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하지 않으면 백억 원을 받는다고?"
민석은 휴대전화와 꺼진 모니터를 번갈아 봤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선택을 거절하면 백억 원을 잃는다고 했다. 이제는 서명하지 않으면 백억 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같은 계좌에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두 예고가 공존하고 있었다.
[선택 미이행: -10,000,000,000원]
[서명 미이행 보상: +10,000,000,000원]
두 금액을 합치면 0원이었다. 민석은 종이에 빠르게 써 내려갔다. '순액 0원. 거래 상대방 다름. 조건 충돌.'
"상쇄시키면 되는 거 아냐?" 준성이 물었다.
"돈은 상쇄할 수 있지. 그런데 계약은 서로 다른 사람과 체결했는데 상쇄하면 안 돼. 누가 나한테 받을 권리가 있는지부터 봐야 해."
서윤이 휴대전화 화면을 가리켰다. "변경 신청인 서문재는 무슨 권리로 돈을 주겠다는 거죠?"
준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곧 올 테니까."
도어록이 울린 것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누군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철문이 열리고 회색 정장 남자가 들어왔다. 카페에서 자신을 정산 대리인이라 소개한 사람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남자는 키가 컸고 목소리가 낮았다. 오른쪽 손목에는 은색 시계가 있었다.
"강민석 씨. 다시 보니 반갑군요."
민석은 그를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오래된 단체 사진의 역광 속 얼굴. 카페에 나타난 대리인이 움찔한 이유. 미래 음성에 끼어든 목소리까지 하나로 이어졌다.
"서문재 씨 맞죠?"
"맞습니다."
"그럼 사진에 찍힌 사람도 당신이고요."
"사진이라는 건 늘 프레임 바깥을 감추죠."
문재는 손목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계 뒷면에는 숫자 07이 새겨져 있었다. 민석은 꿈속 은행 창구에서 그 시계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십 년 전에도 이걸 차고 있었습니까?"
"당신이 본 기억이 진짜라면, 그렇겠죠."
준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건을 바꾼 이유가 뭡니까?"
"조건을 바꾼 적 없습니다. 두 번째 거래를 제안했을 뿐이죠. 첫 거래가 불리하다고 느끼는 분에게 선택지를 더 주는 겁니다."
"실제로는 선택을 더 어렵게 만들었죠." 민석이 말했다.
문재가 미소 지었다. "회계 담당자답군요."
민석은 오래된 출입증을 꺼냈다. "이걸 발급한 것도 당신입니까?"
"당신의 고용 기록이죠."
"정식 직원 명단에 없었습니다."
"그런 명단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서윤이 말을 끊었다. "그럼 한빛자산신탁 청산 때 무슨 일을 했는지부터 이야기하시죠. 당신 이름은 당시 기사에도 공시에도 없었어요."
문재는 서윤을 쳐다보았다. "기자들은 언제나 종이에 찍힌 이름만 찾더군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돌려 말하지 마세요." 민석이 말했다. "내가 왜 백억 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까?"
문재는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가 덮어 버린 창문에는 바깥 풍경 대신 모니터의 흰빛이 반사됐다.
"시장은 미래의 현금 흐름을 현재 가치로 바꿉니다. 주가도 채권도 보험도 그런 약속 위에 세워져 있죠. 우리는 그 과정을 하루만 앞당겼습니다. 내일의 선택으로 확정될 돈을 오늘 장부에 쓰는 기술이죠."
"그건 기술 설명이고, 백억 원의 출처는 아닙니다."
"당신은 언제나 같은 질문을 하는군요."
민석은 그가 내민 태블릿을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를 물었다.
"당신이 정말 미래를 다 안다면, 왜 사람한테 서명을 받아야 합니까?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으면 기다리면 되잖아요."
문재가 손목시계를 만졌다. "미래는 결과만 있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를 선택했다고 믿는 사람도 필요하죠."
"믿게 만들면 된다고요?"
"사람은 누구나 선택이 많을수록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택을 늘려 줄 뿐입니다."
