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세 번 반복해 들었다. 세 번째에도 문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정산을 수락하면 안 된다.'
그는 손가락으로 음성 파일의 파형을 문질렀다. 마지막에 끼어든 남자는 관리인 4번처럼 차분하게 말했지만 억양은 달랐다. 무언가를 오래 기다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녹음이 조작됐을 수도 있죠." 서윤이 말했다.
"제가 그 말을 실제로 하게 만들려고 보낸 걸 수도 있어요."
"그래서 더 위험해요. 예언을 들은 사람이 예언대로 행동하면, 예언이 맞아서 그런 건지 들었기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할 수 없잖아요."
민석은 동의했다. 그는 장부에 '음성 선공개 - 자기실현 가능'이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는 반드시 기록에 없는 말을 하기로 했다. 우선 정산 앱을 켜지 않고 실제 은행에서 거래 내역을 발급받아야 했다. 환상과 진짜를 분리할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두 사람은 은행의 스물네 시간 자동화코너로 향했다. 창구 업무가 끝난 시간이었지만 현금자동입출금기는 켜져 있었다. 민석은 실물 체크카드를 넣어 잔액을 확인하고 종이 영수증을 뽑았다. 급여와 환급금이 반영된 삼백여만 원만 표시됐다. 백억 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계까지 속이지는 못하네요." 서윤이 말했다.
민석은 통장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찾아 보았고, 기존 입출금에는 특별한 항목이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이어 은행의 공식 고객센터 번호로 연락했다. 야간에는 상세 대면 확인이 어렵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적어도 지금 발급된 잔액조회 기록에 백억 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내일 영업시간에 다시 확인하고 서면 확인도 받아야겠습니다." 민석이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 보안 점검을 실행했다. 비정상 프로그램이나 최근 설치된 낯선 앱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화면 안에는 여전히 은행 로고와 함께 백억 원짜리 잔액이 떠 있었다. 서윤이 옆에서 같은 화면을 봐도 숫자가 보였지만, 은행 기계와는 연결되지 않았다.
민석은 종이 영수증과 휴대전화 화면을 나란히 놓았다. 전자는 은행 장부의 현재를 보여 주었고, 후자는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어떤 계약을 보여 주었다. 둘이 같은 물건인 척했던 것이 문제였다.
은행에서 나오자마자 화면 상단의 잔액이 변했다.
[현재 잔액: 3,287,901원]
백억 원이 사라졌다.
민석은 안도하기도 전에 새로운 알림을 받았다.
[정산금 별도 보관으로 전환]
[보관 금액: 10,000,000,000원]
[보관 주체: 제3자]
"도망간 돈이 다른 계좌에 있다는 뜻이네요."
서윤이 물었다. "누가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걸 찾아야겠죠."
마침 준성이 나타났다. 은행 앞 도로에 세운 차는 검은 승합차가 아니라 낡은 경차였다. 그는 창문을 내려 두 사람을 불렀다.
"타. 보여 줄 게 있어."
이번에는 서윤이 먼저 뒷좌석에 앉았다. 대신 자신의 위치를 동료 기자에게 공유했다. 민석도 어머니에게 저녁 약속 장소를 알려 두었다. 준성은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나를 너무 믿지 마."
차가 향한 곳은 시 외곽의 작은 공유 사무실이었다. 안에는 컴퓨터 세 대와 대형 모니터 하나뿐이었다. 벽에는 시장 지수 그래프가 아니라 시간대별 입출금액이 줄지어 있었다.
"내가 예전에 쓰던 예측 기록이야." 준성이 설명했다. "돈을 벌기 전과 번 뒤, 실제 정산된 금액을 비교했어."
민석은 모니터에 걸린 숫자를 훑었다. 주가도 환율도 아니었다. 특정 날짜의 입출금액과 예정액, 결과를 분리한 장부였다. 몇몇 줄은 정확히 일치했고 몇몇 줄에는 붉은 표시가 있었다.
"이상한데?" 민석이 말했다. "수익이 확정됐다는 거래인데 현금으로는 들어오지 않은 게 많네."
"그래. 화면에 돈이 찍히면 다들 부자가 된 줄 알아. 실제로는 사용 권한이 없는 미래의 결과를 담보로 잡아 놓은 거야."
