액이야. 누가 입금했는지, 같은 돈이 몇 번 중복됐는지도 몰라.”
민석은 벽에 기대 수첩을 폈다. 어제 적은 문장 아래 새 줄을 만들었다.
'표시 금액 ≠ 실제 채무. 정산 대상 인원 ≠ 동의한 사람.'
통화가 끝나자 원장 화면이 바뀌었다. 숫자 아래 작은 글씨가 추가됐다.
[공동 정산 자격: 유보]
[총 노출액: 1,000,000,000,000원]
[확인된 채권액: 0원]
[확인되지 않은 권리: 413건]
확인된 채권액은 영 원이었다. 조금은 안심할 만한 표기였지만, 안심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확인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민석은 회사로 돌아와 팀장에게 병원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며 조퇴를 신청했다. 곧장 건물 앞 커피숍에서 서윤과 만났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었지만 파일을 바로 보여 주지 않았다.
“이름부터 보기 전에 조건이 있어요. 목록에 적힌 사람을 당장 찾아가지는 말아요. 누가 정말 피해자인지 모르고, 개인정보 출처도 불분명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다음. 이걸 기사로 쓰려면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필요해요.”
서윤은 화면을 돌렸다. 표에는 가입자 번호, 기록 생성일, 채권 코드, 수취 예정일이 있었다. 2016년에 생성된 기록 사이로 내일 날짜의 기록이 끼어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채권 코드가 세 번 붙었다.
“잠깐.” 민석이 손가락으로 숫자 하나를 가리켰다. “이 코드 HBT-2016-07, 제가 그동안 쫓던 백억 원 거래번호잖아요.”
“전체 명세에 아홉 번 나와요.”
“그럼 적어도 아홉 건이 같은 원본에서 나온 파생 거래일 수 있어요. 원장을 단순 합산하면 중복이 생기죠.”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할 손실로 볼 수 없다는 거군요.”
민석은 표를 아래로 내렸다. 맨 끝 414번 자신에게는 채권 코드가 없었다. 금액도 없었다. 대신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승인자.'
“전 참가자가 아니라 승인자잖아요?”
“앱은 참가자라고 표시했어요.”
“그게 문제예요. 권리를 심사하는 사람을 빚을 진 사람으로 뭉뚱그린 거예요.”
“실수일까요?”
민석은 창밖으로 달려가는 오토바이를 바라봤다. 서문재가 계약서의 빈칸을 보여 주지 않던 장면이 떠올랐다.
“실수라면 고치면 돼요.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면, 누군가 저를 이용하려는 거죠.”
민석은 명세표를 정렬해 중복된 거래번호를 세었다. 표 안에는 정확한 실명이 아닌 식별값이 대부분이라 개별 인물을 특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거래는 동일한 원본을 다른 말로 반복하고 있었다. ‘원금 지급’, ‘원금 지급의 미래 대체’, ‘미지급 예상액’, ‘예상액에 대한 보증’. 네 가지가 각기 다른 청구권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 일조 원을 확정 손실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다.
서윤이 종이에 금액을 쓰며 말했다.
“도현 씨도 여기서 멈췄을 거예요. 자기가 본 돈이 누구 돈인지 알려고 했거든요.”
“그분은 왜 죽은 거죠?”
“모릅니다.”
서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기자가 모른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도현의 마지막 행적과 사망 경위는 조사 중인 사건의 자료일 뿐, 원장 때문에 살해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분이 만나려고 한 사람이 서문재였다는 건 확인했어요.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연락이 끊겼고, 며칠 뒤 추락한 곳에서 발견됐어요.”
“그럼 준성은요?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준성 씨 진술에는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계속 확인하려는 거고요.”
민석은 표를 다시 봤다. 그는 친구에게 의심을 거두지 못한 자신이 싫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심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원장 목록에는 도현 씨 이름도 있나요?”
“17번이에요. 그런데 상태가 '종료'가 아니라 '이관 대기'예요.”
“사망한 사람의 계약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고요?”
“그래서 더 위험한 거예요. 이 장부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구분해 보호하는 법적 절차도 건너뛰려 해요.”
민석은 17번 항목 옆에 작은 별표를 했다. 원장이 무엇을 예고하든 도현의 유족이 갖는 권리부터 확인해야 했다. 누구의 죽음도 자동으로 남의 채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때 노트북 스피커에서 짧은 알림음이 울렸다. 가입자 207번의 상태가 바뀌었다.
[207번: 강제 정산 예정]
[예정 금액: -74,000원]
[남은 시간: 00:14:59]
서윤이 화면을 닫으려 했다. 다른 사람의 내일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곧 팝업 창이 하나 더 나타났다.
[207번의 선택이 정산되지 않으면 414번에게 이관됩니다.]
민석은 그제야 서문재가 자신에게 맡기려 한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백열세 명의 돈을 대신 갚으라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선택에 대신 서명하라는 것이었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승인해요?”
원장이 대답하듯 한 줄을 띄웠다.
[승인자는 당사자를 확인할 의무가 없습니다.]
민석은 곧바로 수첩에 적었다.
'그런 승인은 승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표정한 화면을 향해 말했다.
“이름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당사자가 동의한 범위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십오 분짜리 시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 하단에 문장이 새로 떴다.
[승인자가 원장 규칙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의 제기 기록은 공동 참여자 전원에게 전달됩니다.]
서윤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백열세 명에게 민석의 말이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노트북에 답장이 한 통 도착했다.
발신자 207번.
'누구세요? 제 내일에 왜 당신 이름이 뜹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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