"만 원을 쓰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약값이 제 정산으로 나온 것도 자유로운 선택입니까?"
문재는 이선주의 이름을 듣지도 않았는데 그 이야기를 이해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그 여성을 도운 건 당신의 의지였죠. 누구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에 가격을 붙였잖아요."
"당신이 보는 숫자는 해석입니다. 원장을 보는 사람이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저는 간섭하지 않아요."
서윤이 메모를 멈추었다. "간섭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 계좌에 나타나는 버튼은 왜 설계했죠? 수락과 거절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어느 쪽이든 당신이 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모든 계약에는 양자택일의 요소가 있습니다."
"아니요." 민석이 말했다. "거래를 하지 않을 권리도 있어요. 돈을 빌리지 않을 권리, 조건을 보류할 권리, 상대방을 확인할 권리. 당신은 그걸 화면에서 숨겼어요."
문재는 처음으로 민석을 오래 바라봤다. "원본 대조를 누른 사람은 몇 년 동안 한 명도 없었어요. 그 메뉴가 보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누군가는 볼 수 있게 만들어 놨다는 말이네요."
"최초 설계자의 요구였죠."
"당신이 설계자가 아닙니까?"
"저는 운영자입니다."
준성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민석은 그가 왜 긴장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문재는 말을 이었다.
"처음 이 장부를 만든 사람들은 선의를 이야기했습니다. 보험금을 하루 빨리 지급하면 치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기업의 자금 부족을 미리 알면 도산을 막을 수 있다. 누군가 망하기 전날 자금을 옮길 수 있다면 사람을 구할 수도 있겠죠."
"그럼 실제로 사람을 구했나요?"
문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석은 답 대신 문재의 손을 봤다. 손가락에는 오래된 반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시계 뒤쪽 피부는 햇빛을 받지 않아 유난히 희었다.
"원래는 사고를 막는 도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민석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돈을 먼저 가져가느냐를 정하는 도구가 됐어요."
"도구 자체에 선악은 없습니다."
"사람한테 원본 서류를 안 보여 주고 백억을 받으라고 하는 순간부터 그건 도구가 아니죠. 함정이에요."
문재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강민석 씨는 돈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아니에요. 돈이 필요하다는 걸 숨기지도 않죠. 다만 출처를 모르는 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군요."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백억 원이 있다면 어머니의 생활이 얼마나 편해질지 계산하고 있었다. 빚을 모두 갚고, 집을 사고, 일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숫자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그래서 더 확인해야죠." 그가 말했다. "돈이 필요하니까 남의 돈까지 제 돈인 척할까 봐."
문재의 표정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는 태블릿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제야 보여 줄 만한 문서가 있다는 듯, 한 장씩 펼치기 시작했다.
문재가 태블릿을 켰다. 화면에는 여섯 개의 계약서가 순서대로 떠 있었다. 전부 민석이 반려한 문서였다. 첫 번째는 원본이 없었다. 두 번째는 위임자가 달랐다. 세 번째는 수익자가 비어 있었다. 여섯 번째에는 도현의 이름이 등장했다.
"이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까?" 민석이 물었다.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과거의 여섯 번이 아니라?"
"미래 장부에서는 과거와 가능성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일단 제출된 기록은 이력으로 남으니까요. 당신은 여섯 개의 가능한 결말을 거부했습니다. 그중 어느 것도 현실이 되지 않았죠."
민석은 숨을 삼켰다. 여섯 번 거절했지만 기억이 없는 이유가 설명됐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않은 선택을 이력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그럼 일곱 번째 수락은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말입니다. 아직 확정되진 않았죠."
서윤이 펜을 들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해요. 당신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미래를 제시한다는 뜻이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확률이 높은 경로를 선정하죠. 사람은 제시된 경로를 보고 반응합니다. 그 반응이 다시 확률을 바꿉니다."
"사람을 조종한다는 말을 복잡하게 하시네요."
문재는 서윤의 비난을 부정하지 않았다.
민석은 계약서 한 장을 집었다. 문재가 직접 준비해 온 두 번째 제안서였다.