"그럼 네 투자 성공담은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은 아니지. 실제로 돈을 벌었던 기간도 있었으니까. 내가 먼저 판 건 거래 예고였고, 늦게 산 건 후회였어."
준성은 모니터 왼쪽에 날짜를 띄웠다. 몇 년 전, 한 기업의 주식이 크게 오르던 날이었다. 준성의 계좌에는 상승 전에 거액의 예고가 들어와 있었고 그는 그걸 근거로 주식을 샀다. 하지만 정산일이 지난 후 고객 보상금 계정에서 같은 액수가 차감됐다.
"누가 고객 보상금을 빼갔는데?" 민석이 물었다.
"그 회사에서 받을 돈이 있던 사람들이지. 나는 시장에서 합법적으로 거래했어. 그런데 시스템은 그 수익을 만들어 주려고 다른 거래의 순서를 바꾼 것 같았어."
"확실해?"
"아니. 그때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거래 시각과 액수가 비정상적으로 맞물렸다는 사실뿐이야. 원인을 단정할 자료는 없었어."
민석은 그 정직한 대답이 오히려 이상했다. 준성이 남을 낚아채는 듯한 자신감을 버릴 때면 정말 큰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준성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계속 이걸 쓰지?"
"첫 번째 예고가 맞으면 신기해. 두 번째가 맞으면 재밌지. 세 번째가 맞으면 네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그때부터는 아무도 멈추려 하지 않아."
민석은 첫 보험 환급금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 순간 잠깐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돈이 들어온 사실이 가짜 시스템에 신뢰를 주었다. 오히려 그래서 무서웠다.
민석은 준성의 투자 기록을 뒤적이다가 유난히 검은색 펜이 많이 쓰인 페이지를 발견했다. 날짜 옆에 '상환'이라는 글씨가 반복됐다. 한 거래로 얼마를 벌었느냐보다 그 뒤에 돈을 어떻게 돌려놓았느냐를 기록한 장부였다.
"이건 뭐야?"
준성은 대답을 주저했다. "내가 빚을 졌다고 느꼈던 사람들 명단이야."
명단 옆의 금액은 서로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는 삼십만 원, 다른 사람에게는 삼천만 원. 소송을 통해 반환한 돈도 있었고, 상대방이 받지 않겠다고 한 돈도 있었다. 민석은 숫자를 더했다. 큰 이익을 얻었던 준성의 과거에 비하면 작은 금액이었다.
"이걸로 다 갚았다고 생각해?"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갚아야 할 사람이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럼 왜 했어?"
"내 계좌가 아닌 누군가의 일상에 손댔다는 걸 뒤늦게 알았으니까. 안 했던 사람이 된다고 해서 그 일이 없어지지는 않잖아."
민석은 비판적인 눈으로 숫자를 봤다. 이익이 컸던 만큼 책임도 컸다. 자신이 얻은 돈을 되돌려놓는 일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피해자를 모두 구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준성은 민석의 표정을 읽은 듯 말했다.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난 돈을 보고 달려든 첫 번째 사람 중 하나였어. 지금도 가끔 예고가 뜨면 손이 먼저 나가. 내가 그걸 끊지 못해서 장부를 적는 거야."
"그런데 왜 나를 도왔어?"
"네가 거래 상대방부터 찾길래. 예전의 나는 받는 금액만 봤거든."
그 말에 민석은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준성이 진실을 전부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거래 뒤에 남는 흔적을 정리하려 애써 온 것은 사실인 듯했다.
서윤은 창고 천장에 달린 조명을 바라봤다. "여기서 만든 자료를 기사로 쓸 수 있을까요?"
"아직 어려울 겁니다." 민석이 말했다. "거래 명세서가 시스템이 보여 준 것인지, 실제 은행에서 발행한 것인지 구분돼야 해요."
"좋아요. 그걸 구분할 단서가 있다면 꼭 보관해 주세요."
민석은 책상 위에 세 개의 봉투를 놓았다. '실제 계좌', '미래 예고', '사람의 진술'. 서윤이 그 세 종류를 따로 찍었다. 사진에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이 있었다. 실제 은행에서 발행한 거래 명세서는 그대로였다. 미래 예고를 인쇄한 종이는 글자가 지워졌다. 사람의 진술을 받아 적은 문장은 언제나 남았다.
"적어도 이것만은 알아냈네요." 민석이 말했다. "기록을 누가 통제하는지에 따라 증거가 남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해요."
"누군가 직접 본 걸 남길 수는 있죠." 서윤이 답했다. "그래서 기자가 필요한 거고요."
준성은 짧게 웃었다. "두 분 다 너무 믿음직하신데. 나는 지금까지 원장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거의 못 봤어."
민석은 봉투를 밀어 넣었다. "그럼 이제부터 많이 보겠네."
서윤은 컴퓨터 옆의 인쇄물을 집었다. 표 맨 아래에 '수익률 0.00%'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뭐예요?"
"내가 마지막으로 성공한 정산이야. 예고된 돈도 0원, 실제 변화도 0원. 어떤 사람의 돈이나 선택도 움직이지 않았지."
"그게 성공이라고요?"
"처음으로 내 장부가 나만의 장부였거든."
민석은 잠시 생각했다. 시스템이 항상 돈을 예고하고 사람의 선택을 흔든다면, 돈을 움직이지 않는 선택이 오히려 저항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으로는 백억 원의 미이행 정산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0원을 만들었어?"
준성은 오래된 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전망 중지'가 아니라 '정산 상대방 동의'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의 내일을 담보로 받는 돈이라면, 상대방에게 물으면 돼. 난 상대가 거절했다고 기록했어.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보다 거래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는 거지."
"상대방이 미래의 나면?"
준성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네가 풀어야 할 문제야."
민석은 사무실을 나가기 전 준성의 수첩 가장자리에 쓰인 날짜를 보았다. 그가 성공이라고 적어 둔 0원 거래는 다른 예고들보다 훨씬 짧았다. 한 장의 기록에 딱 세 줄만 있었다.
'상대방에게 조건 고지.'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음.'
'양쪽 잔액 변화 없음.'
그토록 큰돈이 오가던 장부에서 처음으로 거래가 성립하지 않은 이유가 적혀 있었다. 민석은 그것이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돈이 오가지 않아서 지킬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왜 미래 장부는 이걸 숨기려고 하지?" 민석이 물었다.
준성이 말했다. "0원짜리 거래만 늘어나면 원장을 이용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사람들이 돈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야 시스템이 돌아가."
"누가 운영 비용을 내는데?"
"기록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지. 큰돈을 얻으려고 거래를 확정하는 순간 수수료와 담보가 발생해. 그 규모는 내가 모르는 사이 엄청나게 커졌을 거야."
민석은 실제 금융 상품과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이 장부의 수수료는 현금만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포기한 선택, 늦춰진 치료, 사라진 반환 권리도 거래 비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원장에 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수익을 포기하는 거겠네."
"쉬워 보이지. 하지만 백억이 눈앞에 있을 때는 정말 어렵지."
민석은 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어머니의 빚을 갚아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원칙을 말하더라도 실제 결정의 순간에는 그 유혹을 이겨 내야 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친구가 수년 동안 적어 온 후회의 무게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자신도 훨씬 큰 금액 앞에서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저녁 일곱 시. 창문 밖 어둠이 짙어지자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발신 번호가 없었다. 준성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무슨 일이야?" 민석이 물었다.
민석은 준성이 수화기를 놓는 순간 상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전화선이 연결됐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일어난 반응까지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준성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관리인 4번이 아니라, 원장을 만든 사람이 온대."
"원장?"
"거래를 기록하는 장부의 원본. 이 모든 것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 있어."
민석은 그의 표정에서 과장을 찾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준성은 급히 컴퓨터를 껐다. 그런데 꺼진 모니터에 하얀 문자가 떠올랐다.
[정산 당사자 변경 신청 접수]
[기존 당사자: 강민석]
[변경 신청인: 서문재]
서윤이 이름을 읽었다. "서문재? 그 사람 누군데요?"
준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색 시계를 찬 남자."
잠시 뒤 민석의 휴대전화에 낯선 예고가 떴다.
[내일의 정산: +10,000,000,000원]
[조건: 강민석이 오늘 자정까지 서명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백억 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마이너스와 반대였다.
이제 선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백억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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