[계약 내용: 미서명 보상]
[정산 금액: +10,000,000,000원]
[상대방: 서문재]
[부대 조건: 한빛자산신탁 관련 기록 영구 봉인]
"이거였군요."
문재는 미소를 유지했다.
"돈을 줄 테니 묻지 말라는 뜻이네요."
"당신에게는 아주 관대한 제안입니다. 수락하면 당신 계좌에 실제 현금이 들어옵니다. 이후의 문제는 제가 처리하죠."
"누구 돈으로?"
문재는 답하지 않았다.
"왜 백억 원입니까?" 민석이 다시 물었다. "사라진 고객 돈과 똑같은 액수인 이유가 뭡니까?"
준성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답하세요. 지금까지 모두가 그 돈 때문에 망가졌습니다."
문재는 처음으로 굳은 얼굴을 했다. "박준성 씨, 당신은 백억 원을 벌었을 때 원칙을 따지지 않았죠."
"그게 제 잘못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아직도 가난하군요."
민석은 문재가 제안한 두 번째 계약의 부속 조항까지 읽었다. 보상금은 현금으로 지급될 수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반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지는 끝내 나와 있지 않았다. '관련 기록 영구 봉인'이라는 조항은 금액보다도 더 명확했다.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권리를 증명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봉인 대상이 채권자 명단까지 포함합니까?"
문재가 대답했다. "법에서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처리됩니다."
"그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문서에 써 주세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 없으면 왜 계약서가 있어요?"
민석은 다른 종이에 조건 세 개를 적었다. 지급 재원, 반환 책임, 봉인 범위. 어느 것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세 칸 모두에 붉은색 물음표를 그렸다.
서윤이 말했다. "답을 못 하는 조항이 세 개나 있어요. 그런데 오늘 당장 계약하라고요?"
문재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계를 보며 선택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다. 민석은 이제 그 말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다. 사람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 서류를 읽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게 거액의 예고가 가진 가장 강한 힘이었다.
민석은 서류를 반듯하게 접었다. "오늘 밤까지 봉인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이 본 첫 예고대로 정산이 처리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조금 전에는 미서명 보상도 보여 줬잖아요."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니까요."
민석은 문재가 남긴 계약서를 봉투에 넣지 않았다. 아직 서명이 없는 제안서와 이미 확정된 계약서를 혼동하면 안 됐다. 그는 서류 맨 위에 볼펜으로 크게 적었다. ‘미수락 제안, 증빙용 사본’.
문재는 시계를 차고 문으로 향했다. "강민석 씨. 당신이 실제로 서명했던 문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에 찾아보세요. 다만 그 문서가 나오면 당신이 지키고 싶던 사람도 위험해질 겁니다."
그가 떠난 뒤 민석은 오래된 사진을 다시 꺼냈다. 한빛자산신탁 직원들과 자신이 서 있는 사진. 그는 사진의 구석에 놓인 유리컵을 확대했다. 투명한 컵의 반사면에 종이 한 장이 비쳐 있었다. '100억 원 지급 지시'라고 적힌 문서였다.
문서 하단에는 두 개의 서명란이 있었다. 하나는 강민석. 다른 하나는 서문재.
민석은 방금 떠난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명하면 자신의 사람이 위험해진다는 경고. 하지만 그가 서명했던 것이 돈을 가져오는 동의서인지, 돈을 돌려주는 요청서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서윤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건 백억 원의 사용처가 아니라, 원본 서류의 목적이네요."
"찾는 데 남은 시간이 네 시간입니다."
민석은 방금 받은 미서명 보상 계약서의 끝을 바라보았다. 작은 바코드 아래에 내부 보관처 주소가 있었다. 한빛자산신탁이 문을 닫은 뒤 자료를 이관했다는 외곽 창고의 위치였다.
"여기로 가 봅시다."
준성이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민석의 휴대전화는 또 한 번 울렸다.
[정산 예상 결과 변경]
[서류 원본이 발견될 경우, 현재 잔액이 아닌 타인의 잔액에 정산이 반영됩니다.]
누구의 잔액인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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